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필자 종보 기사

이정암의 연안대첩 이야기

야촌(1) 2022. 12. 13. 23:21

작성일 : 2021. 8. 15.  23:23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안시성 전투’라고 불린 

이정암의 연안 대첩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이정암(李廷馣) 선생이 1592년 8월 28일부터~1592년 9월 2일까지 1천 4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연안성(延安城) 전투에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왜군 5천여명을 무찔렀다.

 

▲26世 이정암(李廷馣)선생 영정

 

[인물 요약]

 

[생졸년] 1541년(중종 36)∼1600년(선조 33) 9월 10일./향년60歲

[문과]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36)/합격연령 : 21歲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5위(10/100)/합격연령 18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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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이며, 서울 출신이다. 세계는 월성군 이천(月城君 李薦/菊堂公派派祖)의 9代孫으로 헌납(獻納)과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역임한 이거(李筥)의 증손이고, 조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며.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을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오재(悟齋)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또한 이조참판 이정형(李廷馨)의 형이다.

 

1565년(명종 20)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에는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외직인 전라도도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고,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을 거쳐 다시 외직인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從五品)로 나갔다.


그후 1569년(선조 2)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경직(京職)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시 병조정랑으로 전직하여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파견되어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正言/正六品)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예조정랑· 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고 《명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으며,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고, 그해 여름 연안부사(延安府使/從三品)가 되어 군적(軍籍)을 다시 정리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76년(선조 9) 장단부사(長湍府使)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正三品)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에 양주목사로 나가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하여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584년 장령· 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587년(선조 20)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내왕하는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선조 24) 첨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승지·공조참의·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선조가 갑자기 파천(播遷)을 단행하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왕을 뒤쫓아 개성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로 해직된 터라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는 아우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개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황해도 연안으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5천 여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여, 주야 5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하여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 병조참판· 전주부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선조 29)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豊德: 개풍의 옛 지명)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1600년(선조 33) 9월 10일 질병[종기]으로 세상을 떠났다.


1604년(선조 37)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 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으며,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오늘날엔 고양의 사류재사우(四留齋祠宇). 충남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고 있다.

 

저서로는 《상례초 喪禮抄》·《독역고 讀易攷》·《왜변록 倭變錄》·《서정일록 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宋子大全  ◇燃藜室記述

◇壬亂海西義兵에 대한 一考(李章熙, 史叢 14, 1969)

 

충목공 사류재 이정암선생 사우                                            보령의 화암서원 숭덕사(花巖書院崇德祠)

    소재지 : 경기도 일산동구 사리현동.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산27-1번지

 

 

●전후 실묘한 선생의 묘를 찾다.

 

▲이정암선생 묘 / 소재지 : 황해북도 개풍군 연강리 야산 중턱

 

선생의 묘는 필자가 개성의 익재(益齋)선생 묘지석 발굴차 2008년 1월 24일(목)과 2월 13일(수)에 북한을 방문, 당시 북측 개성송도사범대학 전룡철 사학교수에게 두차례 관련자료를 전달, 선생의 묘를 찾아달라고 의뢰 한바 있었다,

 

그해 7월 19일(토) 북한 당국이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기관지 조선신보에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이창진(42) 실장의 말을 인용, 개성시에서 서남쪽으로 3.5리(14㎞) 떨어진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 연강리(延江里)의 야산 중턱에 있으며 묘와 함께 망주석(望柱石) 2개와 문인상(文人像) 2개, 1922년에 후손이 세운 묘비 1개가 발견됐다고 보도 한바 있습니다.

 

이정암 선생의 저서 사류재집(1736년 간행본).                이정암 선생의 저서 서정일록 /임진왜란의 전황을

                                                                                                             록한 난중일기이다. 1592년에 기록한 필사체이다.

 

연안성 대첩비(북한보물990호)

    1608년(선조 41)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용봉면(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세워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성대첩비의 탁본문(끝부분)

 

연안대첩의 항전.

 

임진난(壬辰亂,1592년~1598년)때,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공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元首)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李月川, 이정암)의 연안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在者壬辰之亂其力戰破敵雄嗚一世 水戰則有 李忠武之 閑山島焉 陸戰則有 權元師之 幸州焉有 李月川之 延安焉 史氏記之 遊談者稱之/북관대첩비 書頭에서)

 

당시 이정암(李廷馣) 선생이 왜군을 맞아 황해도 연안성에서 승리한 연안대첩(安大捷)을 당대 사람들은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에 비견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전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어쩌면 이것도 분단의 비극이다.

