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자·위만·한무제, 한민족 지배 주장은 허구다.
교과서‘한무제 한반도 정복 후 사군설치’자체가 틀려,
중국과 일본의 조작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우리나라는 고대 중국과 일본을 지배한 민족이다. 중국·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선조에 대한 치욕이다. 역적과 다름없다. 필자도 초등학교 재학 당시 교과과정 중‘우리나라의 발달’ 부분에서‘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는 내용을 배운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왜곡된 역사다. 중국과 일본이 조작한 허구의 거짓 역사다.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일이 없다는 것은 중국사에도 명기(明記)된 사실이다. 필자도 수차에 걸쳐서 본 연재를 통해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재차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사실은 기자(箕子)가 우리민족을 지배한 일이 없고, 위만(衛滿)이 우리민족의 지배자가 된 일이 없으며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 못한 것은 거론의 여지가 없이 다 판명됐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말하고 위만(衛滿)이 한민족(韓民族)을 침략하고 우리한민족을 지배했다고 하나 이는 위조다. 진실이 아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중원을 주름잡던 예맥조선을 제대로 알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고시라(高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이 단군의 수(壽)라 했다. 이는 모든 부족의 족장(族長)을 다 단군(檀君)이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부족 중 그 주체(主體)는 바로 예맥조선이었다.
서전(書傳) 무성편(武成篇)에‘화하(華夏) 만맥(蠻貊)’이라 했다. 즉,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 예맥이라 가록한 것이다. 무성편(武成篇)은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예맥조선은 기자조선보다 먼저 건설되고 극히 강대해 중국과 대립(對立), 병칭(竝稱)된 것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도 중국을 정벌한민족은 예맥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이 사실을 동이전에 기록 했다.
위만조선의 허구를 밝힌다.
위만은 우리한민족(韓民族)을 지배 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도 ‘연인(燕)人) 위만이 한민족(韓民族)을 침략하고 지배했다는 중국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하고 위만조선을 기점(起點)으로 편찬함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러한 교과서를 편찬한 자는 제대로 연구는 하지 않고 중국사의 위조를 맹신해 그대로 뇌까리고 있는데 이를 말하기 전에 중국의 허구 역사를 제대로 차분히 검토하고 나면 위만은 우리민족을 지배치 못한 것을 다 판명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중국사기(中國史記)에는 위만(衛滿)에 대해 기록은 그의 주군인 노관(盧綰)을 한고조가 연(燕)나라 왕으로 임명했는데 노관(盧綰)이 한고조를 배반하니 위만도 같이 배반하다가 실패해 조선에 망명했다고 했다. (史記 卷之九十三, 列傳第三十三).
고조선 서쪽 변경(邊境) 난하(灤河)유역에 자리했던 위만(衛滿)이 서기전 108년 한나라에 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 임둔, 진번3군이 설치되고 그 이틈 해 현토군도 설치됐다. 그런데 중국이 말하는 한사군의 내막을 조사해 보면 껍데기만 있고 내용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인이 말하는 한사군(漢四郡)의 지배 야욕은 실현 된 적이 없다. 우선 한사군을 폐지하고 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던 설치 당시의 지역도 대지 못할 뿐 더러 얼마 안가서 합군하고 포기한 기록도 전혀 없다.
이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 등 3군(郡)을 예맥에게 빼앗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한사군 설치 후 25년이 지나 26년이 되는 해에 예맥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2군을 탈취하고 현토군(玄菟郡)군도 대부분 탈취해 예맥의 지배를 받았다. 낙랑만이 한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13년 마지막 남아 있던 낙랑도 고구려가 이를 멸하고 제 부족(제(諸部族)을 통일했다. 이는 예맥이 한(漢)을 제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한(漢)은 예맥을 도모치 못했다. 또한 예맥은 탈취한 3군(郡)에 후(候), 읍(邑), 군(君)이라는 3부족이 통합해 통치했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이를 분열 시키려고 많은 재물(財物)로서 군(君)이라는 부족인 남려(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 한 것도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예맥을 저항치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위만(衛滿)은 한(漢)나라도 어찌 할 수 없는 강대한 예맥의 보호 하에 겨우 생명을 보존 했다. 이러한 위만(衛滿)을 기점(起點)으로 한국사를 엮어 놓은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은 식민사관을 탈피치 못한 구태(舊態)일 뿐이다.
당시 빈손으로 망명한 위만(衛滿)이 유명무실한 기자조선을 계승했다는 것도 허위요, 겨우 생명을 보존한 망명객 위만이 세운 정권은 한 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미약한 존재로서 당시 대륙을 호령하던 강대한 예맥을 정복운운은 가소로운 일이다.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인(漢人)집단의 지배 받은 적 없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나 한사군(漢四郡)등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중국, 일본이 조작 왜곡한 역사들은 하나같이 잘못 된 것이다.
