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선생에 대하여

야촌(1) 2021. 11. 12. 15:48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선생에 대하여

 

외 후손 인동 장달수

 

총론

 

생졸년 : 1568년(선조 1)∼1636년(인조 14) /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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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무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將)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한 무장. 행직(行職)은 참판(參判)·수사(水使), 증직(贈職)은 병조판서이다.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경상도 경주 견곡촌(見谷村) 출생이다. 아버지는 병조참판에 증직된 최신보(崔臣輔)이고, 어머니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정언(正言) 황정(黃汀)의 손녀다. 청백리(淸白吏)에 선임되었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와 친구 사이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진립의 나이 25세였는데, 왜적이 경주로 쳐들어오자, 경주지방의 의병장이 되어, 친척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김호(金虎)와 함께 경주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그때 언양(彦陽) 지방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구들을 밤중에 기습하여 무찌르니 왜적의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또 계연(鷄淵)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김호(金虎)가 적의 탄환을 맞고 죽자, 최진립이 의병을 이끌고 몰래 왜적의 뒤로 돌아가서 공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최진립이 언양 지방의 요해처를 점령하고 왜적을 방어하였으므로, 왜적의 기세가 위축되어, 경주 지방과 그 부근 고을이 무사하였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5 「공조참판 정무 최공진립 묘갈명(工曹參判貞武崔公震立墓碣銘)」참고. 이하 「묘갈명」이라 약칭.) 경주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이 그 공로를 포상하니, 그는 그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었다. 윤인함이 격려하여,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적장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에 보루(堡壘)를 쌓고 주둔하면서 왜군을 풀어 사방으로 약탈하니, 주위 10여 고을이 모두 그 피해를 입었다.

 

그때 그는 경주부윤의 격문(檄文)을 받고, 결사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비산(萆山)에서 동굴 안에 병사를 숨기고 적을 유인하여 왜적과 싸워서 왜적을 격멸하였다.

 

그때 그는 배꼽 밑에 적의 탄환을 맞았으나, 평소처럼 끝까지 싸웠다. 그해 겨울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명(明)나라 경략(經略) 양호(楊鎬)와 함께 큰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서산포의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최진립도 싸움에 참여하여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그때 최진립은 경주부윤 박의장(朴毅長)의 휘하에 속하였는데, 부윤 박의장은 최진립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최진립을 참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경략 양호(楊鎬)가 그를 구원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분개하여, “내가 허물없이 꺼리는 자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과 싸우다가 죽겠다.”하고, 홀로 적진(賊陣)으로 돌진하다가 탄환을 맞았는데, 오른쪽 볼에서 관통하여 왼쪽 턱뼈에 박힌 탄환을 빼냈다.(「묘갈명」 참고.)

 

1598년(선조 31) 왜란에서 공을 세운사람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정할 때 최진립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고, 훈련원(訓鍊院) 정(正)에 임명되었다.

 

1600년(선조 33)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는데, 그때 선조가 어사(御史)를 경상도에 보내 왜란 때, 경주와 울산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전황을 조사하도록 하고, 특별히 최진립을 불러서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그때 최진립은 머뭇거리고 사양하다가 당시의 긴요한 사무를 아뢰니, 선조가 가상하게 여겨 활과 화살을 내려주고, 벼슬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게 되었다가, 곧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1608년(선조 41) 마량 첨사(馬梁僉使)에 임명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군사와 병기(兵器)를 정비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1년(광해군 3) 경상좌도 우후(虞候)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우후로서 부산 별장(釜山別將)을 겸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명나라 지휘사(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이 나와서 일본의 정세를 염탐하려고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부산진에서 그가 군량미를 준비하고 병기를 수리 정돈한 것을 보고, 서울에 돌아와서 끝없이 최진립을 칭찬하였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서 최진립을 품계에 관계없이 중직에 발탁하였다.(「묘갈명」 참고.)