 

휴전선 저쪽에서 일어난 일이라 소홀이 여긴 탓으로 어느덧 반쪽의 역사만 배우고 있음이다. 해방 후의 북쪽 역사가 지워지고 월북자, 납북자의 작품이 논외(論外)되는 현상이야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조선시대의 역사까지 남북이 갈라져 있으면 되겠는가!?

 

말하자면 우리 역사의 위인을 한분 잃어버린 셈이니, 우리는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 장군은 잘 알고 있지만, 연안성 싸움의 이정암 장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게 없다. 하지만 왜란 이후에 작성된 아래의 선무교서에는 김시민과 이정암의 이름이 나란하다. 

 

연안성 전투가 진주성 전투 못지않게 치열했다는 방증이니, 오죽하면 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던 광해군은 연안성 싸움을 '조선의 안시성 전투'라고까지 했으랴?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교서(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敎書/이정암 2등●) 

 

이 선무공신(宣武功臣)교서는 임진왜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18명의 무신(武臣)들에게 내린 훈공(勳功) 문서이다.

 

특히 이정암이 싸웠던 왜군은 소서행장, 가등청정과 더불어 조선침략의 3대 선봉장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1568~1623]로 그들 중 가장 젊은 24세의 청년장수였다. 풍신수길이 그런 흑전장정에게 선봉을 맡긴 것은 그의 패기와 용맹을 높이 샀다는 말일 터이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그는 소서행장과 함께 피난간 선조 임금을 추격해 평안도까지 치올라갔으며 군량미를 확보하러 다시 내려와 황해도 곡창 연백평야를 지키던 연안성 공격에 나섰던 것이었다. 이정암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의주(義州)로 피난가는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며, 파직되어 관직이 없었다. 그럼에도 백의종군을 결심하였던바, 개성유수인 아우 이정형『李廷馨,1549년(명종 4)~1607년(선조 40)』과 함께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이미 뚫린 상태였다.

 

이에 그는 의병 1,400여명을 모집해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과 함께 고성(古城=오래된 옛성)인 연안성으로 들어갔다. 평안도로 진격한 왜군의 일군(一軍)이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점령하러 내려오리라 예상했던 것인데, 그는 과거 황해도 연안부사와 장단부사를 지낼 때 선정을 베푼 경력으로 의병들을 쉽게 규합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그를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해 힘을 실어주었다. 황해감사와 연안부사는 이미 달아난 후였다.

 

연안군과 연백평야 지도

 

<선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거니와 연안성은 형세가 좋지 않음으로 인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성(城)이었으나 이정암은 그 빈성에 들어가 웅거했다. 사람들 또한 "성이 얕고 군사가 적으며, 식량 또한 없으니 많은 적과 맞서 오래도록 지킬 수 없다"며 반대했으나 정암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백평야의 초입인 연안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연백평야를 지킬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니 그는 기어코 성으로 들어가 흩어진 사람들을 부르고, 군량과 병기를 모으고 수선하며 결전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8월 28일,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가 5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城) 앞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왜군의 군세에 실색(失色)했고 그중의 일부는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정암은 단호했다.

 

"나는 경악(經幄, 임금을 가르치던 직책)에 있던 늙은 신하였으나 말 고삐를 잡고 임금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파직되었으나) 왕세자[광해군]로부터 초토사(招討使)라는 명을 받았던바, 성 하나의 수비라도 맡아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양민을 이끌어 성에 들어왔거늘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어찌 차마 하겠는가.

붙잡지 않을 터인즉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성을 빠져나가라."

 

아울러 성이 보잘것없는 것을 보고 항복을 권하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에게도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너희는 병(兵[兵器])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 불의로 의를 치려함이니 너희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왜장은 조총부대를 선봉으로써 성을 삼중으로 에워싸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자신들의 막강한 화력을 과시해 기선을 제압할 요량이었다. 그러는 동안 흰 말을 탄 왜장 한 명이 성(城)의 외각을 둘러보며 성채(城砦: 성과 요새)를 만지고 지나갔다.

