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재(李裁) - 21世

야촌(1) 2022. 10. 1. 23:03

■ 이재(李裁) 21世

     [생졸년] 1392년(공양왕 4)~1464년(세조 10)

     [세계] 경주이씨 국당공 후 제정공파

 

조선전기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배(景培), 호는 월파(月坡). 고조(高祖)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문효공(文孝公) 국당(菊堂) 이천(李篟)이고, 증조(曾祖)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문정공(文靖公) 제정(齊亭) 이달충(李達衷)이다.

 

1413년(태종 13) 『태종실록(太宗實錄)』2월 6일자「이승적 졸기」에는 아들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선생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군된 이승적(李升啇)의 양자로 입적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상 생부는 알 수 없다.

[활동사항]

이재李裁,1392(태조 1)~1464(세조 10)는 1432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는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문종(文宗) 때 호조 참판을 거쳐 단종(端宗)때 예조판서에 발탁되어 정무에 힘썼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을 위한 야심때문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黃甫仁) 등이 해를 입자 벼슬을 그만두려고 하였지만 단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병을 빙자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도호부 하빈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조차 이재가 판서를 지낸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단종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집 뒤 산골짜기에 들어가 서울을 향해 목 놓아 울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1464년(세조 10) 73세로 임종할 때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무덤에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추색정(秋色亭)을 짓고 이재를 추모하고 있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다.

 

[단종을 그리워하는 연군시(戀君詩)

 

幕幕涔陽浦(막막 잠양포) / 아득한 잠양포구에
慘慘梧岫雲(참참오수운) / 애처로운 구름이 솓아오른다.
子規啼古棲(자규제고서) / 두견은 옛둥지 그리워서 울고
哀鴻叫失群(애홍규실군) / 무리를 잃은 기러기는 슬피 우는데
旅人腸九曲(여인장구곡) / 나그네의 구곡간장은
淒斷不堪聞(처단불감문) / 끊을 듯한 소리에 견딜수가 없구나.
日暮秋色遠(일모추색원) / 해저문 가을빛은 멀어져만 가는데
何處望夫君(하처망부군) / 떠나신 (임금)님을 어디서 뵈올꼬

 

 

연군시(戀君詩) 편액

 

↑추색정

   옛 추색정은 후손들이 1931년에 건립한 정자였으나 1917년 도시재개발계획에 편입되어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585-1(대지 343평)로 이건하여 2018년 11월 4일 준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