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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 모습(일제시대)

야촌(1) 2021. 8. 4. 16:13

작성일 : 2010. 03. 10(수)

 

 

↑이 건물은 현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으로 1934년에 준공 되었다.지하 1층, 지상4층 연

  평 3,000여 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서울) 종로2가 거리 모습

 

↑조선은행(오늘날 한국은행 자리) 앞 광장 

 

↑경성 태평통(太平通) 

 

↑경복궁 집옥제(集玉薺)

 

↑경성역(京城驛/서울역)에서 남대문방향 전경

 

↑경성(서울)의 시가지 일부 모습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시가 일부 전경

 

↑일제(日帝)가 경성동양척식주식회사(京城東洋拓殖株式會社)를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설립한 식민지경제수탈의 본거지(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 8천 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최대의 지주가 

었다. 동척(東拓)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방법도 악랄하

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동척(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동대문 밖 조선인 마을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남산공원 야외음악당

 

↑종로 보신각

 

↑경성의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당시 北門(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경성의 동대문(東大門)

 

↑요리집 명월관(明月館) 전경

 

기생 요리집 명월관(明月館)이 1918년경에 소실된 뒤 순화관(현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했다. 이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본관 간판은 장춘관으로 옮겨졌지만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경영했기 때문에 명월관에 모였던 명기들이 대로 모여 전처럼 번창했다.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불려나와 우미관양악대와 단성사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1930년대 광교 부근 청계천변 유료 빨래터. 빨래하는 아낙 뒤편 석축은 영조(英祖)때인

  1773년에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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