 

1614년(광해군 6)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임명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함경도 경원은 변경이므로, 풍토가 다르고, 또 백성들도 토착 여진족과 뒤섞여 살고 있어서 사납고 양순하기가 고르지 않았으나, 부사 최진립의 조정(調整)에 힘입어 백성들이 복종하고 여진족도 순치되어 변경이 안정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오도리족의 대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는 한편, 조선의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침략하였다.

 

그해 4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오랑캐 적병이 이미 준동하는 형세이니, 양강 연안 일대를 방어할 계책을 급히 서둘러 마련해야 합니다. 강역(疆域)이 환란을 당할 걱정이 지금 이때보다 더 급한 적이 없으니, 장수로서 적합한 자인 최진립과 김준계(金遵階)·이인경(李寅卿)·원사립(元士立) 등 뛰어난 무사들을 서울에 집결시켜서, 비변사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1620년(광해군 12)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평양(平壤) 감영에 있으면서 최진립을 그 별장으로 삼아서 평안도 지방의 군무(軍務)를 맡겼다.

 

다음해 1621년(광해군 13) 비변사에서 최진립을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로 임명하자, 이시발이 건의하기를, “첨사는 사람마다 할 수 있으나, 지금 이곳의 별장은 최진립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하고, 그를 유임시킨 다음에, 최진립에게 용맹한 무사(武士) 2백 명을 거느리고 양책(良策)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 명나라 요동이 후금에게 함락되자, 명나라 요동 지방의 군민(軍民)들이 흩어져서 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들이 많았다. 명나라 파락호(破落戶 : 도망한 군호) 모문룡(毛文龍)이 평안도 가도(椵島)에 피난 온 중국인들을 강점하여 스스로 도독(都督)이 되었는데, 조선에 군량미를 요구하고,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하루는 후금의 오랑캐 병사가 중국인을 뒤쫓아서 양책에까지 추격하였는데, 최진립이 비장(裨將)들과 다짐하기를, “저놈들이 만일 우리 목책(木柵)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하고, 싸울 준비를 하였으나, 후금의 오랑캐 군사들은 중국인만을 골라서 죽이고 돌아갔다.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 이형원(李馨遠)이 그가 중국인을 구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최진립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가 사실대로 답변하였으나, 울산에 유배되었다.

 

그때 찬획사 이시발이 그가 체포되어 서울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기를, “최진립의 주머니는 항상 씻은 듯이 깨끗하게 비어 있는데, 그는 옥중에서 틀림없이 굶어죽을 것이다.” 하고 감영에 비축된 포전(布錢)을 보내니, 최진립이 사양하기를, “저의 허물이 큰데, 어찌 공가(公家)의 비축을 축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묘갈명」 참고.)

 

1622년(광해군 14) 4월 의금부(義禁府)에서 속전(贖錢)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명나라의 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는데, 정배(定配)된 최진립과 이경인(李景仁)이 속전을 내고 유배지에서 풀려났다.(『광해군일기』 참고.)

 

인조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곧 최진립은 가덕 첨사(加德僉使)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624년(인조 2)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옮겼는데, 이때 인조가 경연(經筵)에서 북변(北邊)의 방어를 걱정하니, 좌상과 우상이 번갈아 대답하기를, “경흥 부사 최진립은 나이 거의 60세이지만, 직무에 충실하고 있으며, 일찍이 절조(節操)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하자, 인조가 말하기를, “최진립이 변장(邊將)이 되었을 때의 일을 나도 들었다.” 하였다.(「묘갈명」 참고.)

 

1626년(인조 4) 12월 경흥 부사에 유임되었고, 1628년(인조 6) 11월 함경도관찰사의 서장(書狀)에서 경흥 부사 최진립의 몸가짐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니, 인조가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참고)

 

1629년(인조 7) 윤4월 함경도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서장에서, “경흥 부사 최진립이 군정(軍政)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하니, 인조가 전교하기를, “최진립을 가자(加資)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 참고.)

 

1630년(인조 8) 4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에 임명되었고, 9월 공조 참판에 발탁되었는데, 최진립은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1630년(인조 8) 12월 특지(特旨)로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임명하였다.(『승정원일기』 참고.)