 

성곽의 부실함을 주지시켜 기세를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민(城民)의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으니, 그 꼴을 지켜보던 수문장 장응기(張應祺,1556~1630/연안군수)가 화살을 빼어 활에 걸었고, 화살은 곧장 왜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왜장이 말에서 고꾸라지자 성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에 성루(城壘: 성을 둘러 싸고 있는 담)의 이정암이 좌우를 둘러보며 "보라. 이것은 적들이 패할 조짐이로다....." 하는데, 그 순간 요란한 총성과 불꽃이 작렬했다. 왜장이 쓰러지는 것을 본 흑전장정이 공격을 앞당긴 것이었으니 수천개 조총의 일제 사격으로 사방에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쏟아졌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는 1582년 14세의 나이로 풍신수길 휘하의 전투에서 전공을 기록한 이래 시즈가다케 전투, 네고로·사이카의 난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멀리 규슈까지 원정한 경력을 가진 젊고 패기만만한 장수였다.

 

반면 이정암은 본래 문신이었을뿐더러 키와 몸집이 작고 가냘파 제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 보이는 사람이었다.(<선조수정실록>) 하지만 성정(性情)은 외모와 같지 않았으니 전투에 임해서는 어느 무장 못지않은 지휘력을 보였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며 정교하고 민첩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성색(聲色)에 동요되지 않았으며 시세를 따라 저앙(低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시배(時輩)들에게 배척받았다.(<선조수정실록>)

 

이정암은 많은 적들이 몰려듦에도 태연자약하였다. 화살이 부족함을 알고 있던 그는 적들이 다가와도 경솔히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돌과 나무를 던지고 끓는 물을 부어 방어했으며, 활을 쏠 때는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다락 등을 뜯어 방패로 삼고 가마솥을 걸어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 어린이 부녀자 할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그는 또 적들이 공성기(攻城機: 성을 공격할때, 성을 허무는 장비를 말함)와 지형 등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유리한 공격을 해오면 이에 맞서 성 위에 흙담을 쌓아 막았고, 적이 야습을 해오면 횃불을 던져 먼저 태워 죽였다. 하지만 석시(石矢, 돌과 화살)와 방패로 쓰던 문짝 등도 다하고 강화에 청했던 원병도 나타나지 않자 결국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암은 띠[茅]를 이어 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말했다.

 

"내가 사녀(士女)를 불러 모아 나라를 위하여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힘이 다한 듯하구나. 장사(將士)들이 모두 죽는 마당에 내가 무슨 낯으로 혼자 살려 들겠는가. 성이 함락되는 날, 그대들은 이 막사(幕舍)를 태우라. 나는 여기서 죽겠다."

 

그러나 4일 밤낮으로 공격한 적들도 총탄이 소비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어느 순간 소리만 지를뿐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총탄이 떨어졌음을 감지한 성민들이 환호하며 쇠북을 쳐댔고,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그러자 그것이 마치 퇴각 신호라도 되는양 적들은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그때가 9월 2일 저녁으로, 성안의 희생자는 30명이 넘었고 대다수의 사람이 기진했지만 이정암은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18명의 목을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30여석을 빼앗았다. 이 기적 같은 승리를 보고 받은 광해군은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경(卿)은 흩어져 도망하는 군사를 불러 모아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켰고, 섶을 쌓아 스스로 타죽을 결심을 하였기에 백성들도 기꺼이 함께 죽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높은 사다리와 조총이 끝내 무용지물이 되게 만들었던 바, 이는 안시성 성주(安市城 主) 외에는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다.

 

이로써 소문이 사방에 퍼지니 이제는 모두가 성을 굳게 지킬 것을 생각하게 됐고,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의 뱃길도 거리낌 없이 왕래하게 되었다. 이것을 어찌 경의 힘이라 아니하겠는가. 지금부터 더욱 지키는 기구를 손질하여 적들이 날마다 공격해오더라도 영영 침범치 못하게 하라."

 

연성대첩은 정말로 조선 군민의 사기를 진작시켰는지 이후 많은 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고, 이정암은 연암성 이하 황해 13주(州)를 수복하여 굳건히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 수 있었던바, 전라·충청도와 의주 행재소(임금의 임시 처소) 연결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연암성 승리 후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적이 28일에 성을 포위했으나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라는 모든 공치사가 생략된 12자 만의 매우 쿨한 장계를 행재소에 전하였는데, 전후(戰後) 선조의 칭찬에 대한 답변도 한결같았다.

 

"신(臣)은 별로 한것이 없고 사민(士民)들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낮은 자세가 군민(軍民)들의 아낌없는 희생을 이끌어냈을 것이고, 열악한 싸움을 뒤집어 대첩을 이룩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壬亂海西義兵에 대한 一考(李章熙, 史叢 14, 1969)

◇임진왜란 연안성 전투 - 황현필(역사가)

◇기타 인터넷 자료 수집 편집

 

글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