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求忠堂 李義立 行狀 - 덕봉 이진택

야촌(1) 2022. 4. 28. 00:57

30世 이의립『李義立,1621년(광해군 13)~1694년(숙종 20)


■ 30世 이의립(李義立)

 

   [세계] 경주이씨 교감공파로 25세 관란공(觀蘭公) 이승증(李承曾)의 5대손.

   [생졸년] 1621년(광해군 13)~1694년(숙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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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의립(義立), 자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求忠堂은 사호(賜號-임금이 내린 호)]이고,  성(姓)은 경주(慶州)로 1621년(광해군 13) 5월 18일 당시의 경주부 전읍리(오늘날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에서 이영부(李榮富)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나라의 유황 광맥과 비철(砒鐵) 광맥을 최초로 찾아내 제련기술을 정립한 사람이다.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로 중시조(中始祖)로 부터  30世이고, 중조10세이신 문하시랑공(휘 춘림)의 21世가 되고, 교감공(휘 존사)의 12世가 되며, 관란공(휘 승증)의 5대손이다.


울산 농소달천에는 철장이 있는데 쇠의 발견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문화로 바꾸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부(富)의 축적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국력으로 연결되었다. 이 철장으로 조선시대 불벌정책에 기여한 종조가 구충당(求忠堂)이시다.


이에 대한 기록들을 관찰해보면, 우의정(右議政) 이완(李完)-국당공후, 충무공 이수일의 삼남)공이 이르되 이번 이의립(李義立)이 200여호의 흡취군으로 무쇠를 뽑아내어 전후에 거둔 세포가 많았으며, 이번에 다시 솥200좌를 가지고 왔으니 합당한 상전을 줄만하다 하니,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당상첩문(堂上帖文)을 주어 격려하자 하니 현종(顯宗-조선 제18대왕)이 승낙하였으며,1660년(현종 원년)이니 3보 창조일기와 세보, 문집, 묘갈명에 그 기록이 있다.


구충당(求忠堂)은 36세에 청동산과 초산 등을 답사하는중 현몽하고 달천산(望祭山-오늘날 울산시 북구 농소동 달천에 있는 산 )에서 철광을 발견했고, 반척곡(般尺谷)에서 철을 녹이는 비뢰를 찿아냈다. 그후 39세부터는 비철 제련법을 연구하고, 49세때(현종 10)에는 권이산에서 유황을 발견하여 유황으로 화약을 만드는 자조법도 연구한 기록이 있다.

 

이 공헌으로 1673년에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제수하니, 무학걸제(無學乞才)는 목민불능(牧民不能)이라 고사불루하니. 현종은 위로 3을 추하고 가선의 품계를 내리니 달천철장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공(公)은 불벌정책에 호응하여 1659년에는 각궁(角弓-활) 280자루, 함석(咸錫-주석) 100근, 연철(鉛鐵-납) 1000근, 세면포(가는베) 100필, 주철환(탄알) 73만개, 부정(솥) 440좌를 위국물품으로 자진헌납하였다.


공의 아들 극경(克敬)도 유황번조법(硫黃燔造法)을 전수받아 군문에 유황감관으로 재직, 1712년에는 원주와 제천에서 동광맥을 발견하여 공헌하였고, 3형제가 유황과 위국물품울 한성으로 운반하는 등 광산개발에 기여, 이후 철장은 종자 종손에 의하여 경영되다 13세손 은건(殷健)에서 일제(왜놈)에 약탈당했다.


공은 1674년(현종 15)에 74세로 별세하여 월서동에 예장하였는데, 1902년 두동 삼정으로 이장하였다.
울산청년회에서 위선사업 일환으로 묘소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현재 쇠불이 터는 달내주변에 89개소가 있으며, 민속놀이로 재현하여, 지난 2004년 10월에 제45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울산 달내철장 그리고 쇠부리"라는 민속놀이로 다시 이땅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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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립(李義立).

 

이의립(李義立)의 본관은 경주. 자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求忠堂). 신라좌명공신 급량부대인 휘 알평의 후손.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된 이영부, 모친은 경주 설씨. 1621년(광해군 13년) 5월 18일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옛날 경주부 남쪽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5세 때 천자문을 읽고 7세 때에 '오포시(烏哺詩)'를 지었다. 조선시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광산의 개발과 산업을 일궈낸 경제인이자 과학자로 생전에 "나라의 일에 병(兵)과 예(禮)보다 필요한 것이 없으며 솥과 농기구는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1630년(인조 8년) 10세 때 모친 설씨가 세상을 떠났다. 1635년 안동권씨(도사 벼슬을 한 계우의 손녀)와 혼인했다. 슬하에 극경, 극발, 극룡 등 세 아들을 두었다. 1640년 2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642년 8월 상복을 벗고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양친께서 돌아가셨으니 효 대신 충(忠)을 하고자 하나 재주가 없다. 무예조차 뛰어나지 못하니 충성도 여의치 않다. 생각 컨데 나라의 큰일로는 군사와 농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조총에 쓰는 화약은 유황이 없으면 안 되고, 농기구와 가마솥은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 이 모두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라 밀 무역 꾼을 통해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발각이 되면 청일 양국으로 부터 당하는 치욕이 참으로 크다. 이 땅에서 이것을 얻으면 나라의 위험을 미리 방비하는 것이 되니 충성의 길과 다름없다."


