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덩샤오핑(鄧小平)

야촌(1) 2022. 3. 30. 00:11

덩샤오핑(鄧小平)

생졸년 : 1904년~1997년/ 壽93歲

 

중국공산당 2세대의 주요 지도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의 핵심적인 인물로 마오쩌둥의 견제를 받아 실각과 복권을 거듭했다.
마오쩌둥 사후 대대적인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에 시장자본주의를 도입해 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2세대의 가장 주요한 지도자로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을 시도하면서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반복되는 실각과 복권을 거쳐 마오쩌둥과 화궈펑 이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했으며,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덩샤오핑은 1902년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엘리트 계층이었던 덕에 그는 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에서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그는 공산주의자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귀국했지만 1926년에 다시 모스크바 중산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27년에 귀국했다.

 

1931년 마오쩌둥이 주더와 함께 장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장시 성에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기반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으며, 1934년에는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여했고, 중일 전쟁 때는 공산당 팔로군에서 정치위원을 지냈다.

 

그가 공산당의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당 중앙위원이 되면서부터다. 그는 1949년에 제2야전군 정치위원으로 장강 도하작전을 수행했고, 난징 점령을 주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따라 공산당 내에서 그의 위치도 점차 상승하여 국무원 부수상, 정무원 부총리, 당 정치국 상무위원, 총서기 등을 역임했으며, 이때부터 실용주의를 주장한 류샤오치 등과 관계를 맺었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 주석을 사퇴하자 뒤를 이어 류샤오치가 국가 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기존 정책을 비판하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라며 시장경제 정책 도입을 설파하며,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제도를 갖추고, 부르주아 엘리트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류샤오치와 노선을 같이하면서 마오쩌둥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1966년 5월 16일, 공산당 내에서 추진되고 있는 자본주의, 실용주의 노선을 없애고 공산당을 개조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전역에서 홍위병을 양성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모든 자리에서 실각했다.

 

이후 1973년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국무원 부수상으로 복권된 그는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위원회 총참모장 등을 지내며 다시 공산당 정치 세력의 중추가 되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다시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주석이 된 화궈펑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7월 그를 복직시켰다.

 

다시 복귀한 덩샤오핑은 당을 장악하기 위해 화궈펑과 대립했고, 폭넓은 지지층을 기반으로 화궈펑을 밀어냈다. 그 후 총리에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에 후야오방(胡耀邦) 등을 세우고 정부와 공산당 내의 요직을 자신의 인물들로 채웠다. 이로써 1981년 그는 공산당 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단행해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 중국식 사회주의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경제 정책에서는 실용주의 노선을 따라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념에 관계없이 효과적인 정책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덩샤오핑의 근대화는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의 근대화, 기술의 근대화 등 4대 목표로 요약된다. 네 가지 근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며, 모든 정책은 사회주의적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선순위를 두고 채택되었다.

 

따라서 그는 각 지역으로부터 제안된 개혁 정책이 서방의 자본주의와 비슷하더라도 성공적이라면 도입했는데, 이러한 개혁 정책은 마오쩌둥의 ‘농민으로부터의 개혁’과도 달랐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도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즉 덩샤오핑의 개혁은 지역에서 중앙으로 이어진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자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시장경제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덩샤오핑이 취한 중국의 경제 정책을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라고 한다.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 방문 후 귀국하여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不管黑猫白猫, 捉到老鼠就是好猫).”라는 중국 속담을 빌어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것은 자신이 책임지고 관리하고, 정책적으로 소련을 대신해 미국, 일본과 합작하여 기술을 도입하고, 기업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또한 투자에 있어서도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의 자본이 유입되고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양성됐다. 이렇게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을 보장하는 등의 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중국 경제는 연간 10퍼센트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덩샤오핑은 공산당 부주석이자 정치국 상임위원회 의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만 장악하고 있었으나, 총리나 총서기 등 최고위직에 자신의 인물을 포진시킴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정책에 충분히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임위원회에서 물러나고,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을 사퇴하면서 덩샤오핑의 지배 체제에 위기가 다가온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정부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정부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이다. 이것은 덩샤오핑 집권 후 이루어진 개혁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급속도로 이루어진 경제 발전에 비해 정치 개혁이 부진하여, 고위층이 부패하고 빈부 격차가 심해진데다 불만이 점점 커졌으며, 당 내에서 과감한 정치 개혁을 주장하던 후야오방이 죽고 나자 공산당 정부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진 데 대한 비난이 시위로 연결된 것이었다.

 

톈안먼 사건은 중국의 정치 체제에 반기를 든 민주화 시위였다. 덩샤오핑과 공산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맞섰으나 시위는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군사들은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학생, 시민, 군인 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력으로 위기를 이겨 낸 덩샤오핑은 계속해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으며, 기존 보수파를 대신하여 개혁파인 주룽지(朱鎔基) 등을 발탁했다. 덩샤오핑은 1994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고, 1997년 2월 19일 사망했다.

 

출처>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홍문숙, 홍정숙 |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