한심한 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4군을 설치했다는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해 지금도 우리역사교과서에 실고 가르치는 것은 한심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한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에 명기(明記)돼 있다. 즉 삼국지(三國志)에‘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 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이라 했다. (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사군을 설치하니 우리 한민족과 중국한족이 분리됐다고 한 것이다. 중국 한족은 사군에 예속돼 한무제의 지배를 받았으나 위만조선에 거류하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이들과 달리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이는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한민족을 정복하고 지배치 못한 것을 중국역사에서 입증하는 것이다. 당시 예맥은 중국 기록과는 달리 한(漢)나라를 크게 정벌한 기록들이 중국사서에도 있을 정도로 한(漢)의 지배를 받을 나라가 아니었다. (前漢書 七十八, 蕭望傳 第四十八).
이것은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한민족을 정복하거나 지배치 못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부여(夫餘)도 한(漢)을 정벌한 나라였다. 역사가 전도(顚倒)돼 있다.
정인보(鄭寅普)선생은‘한사군(漢四郡)은 중국인들이 몇 백 년 후에 꾸민 허구(虛構)이고, 한반도 내 한사군은 일본인들이 조작에 불과한 것’임을 증명하는데 주력 했다.
최태영(崔泰永)선생도 중국이 한사군(漢四郡)을 포기한 사실로 보아서 정인보선생의 주장은 확실하게 밝힌 것을 의심치 않았다. 중국은 왜 한사군(漢四郡)을 포기했는가! 이 사실을 보아서도 한나라가 예맥조선에 밀린 결과로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한고조(漢高祖)와 위만도 예맥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예맥조선은 국력이 막강해 위만(滿衛)의 상전인 한고조(漢高祖)를 지원하고 위만을 책동해 한고조를 배반케 했다. 한고조(漢高祖) 역시 예맥의 도움을 받았다.
예맥은 한고조(漢高祖) 4년에 용감한 기병(騎兵)을 보내어 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했다. (漢書 卷之一, 高帝紀 第一 上). 이는 예맥이 한고조(漢高祖)의 국력보다 더 강대한 것을 사리키는 것이다. 당시 예맥의 국력은 한(漢)보다 우위(優位)에 있었다.
예맥의 국력이 한고조(漢高祖)보다 약했다면 군사적으로 한고조를 후원 할 수 없다. 예맥은 기자조선보다도 먼저 건국(建國)되고 극히 강대했던 고대 우리선조의 나라였다.
한심한 것은 중국과 일본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이 40여대(餘代) 계승했다고 말하나 40여대 동안 많은 군주(君主)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된 자가 한명도 없고. 또한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기자조선이 허구(虛構)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허구의 기자조선 역사를 마치 있었던 것인 양, 일본은‘각국별 세계사의 정리(各國別[世界史の整理]’에 우리역사를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漢)의 지배를 받았고, 고구려, 삼국시대. 신라, 고려, 이씨조선, 일본의 지배, 대한민국으로 위조했다.
상고시대와 환국, 배달국과 고대 고조선(단군조선), 숙신(肅愼), 예맥, 부여, 발해, 가야 등 우리역사를 송두리 체 왜곡해 우리의 상고역사와 고대 역사를 배제시키고 마치 이 허구의 역사로 꾸며 놓았다.(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207~211面).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보잘 것 없는 겨우 부족의 명맥을 유지한 미약한 존재요 한사군중 3군을 예맥에게 빼앗긴 것을 보면 역시 미약한 존재이다.
위만조선은 한 개의 망명정권(亡命政權)으로서 명맥을 이어온 유명무실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위만조선도 역사적 기록이 없음도 기자조선과 같다.
이와 같이 예맥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지배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당시 상황으로 봐도 반드시 예맥조선에 예속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燕)나라 왕으로 임명 된 노관(盧綰)의 부하했던 위만은 일개의 사기꾼으로 안으로 한고조(漢高祖)의 불신을 받고 오직 예맥을 배경으로 반란을 시도하다가 패망했다.
당시 대륙을 호령하던 예맥은 중국의 어느 나라도 엿볼 수 없었다. 한서(漢書)에 보면 예맥은 용감한 기병을 보내어 한을 도와 줄 정도로 예맥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한고조(漢高祖)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4군을 설치했다고 하나 우리 한민족은 한족(漢族)과 분리돼 한족(漢族)은 4군에 예속됐지만 위만조선에 거류하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중국 한족과 분리돼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당시에 강대한 예맥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고찰하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인 집단(漢人集團)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영토를 엿볼 생각도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족(漢族)집단의 중국이 역사조작을 위해서 강력한 예맥을 역사에서 지우려 시도하나 중원(中原)을 호령하던 예맥을 지울 수 없다.
예맥은 동주(東周)시대~한 무제시대까지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했다.
중국한족은 중국을 내세우기 위해 예맥이 자기들을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의 흔적을 지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예맥에 대한 기록을 거의 지웠다.
그러나 남아 있는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도 예맥은 찾을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과 논어(論語), 준남자(准南子), 고려도경(高麗圖經), 사기(史記) 등에서도 기록이 있다. 우리도 연구가 미흡해 소홀히 다루어 왔다. 이는 우리도 크게 반성 할 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맥조선은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 까지 1000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을 우리가 바로 정립해 복원시켜야 한다. 이러한 역사를 모르고서는 식민사관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고대 우리 한민족은 중국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출처] 중국사·일본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4|작성자 byunsdd8972
'■ 역사 > 중국사(中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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