광해군 3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 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광해군 시절

■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제99호 | 20090131 입력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④문묘종사 논란 광해군의 출발은 좋았다.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만이 아니라 각 당파를 아우르는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후 복구에 나섰던 것이다. 각 당파는 전후 복구에 전념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묘종사라는 사변적 현안이 등장했을 때 광해군은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 사변적 문제로 연립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인홍과 삼천의병(100Χ73cm) :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임란이 발생하자 57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의 의병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조식의 제자 대다수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임..

광해군은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8호] 20090123 입력 ■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③ 동북아 정세 급변 아무리 좋은 정책도 주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은 당시 명나라를 성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외교관을 야당인 서인·남인은 물론 여당인 대북의 당론으로도 삼지 못했다. 서인은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며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다. 시대를 앞서간 군주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들의 태도는 이..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6호] 20090110 입력 ■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①험난한 세자 책봉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 탈환도의 한 부분. 당시 조·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던 무기들이 잘 묘사돼 있 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