 

1631년(인조 9) 1월 인조가 인견(引見)하고 효유하기를, “경기 수사에 경(卿)이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하였으나 최진립이 또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631년(인조 9) 4월 사간원에서 탄핵하기를, “예전부터 무신이 장수의 임무를 받으면 아무리 병고(病故)가 있더라도 감히 자신의 사정을 거론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런데 경기 수사 최진립은 병을 이유로 하여 잇따라 상소하여 해직을 간청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인조가 추고(推考)하라고 대답하였다.(『인조실록』 참고.)

 

그러나 그가 경기 수사의 임기를 마치자, 교동(喬桐)의 백성들이 서울로 달려와서 그를 유임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으므로, 인조는 경기 수사 최진립이 3도(道) 통어사(統禦使)를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최진립이 또 글을 올려 사양하니, 인조가 또 하교하기를, “나는 재물을 탐하는 사람을 임용하지 않고 청렴 성근한 사람만을 임용한다.” 하였다.(「묘갈명」 참고.)

 

1633년(인조 11) 6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용양위(龍驤衛)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참고.) 그해 10월 덕원 부사(德源府使)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 12) 다시 전라 수사에 임명되었는데, 인조가 또 인견하고 위로해 보냈다. 상신 김유(金瑬)가 전라도 체찰사(全羅道體察使)가 되어 최진립을 별장으로 삼았다. 그 뒤에 그는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 옮겼다.

 

1636년(인조 14)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아지가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12월 청나라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최진립은 공주 영장으로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묘갈명」 참고.)

 

그가 공주 영장이 된 지 두어 달 만에 청나라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서울을 함락하고, 인조가 급히 피난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 4, 50일 동안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그때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북상하면서, 나이가 많은 최진립을 대신하여 황박(黃珀)에게 좌영장(左營將)을 맡기니, 최진립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늙어서 전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늙은 사람이라고 한번 죽어서 나라에 보답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 종군하니, 좌우에서 감동하였다. 충청도의 근왕병이 북상하다가, 남한산성이 마주 보이는 용인의 험천에 이르러 밤중에 청나라 기병들의 전격적인 기습을 받고 참담하게 패전하였다.

 

늙은 최진립은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따르는 아전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어라.” 하였다.

 

싸움이 끝난 후에 여러 아들이 아전을 데리고 그 표시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찾았는데, 최진립은 온 몸에 화살을 맞아서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그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9 참고.)

저서로는 『정무공 기실(貞武公紀實)』 2권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최진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묘갈명」 참고.) 그는 백옥(白玉) 같은 지조로써 염치와 결백(潔白)을 지켰고, 철석(鐵石)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물리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진립의 나이 25세였는데, 왜적이 경주로 쳐들어오자 경주부윤 윤인함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왜적들이 영남 지방의 여러 고을을 잠식(蠶食)하고, 지금 우리 고을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경주 남촌(南村)으로 가면 곧 언양으로 도달하는 길입니다. 길 왼쪽에 저의 선인(先人)의 집이 있는데, 왜적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마을의 힘센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하니, 부윤 윤인함이 장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다. 마침내 최진립은 많은 화구(火具)를 준비하여 가지고, 곧바로 왜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밤을 틈타서 기습하여 왜적을 무찌르니 왜적의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왜적의 병갑(兵甲)과 기계(器械)를 모두 거두어 가지고 경주로 돌아오니, 부윤 윤인함이 탄복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고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최진립의 지휘에 따라 왜적을 무찌르기를 자원하니, 그 무리가 거의 수천 명이었다. 이리하여 최진립은 경주 지방의 의병장이 되어, 친척 동생 최계종과 김호와 함께 경주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 태종이 직접 기병(騎兵) 10만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서 조선의 정병(精兵)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적에게 막혀서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그때 사방에서 근왕병이 일어났으나, 대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는 적은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최진립은 자진하여 종군하여 대열의 앞에서 걸어서 용인의 험천에 도착하였다. 험천은 인조의 남한산성과 거리가 30리 쯤 되었는데, 청나라 기병과 맞닥뜨렸다. 