1646년 의립은 치술령에 올라 백일기도를 올리고 팔도강산을 답사했다. 가야, 금강, 묘향, 구월, 백두, 속리, 지리산 등을 답사했다. 태백, 소백산에서는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1657년(효종 8년)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울산 달래산(達川山)에서 무쇠(수철)와 경주 반척산 계곡에서 비상을 각각 발견했다.


1659년 무쇠와 비상의 제조법을 터득했다. 1660년(현종 원년) 각궁(角弓) 280통, 함석(咸錫) 1백근, 연철(鉛鐵) 1천근, 세면포(細綿布) 1백필, 철환(鐵丸) 73만개, 부정(釜鼎) 440죄를 만들어 훈련도감에 바쳤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다.


1669년 의립은 만호 봉에서 유황광맥을 발견했다. 1671년 제조법을 터득하고 이듬해 2월 유황을 제조, 비변사에 바쳤다. 현종이 그 충정과 식견에 감탄해, '구충당'이란 호를 내리고, 수철이 나는 '달천'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했다.

 

1673년 의립은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평안남도평원지역)에 제수됐으나 사양했다. 현종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함께 위로 3대에 걸쳐 증직(贈職)을 내렸다. 부인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의 교지를 내렸다. 또 역군 180명을 주어 해마다 유황을 제조해 군수물품으로 충족케 했다.


1685년(숙종11년) 의립은 동생 계립에게 글을 보내 경주부 동쪽 효문동에다 구충당을 짓도록 했다. "늙어서 집에 들어가게 되면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심중에 더욱 간절할 터이니 문은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만들어라. 대청마루에는 난간에 오르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산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항상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이곳으로 와 편액을 '구충당(求忠堂)'이라 붙이고, 임종 시까지 그 곳에서 기거했다. 1694년 3월 12일 의립은 오시(午時)에 정침(正寢,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4세. 9월 20일 월서동 선대의 묘소 아래 묻혔다.

 

1902년(고종 39년) 맏손자 민구(旻久)가 옛 묘터 밑 언덕에 무덤을 옮겨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정자(正字) 벼슬을 지낸 최현필이 지었다. 현종이 하사한 달천광산은 이의립의 후손이 관리해 오다 일제 때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철광공사에서 경영권을 소유하기도 했다.


이의립의 유고본이 사후 216년이나 묻혀 있다가 1910년 <구충당문집> 목판본이 단책(2권 1책)으로 간행됨으로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2000년 12월 구충당문집발행위원회 이기형의 <국역 구충당문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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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忠堂李公行狀 - 덕봉 이진택


