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진암 이병헌 초상(眞菴 李炳憲肖像)

야촌(1) 2021. 8. 2. 13:44

▲진암 이병헌 초상화(眞菴 李炳憲肖像畵)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은 합천 이씨 집성촌으로 마을 안쪽에는 배산서당(培山書堂)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서당 입구에 ‘복원유교지본산(復原儒敎之本山)’이라 새겨진 글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우리나라 유교 복원의 본산이란 뜻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우리 전통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역시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뜻있는 선비들은 유교의 명맥을 유지하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교 부흥을 위해 체계적으로 앞장선 인물이 바로 진암 이병헌이며, 진암의 유교 부흥 근거지가 바로 산청 배양마을 배산서당이다. 

배산서당의 창건 주역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은 유학의 현대적 개혁론을 주장한 한말 ‘공교운동(孔敎運動)’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유학자로 당시 지역 유림들로부터는 '이단(異端)'이라고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던 독특한 인물이다.
 
진암은 합천 이씨로 1870년(고종 7년) 12월 18일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에서 태어났다. 
남명선생의 벗인 청향당 이원의 13세손으로 선대는 단성에 살았는데, 10세조 이전(李銓)이 단성에서 함양으로 이주하여 함양에 터를 잡은 것이다. 

진암은 전통 유학을 가학으로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는 등 일반 선비로서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래서 20세 때까지 고향에서 과거공부를 하는 등 입신양명에 뜻을 두었으며, 21세 이후로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서울을 자주 왕래했다.

25세 때 당시 안동 춘양의 학산(鶴山)에 은거하고 있던 면우 곽종석을 몇몇 벗들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진암이 면우를 찾아간 것은 그의 처신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자 해서였는데, 이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2년 뒤인 1896년 ‘한주집’ 교정을 위해 거창 원천리에 머물고 있던 면우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이때 진암의 나이 27세였다. 진암은 면우 문하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한주학파’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학에 대한 깊이를 더할 수 있다. 34세 때인 1903년 서울에 올라가 시국의 변화에 접하며, 강유위(康有爲)의 변법(變法)과 세계정세에 관한 서적을 읽고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서울로 올라온 진암은 남산에서 전차가 다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며 대응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 청나라에서 일어난 무술정변(戊戌政變)과 강유위의 변법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진암은 강유위의 사상에 경도되며 공자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를 체계화하는데 일생을 바치게 된다.
이로부터 진암은 공자교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고향에서는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41세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고향인 함양 송평리에서 학교를 설립해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당시 우리 민족의 시급한 과제는 교육에 있다 판단해 송호서당에 의숙(義塾)을 세워 마을의 아동들을 모아 놓고 교육에 전념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수비대가 강제로 의숙에 들어와 구타를 하고 삭발을 하는 등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진암은 고향에서 계몽 활동이 여의치 않자 곧 서울로 올라가 박은식을 만나 지방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만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진암은 45세 때,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공교회(孔敎會)를 참관하고 홍콩에서 강유위를 처음 만났다.

진암을 처음 만난 강유위는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유교의 종교화를 통해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진암은 강유위의 권유에 따라 유교의 사상적 재정립을 목표로 하는 ‘유교 복원론’의 제시와 함께 한편으로는 종교화를 지향하는 공교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진암이 강유위의 권유에 따라 실질적인 공교운동을 전개한 것은, 54세 때인 1923년 단성 배양에 배산서당에 공자상을 봉안하며 부터였다 할 수 있다. 당시 진암은 유교 복원을 위하여 배산서당에 문묘와 도동사, 강당을 짓고 중국 곡부의 연성공부(衍聖公府)와 협의하여 그곳에서 공자의 진영을 모셔와 문묘에 봉안하였고, 도동사에는 청향당 이원,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죽각 이광우를 배양했다.

진암의 이러한 노력들은 당시 유림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게 된다. 1923년 9월 19일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상을 봉안하던 날. 당시 도내 유림들은 주자(朱子)가 빠진 문묘를 건립한 것과 자신의 선조인 청향당과 죽각을 도동사에 배향한 것 등을 이유로 성토를 당하기도 했다.
 
진암은 공자교 사상의 경학적 기초를 정비하는 데도 진력했다. 유교사상과 자주적인 민족사를 결합시켜 ‘역사교리착종담( 歷史敎理錯綜談)’과 ‘오족당봉유교론(吾族當奉儒敎論)’등을 저술한 것을 비롯해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을 지어 공자교 사상의 체계화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역사교리착종담'에서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방문화가 7000년이나 되어 중국의 유교 문화도 여기서 나왔다 하는 등 우리의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고취시켰다. ‘유교복원론’에서는 오직 공자만을 유교의 교주로 받들어야 한다며 우리나라 유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진암은 이후 전통 보수 유림들과 논쟁을 계속하였으며, 우리나라 근대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송학(宋學)은 중국에 아첨하고 외국을 배척하는 등 일대 혁신을 해야만 유교의 원상을 회복할 수 있다 주장했다. 1940년 진암은 71세 노구로 병고에 시달렸다. 장남인 재교(在敎)에게 "다른 종교는 모두 미신적 신비 종교고 유교만이 비 미신 종교이니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반드시 이를 전파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지금 배산서당에 올라가 편액들을 둘러보면, 낯익은 인물들의 글들을 볼 수 있다. 강당 현판은 중국의 유명한 학자 강유위(康有爲)의 친필이다. 기문 역시 강유위가 지었고, 배산서당이 낙성될 때, 김구, 이시영(李始榮), 조완구가 쓴 축사와 박은식의 연기설(緣起說)이 걸려 있다.

아마 우리나라 서원 서당 중 이처럼 독립투사의 글이 많이 걸려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진암은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어 최초의 민립문묘(民立文廟)를 세웠다. 중국 곡부(曲阜)의 공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은 한국공교회지부를 설치하고 공교운동의 본산으로 삼고자 하였다.

진암의 공교운동은 당시 조선사회의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거센 항의에 부닥쳐 실패하고 말았다. 진암은 국가적 권위로부터 독립된 유교의 종교적 교단을 수립하고 조직화하기를 추구했던 유교 개혁 사상가로서 한국유교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글>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