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김창흡 초상 - 일본 덴리대학 소장

야촌(1) 2022. 12. 25. 13:40

작성일 : 2020. 10. 13.  01:34

 

▲김창흡선생 초상화 - 작자 미상 /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소장

 

김창흡(金昌翕)

[생졸년] 1653년(효종 4)~1722년(경종 2)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다. 이단상(李端相)의 문인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 김석주(金錫胄)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1721년(경종 1)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 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