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동강집 서(桐江集 序)

야촌(1) 2022. 1. 26. 18:40

동강(桐江) 이송제(李松齊) 선생의《동강집(桐江集)》의 서문(序文)은 통정돈녕부도정(通政敦寧府都正)을 역임한 허온(許蘊) 선생이 撰하고 書한 <동강집(桐江集)>의 序文으로 몽적분약(蒙赤奮若,乙丑. 1925年)에 쓴 것입니다.

 

동강 이송제 선생의 묘는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방죽굴 월재공 묘소위에 모셔져 있는 학생공의 현손으로 문집으로 桐江集이 있습니다. 생전에 전각 글씨를 잘 쓰셨으며 김수항의 문집에도 " 낭주 이송제가 찾아오다" 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영암 망호리 마을에 들렸을떄, 서당에 계셨던 방 선조이신 낭주 이송제에게 동강일사 부한구정 이란 여덟글자를 병풍에 써 주셨다는 이야기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강집 서(桐江集 序)

 

   허온(許蘊)  찬(撰)

 

낭주(朗州)는 영암(靈巖)의 옛 이름이며 뛰어난(이름있는) 선비들이 많은 고장이었다.

동강(桐江) 이송제(李松齊)또한 그러한 분이시다. 공은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덕(德)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적에는 율정(栗亭=강정)마을 김진사께 수업을 하였고 글귀를 읽으면 다른 아이들보다 글의 뜻을 빨리 파악을 하였고 10여세 때에는 여러 과목을 들으면 두루두루 외워 김진사께서는 매우 뛰어난 아이라며 칭찬을 하였다.

 

20여세 때에는 문곡 김수항 선생이 영암으로 귀향을 오게 되자 찾아 뵙고 옛 선인들의 위기지학(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배워 세상의 부귀영화등을 찾지않고 세상것에서 벗어나 문과 과목인 사서육경을 배워 나날이 학문은 발전하였고 문곡 김수항 선생은 공의 실력을 아시고 높은 선비들의 제문을 지으면 반드시 공께 전서체로 글을 쓰라고 부탁하였고 공은 정성을 다해 붓으로 세밀하게 옮겨 썼으며 이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공은 늘상 본이이 쓴 전서체 글씨를 좋은 비단에 첩으로 만들어 다니며 자랑을 하였고 문곡선생이 보시고 글씨첩 뒤면에 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문곡의 아들 몽와 김창집과 소제 이이명 녹천 이사명 약천 남구만등 제상들과 서로 글과 시를 주고 받으며 이분들이 누명을 쓰고 귀향가게 됨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공은 지었던 글을 차곡차곡 모아 훗날 쇠하여 사리지고 성하여 자라고 하는 것을 구별할수 있었다.

 

당시 귀인들은 서로 사귀기를 기약하였고 정이 깊이들어 떨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의기를 떨쳐 일어날 수 있게 하였지만 나라가 안정되지 않는 상황이라 소과만 치르고 더 이상 과거를 보지않아 크게 쓰임받지 못하고 종신토록 은둔하며 학문만 하고 생을 마쳤으니 아쉽기만 하다.

 

세상 이치를 이해하며 평생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학문을 즐겼으며 시짓기를 하면 공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쌩께서 갑자기 동강초당 낚시터를 방문하여 “ 동강일사 부한구정 ” 8자를 써주며 너는 벼슬길에 나간다면 진흙탕길에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하시며 억울해 하셨다. 

 

또한 나를 거울삼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거나 미움을 받거나 하는일은 없을것이며 “공자의 제자 자익은 모습이 추하다고 재주가 없을 것이다 밀 짐작을 한후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오늘날 어떤 생각이 옳다고 딱 단정짓는 것은 조정에서 결정한 것이기에 더욱더 억울하다고 하셨다.

 

공이 남겨놓은 글과시는 상사속에 있는데 속히 판각을 한다며 나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한다. 나는 공과는 태어난 시기가 다르며 수백년 뒤에 태어난 사람으로 공의 이력을 자세히 알수가 없기에 상상만으로 서문을 지을수가 없다고 사양을 하며 사실과 다르게 서문을 짓는다면 누가 수긍을 하겠느냐며  훗날 뜻있는 후손이 나타날 것이다 라며 거듭사양을 하였으나 사양치 못하고 살펴보니 옛날에 동강공의 증손 재억이 여러 가지를 한데 묶어놓은 자료와 흩어지고 없어지고 남아있는 시1권, 글2권과 약간권의 자료만 오늘날에 남아 있다며 아쉬워 하였다.

 

공께서 후손에게 남겨 놓으신 좋은 말씀과 논리 정연한 글들은 다 전해드릴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며 이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감화되는 일이 없다면은 이는 다 후손들의 불행이며 어찌 동강공의 책임이겠는가? 그러한즉 봉황의 한쪽 날개만 보더라도 봉황의 아름다움을 알수가 있기에 남아있는 원고가 많다고 하여 문집이 귀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집을 마땅히 서둘러 간행해야 될 것이다.

 

1925년 가을 달밤에

하양(양천허온 씀

 

국역>영암 망호리 이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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