公諱義立姓李氏。慶州人。新羅佐理功臣諱謁平之後。觀瀾諱承曾之玄孫。曾祖蕃資通訓大夫行禮賓寺僉正。贈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祖好贈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父榮富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妣慶州薛氏。及第永卓女。贈貞夫人。生公于府南錢邑里第。皇明天啓辛酉五月十八日也。十歲母夫人歿。終鮮兄弟。事父專養。自弱齡時。菽水藥餌之供。躳親爲之。以此無讀書之暇。而凡諸酬應文字。用之自足。世稱其才稟之具。戊寅同樞公有疾。公侍湯無異老成人。一日疾忽劇。公斫指得效。辛巳同樞公竟以天年終。葬祭以禮。廬墓終三年。晨夜展拜。不離尺寸。當膝處地坎草死。喪畢。慨然嘆曰。爲人子而未盡養志之道。非人子也。爲人臣而未效殉國之忠。非人臣也。兩親已歿。雖欲孝誰爲孝。吾將以事親之心事君可也。有國之道。莫重於兵農。而鳥銃火箭之利。必有火藥然後行其巧。非硫黃則不能成火藥。我國不知用火箭鳥銃。故以數千里用武之地。敗績於壬癸島夷之變。丙子鐵騎之難。然則軍國之最要者硫黃也。歲以數百斛米。貿市百斤黃於燕倭兩界。而每當戰時。量給戰卒。不過三四放而止。此施爲而已。况事發潛商。則彼人之困侵莫甚。且農器釜鼎。必以水鐵爲之。而非方域所産。故東國素稱土沃而率多陳荒之地。民國之用。雖豐歲每患不足。是可憂也。至於砒礵則其緊要非二者之比。而每取用於鄰國。亦一見侮之事也。三者不産於我土則已。若有之而不知。則吾能盡心極力搜出而後已。乃以順治三年丙戌。始事登鵄鶐嶺。誅茅結廬。沐浴祈禱凡百有十日。而下意以爲伽倻,金剛。必有異産。求之兩山而無所得。遂轉至北關。回自兩南。若白頭,九月,妙香,三角,智異,俗離。皆其所經之名山。而其間波濤之險。虎豹之窟。履若平地。耕雲穿霧。風餐露宿者並十年。而終無所得。乃嘆曰從古無功者。每由半途而廢也。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吾將採坊坊谷谷。千仞而無功。則萬丈而後已。反而又求于道內山川。登太白也。竆搜十日。誤墜十丈坑谷幾死。入小白也。爲獰豕所逐。緣古木獲免。猶自慰曰陷之死地而後生。置之亡地而後存者。豈獨兵事耶。惟患其誠之不足。亦恐其志之未堅。飢不爲病。老不知倦。行宿于聞韶館。是夜夢一黃冠素服者。自稱西嶺之神。欣然款之曰人能盡心於家國。神亦不感於幽顯乎。嶠南有八公,七寶之山。君行若不利於八公。則其在七寶之山乎。蘧然而覺。心如自負。因探黃脈於靑松,盈德,興海,淸道,密陽,梁山,金海之界。東敗西喪。鬱悒而行者。又二年矣。行到于慶蔚之境。暮投旅店。一枕假寐。忽有神翁如聞韶之所遻者。持杖而敎曰今則君之志成矣。明日必有異事。君其識之。村雞一聲。栩栩然起。忽有神鵲環屋而鳴。倐然南飛。怪而隨之。始得水鐵於達川。又得砒礵於盤尺洞。募人搜掘。枕石乍卧。似夢非夢中。前度神人。怳自空中而言曰傾覆栽培之謂天道。誠感陰助之謂神靈。爾亦知否。循山而東。遵海而北。則㻴瑚峯來歷處。必得黃石。今日之敎我也。異日之成天也。難以歲月求之。愼哉。覺來精神怳惚。自念無形之物。雖艱得之。不可輕易煑之。先設砒礵二店而通其利。貿二百八十桷角弓,一百斤鉛鐵,十百匹細綿布。又鑄鐵丸七十萬箇,釜鼎四百四十坐。以顯廟元年庚子。運納于訓局。訓長使之領往江都。分置於都中八堡。啓授同知中樞府事。公感恩圖報。益勵其志。別造釜鼎一百坐。船運于北關。換四百石米而還。役粮旣備。更自前度之山川。轉至一峯下。蓋卷耳云者也。又虔誠祈禱過三夜。忽有明輝玲瓏四圍。穿未丈餘。果得黃石。首尾並二十餘年。遂雇軍煑吹。千試萬方。造得巨萬。壬子歲。納于籌司。上大嘉其功。特除肅川都護府使。公力辭不受曰臣無學術才能。何敢貪天之功而爲牧民之官乎。新造硫黃。不可畀之他手。僨事軍國。願主幹是事。仰答天恩。上義而許之。召入差備門外。宣醞賞賜。授實同知職。追贈三世。遂命硫黃別將。有世世勿替之敎。於乎公之忠義。已蓄於事親之日。而立志堅固。尤於廬墓展拜之時不離尺寸。見之矣。苟非其孝。焉有其忠之移於君乎。倘非其志之堅固。亦安有成功之如彼乎。故求忠臣。必於孝子之門。又曰有志者事竟成。此豈虛語耶。始公之求黃未得而栖遑奔走之際。囊槖屢空。行色悽愴。見騎郞權繼道於京城。逢咸興士人金應錘於望洋亭。各以錢數千贐之。而權則曰君以閭閻之一匹夫。奮不顧身。爲國求珍。其誠可尙。然地中所藏。何處可得。金則曰營事之狼狽。行路之間關。雖甚良苦。而至誠所感。終必有得矣。末乃成就之至於斯。則二人之鑑識。蓋亦不同矣。晩年還鄕。築室于慶州府東孝門洞。扁其堂曰求忠。遂終老。甲戌三月十二日。卒于寢。壽七十四。葬府南月西洞。公娶安東權氏。都事繼禹孫女。公生時爲貞夫人。後公三歲而卒。權葬于新院子坐地。未果合祔於公墓。生三男克敬,克發,克龍。克敬子世聃。生琪,球,珩,珣。克發子慶致,慶浩。慶致生夢贒。慶浩生漢宗。克龍子載聃生璘。東觀,東欽琪出。東垷,東城球出。東華,東燁夢贒出。昌運漢宗出。東柱璘出。男女孫並若干人。請狀者東柱也。恐其泯沒無傳。屬以家乘。使撮其跡。其在旁裔之誼。不敢以不文辭。遂書其大槩如右。

 

德峯先生文集卷之四 / 行狀

 

 

필자소장품(초간본) - 1910년 간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