 

충청도 근왕병은 좌군·우군으로 나누어 적을 기다렸는데, 최진립은 대열의 맨앞에 있고 관찰사는 그 뒤에 있었다. 청나라 기병이 밤을 틈타서 그 후군(後軍)과 합세하여 충청도 근왕병을 습격하였다.

 

근왕병의 선봉(先鋒)이 먼저 무너지자, 모두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는데, 청나라 철기(鐵騎)의 기세는 비바람과 같이 몰아쳤다. 우리 군중(軍中)에는 사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최진립은 혼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아대니, 적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최진립은 화살이 다하자, 따르는 아전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굳이 나를 따라 죽을 것은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겠다. 너희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물러가자, 그의 여러 아들과 그를 따르던 아전이 그가 싸우던 그곳에서 그의 시신을 찾았다. 온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었고 화살이 고슴도치 침처럼 박혔으나, 얼굴은 마치 산사람과 같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인조는 한참 동안 애석하게 여기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또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치러주게 하였다.

 

1614년(광해군 6) 경원부사에 임명되어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도중에 경성(鏡城)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경성 판관(判官)으로 있던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문사(文士)로서 본래 친한 친구 사이였으므로 최진립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를 며칠 묵게 하고, 일부러 이름 있는 기생(妓生)을 불러서 최진립을 술자리에 모시게 하고 수일 동안 유혹하게 하였었으나, 최진립은 끝내 그 기생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이윤우가 감탄하기를, “오늘 비로소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남자를 보겠다. 송나라 악비(岳飛)가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북병사(北兵使) 김경서(金景瑞)가 최진립의 외투가 다해진 것을 보고 담비가죽으로 새로 한 벌 만들어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무(貞武)다. 묘소는 경상도 언양현(彦陽縣) 오지연(烏池淵)의 산등성이에 있는데,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5 「공조참판 정무 최공진립 묘갈명(工曹參判貞武崔公震立墓碣銘)」) 1637년(인조 15)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650년(효종 1)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줄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과 숭렬사(崇烈祠)에 제향되었고, 함경도 경원(慶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그의 편비(褊裨) 김우적(金禹績) 등이 최진립을 추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상소를 올려서 시호를 청하면서 하소연한 글 가운데, “그는 평생 결백한 행실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으며, 난(亂)을 당하여 의(義)를 위하여 죽을 때 자신의 목숨을 기러기 털처럼 가볍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은 단지 그 사람이 의를 행하고 공을 수립한 것만 볼 뿐입니다? 어찌 그 사람의 문벌과 직위의 높고 낮음과 문관이고 무관인 것을 따지겠습니까? 

 

최진립이 수립한 것으로 보면 비록 시호를 추증하고 청백리에 선발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무관 출신이라고 하여 증직(贈職)하고 정문(旌門)하였으나, 시호는 내리지 않았다.(『잠곡유고(潛谷遺稿)』권8 참고)

 

그 뒤 1650년(효종 1)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추진할 적에, 최진립의 옛 비장(裨將) 김우적 등이 다시 상소하기를, “절의에 죽은 신하와 청백(淸白)의 관리는 선왕조(先王朝)에서 시호를 내리고 그 공훈을 추록(追錄)하였습니다.

 

신들의 옛 장수 최진립이야 말로 족히 이에 견줄 수 있습니다.” 하니, 효종이 그에 대한 논의를 의정부에 묻자, 모두 그 주장이 옳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정무(貞武)’라고 의논하여 정하고, 이조에서 청백리에 녹선하였다.(「묘갈명」 참고.)

 

부인은 서산유씨(瑞山柳氏)인데, 자녀는 5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최동윤(崔東尹)은 승사랑(承仕郞)이고, 차남 최동열(崔東說)은 통덕랑(通德郞)이고, 3남 최동량(崔東亮)은 현감이고, 4남 최동길(崔東吉)은 승사랑이고, 막내 최동경(崔東璟)은 승의랑(承議郞)이며, 외동딸은 사인(士人) 윤종향(尹宗享)에게 시집갔다.(「묘갈명」 참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