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世 이종성(李宗城)
[생졸년] 1692년(숙종 18)∼1759년(영조 35).
[문과] 영조(英祖) 3년 (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6위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37년 (17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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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영조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고(子固), 호(號)는 오천(梧川).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侍讀官-正五品)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그해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堂下官)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그뒤 부수찬(副修撰-從六品)· 헌납(獻納-正五品)· 수찬(修撰-正六品). 교리(校理-正·從五品)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嶺南御史)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應敎-正四品)가 되었다.
1731년 관서어사(關西御史-한반도 북서부지역)로 파견되어 양덕현감(陽德縣監-從六品)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价川郡守-從四品)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孟山縣監-從六品)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黃州牧使-正三品) 이성제(李誠躋)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承旨-正三品)· 대사간(大司諫-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를 거쳐 대사성(大司成-正三品)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正三品)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가 되어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從二品)·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從二品)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1741년 부사직(副司直-從五品), 1742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從二品)를 거쳐 1744년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 형조판서(刑曹判書-正二品)· 대사헌(大司憲-從二品)·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正二品), 1749년 지돈령(知敦寧)· 우빈객(右賓客-正二品)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左議政-正一品)에 이어 영의정(領議政-正一品)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領議政-正一品)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從一品),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가 되었다.
이때 인원대비(仁元大妃: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하여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正一品)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 :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承政院日記 ◇金石錄 ◇恩坡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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