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조말생 묘비명(趙末生墓碑銘)

야촌(1) 2021. 5. 21. 00:15

■조말생 묘비명(趙末生墓碑銘)

   [생졸년] 1370년(공민왕 19) ~ 1447년(세종 29)/壽77歲

 

영중추문강조공묘비명(領中樞文岡趙公墓碑銘)


유명조선국 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 보문각 대제학 증시문강 조공 묘비문

(有明朝鮮國 崇祿大夫 領中樞院事 兼 兵曹判書 寶文閣 大提學 贈諡文剛 趙公 墓碑文)

 

우리 10대조 문강공(文剛公) 부군(府君)의 휘는 말생(末生)이며, 자는 평중(平仲)이다.

대개 공은 우리 태종과 세종조에 세상 다스리는 일을 도와 세상을 융성하고 편안하게 하였으며, 덕업과 문장이 한 세대의 으뜸으로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신이라 일컬었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사적이 남아 있는 것이 적으니, 슬프도다.

 

무릇 세상에 전하기로는 옛날에 아름다운 돌에 새긴 비문이 있어 자 뭇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었으나, 집안의 재앙으로 그 비석을 묻어버려 드디어는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나라의 고실(故實)을 살펴보니, 1411년(태종 11) 공이 시강할 때에, 맹자께서 이르기를, "이러한 임금을 섬기면 용렬한 자가 된다."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께서 그 뜻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선을 펴고 간사한 것을 막아 그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것이 직무입니다.

 

만일 한 결 같이 임금을 따른 것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임금의 잘못을 보고도 말하지 못하니, 이는 아첨하고 따르는 것으로써 용납되기를 바라고, 영합하고 따르는 것으로써 환심을 사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수긍하고 그러하다고 여겼다.

태종 16년 재상 하륜이 치사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임금께서 공에게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이 70세에 벼슬을 그만두는 것은 옛날의 좋은 법입니다.

 

무릇 그 나이가 되어 떠나기를 청하면 들어주고 물을 일이 있으면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그 말을 따랐다. 그 때에 강무를 대부분 멀리 나가서 했는데, 공이 그 폐단을 극진하게 말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경기지방에서 행할 것을 명하셨다.

 

가을에 임금께서 광연루(廣延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특별히 공을 불러 홍범(洪範)과 음양의 이치를 강론하도록 하였다. 세종 원년 왜가 변경지방을 침탈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상왕과 왕이 조정의 신하들을 불러 놓고 허점을 노려 대마도를 토벌할 것을 논의하자,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직 공만이 그 결정에 찬동하여 드디어 장군 이종무(李從茂)를 보내어(1419년 세종 원년) 곧바로 왜구의 소굴을 공격하였다. 또한 임금의 명을 받들고 글을 보내어 대마도 추장을 화복으로 달래니 적들이 모두 철수하여 되돌아가 순종의 뜻을 보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서도 공이 좋은 일을 건의하고 잘못된 것을 간하는 것과 큰 계책이 얼마나 성했는지를 잘 볼 수 있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기록에는, 공이 무오년(戊午年,1438년.세종 20)에 명을 받고 3도를 순무(巡撫)하였는데, 다음해에 부인 신씨가 갑자기 돌아가자 임금께서 역마를 달려 부음을 전할 것을 명하였으니, 대체로 남다른 은총이었다.

 

삼가 옛 족보를 살펴보건대, 우리 조씨는 증 판원사(判院事) 잠(岑)에서부터 양주를 본관으로 삼기 시작하였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보승별장(保勝別將) 인필(仁弼)로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서운관정(書雲觀正) 의(誼)로서 판중추원사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양주신씨(楊州申氏)이다.

 

공은 홍무(洪武) 경술년(庚戌年,1370년 공민왕 19)에 태어나 문정공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사년(辛巳年,1401년 태종 1) 증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차정(差定)되었다.

 

계미년(癸未年,1403 태종 3)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헌납(獻納)에 제수되었으며,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정해년(丁亥年,1407년 태종 7)에는 중시에서 제2등으로 급제하였고, 경인년(庚寅年,1410년 태종 10)에는 기주관(記注官)으로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찬수하는 데에 참여하였으며, 집의와 전농시정(典農寺正)을 역임하였다.

 

신묘년(辛卯年,1411년 태종 11)에는 대언(代言)에 발탁되었고, 병신년(丙申年,1416년 태종 16)에는 지신사(知申事)로 승차하였다. 무술년(戊戌年,1418년 태종 18)에는 직급을 뛰어넘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갑자기 주문사로 차정되어 판병조 겸 집현전보문각대제학세자좌빈객(判兵曹兼集賢殿寶文閣大提學世子左賓客)으로 옮겼으며, 후에 보국(輔國)의 품계에 올라 영중추가 되었다.

 

정묘년(丁卯年,1387년 우왕 13) 4월 24일 아버지께서 향년 78세로 돌아가시니, 양주 금촌 묘적산 서쪽 산기슭 부을(負乙)의 언덕에 장례 지냈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평산 신씨로서 검교(檢校) 한성부윤(漢城府尹) 하(夏)의 딸이다.

 

기미년(己未年,1439년 세종 21) 정월 14일에 돌아가니 공의 묘 오른편에 합장하였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아들 선(璿)은 태종의 딸 정정옹주(貞靜翁主)에게 장가들어 한원군(漢原君)을 봉임 받았고, 둘째아들 찬(瓚)은 중군사직(中軍司直)이며, 셋째아들 근(瑾)은 강원감사이다.

 

재실(再室=繼配) 함창김씨(咸昌金氏)는 왕보(王輔)의 딸로서, 묘가 함창지역의 하서(下西)에 있는데, 딸을 낳아 현감 신대홍(辛帶紅)에게 시집을 갔다공은 사촌형인 정평군(靖平君) 계생(啓生)과 전후하여 병조판서를 맡았고, 번갈아가며 문형(文衡)을 관장하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들 형제의 자식과 조카들도 아울러 영달하여 집안이 융성하였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다른 집안은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지만, 오직 공의 후손들만이 더욱 크게 번성하여 과거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이들만도 거의 30명에 달하였다. 도산(塗山)과 유신(有莘)의 처향(妻鄕)을 정하는 것처럼 나라의 영광된 인척이 되는 데에 이른 것은, 어찌 공이 선을 쌓고 덕을 심은 덕택이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공이 지은 시문은 흩어지고 없어져 남은 것이 없고, 다만 5·6편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옛집은 도성의 남쪽 타락동(駝駱洞)인데, 종주가 계승하여 전해주지 못하여 섬돌만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이제 여러 후손들이 공의 사적의 시종(始終)과 대략이나마 장차 시간이 더 흐를수록 더욱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비석을 세워 먼 훗날까지 전할 것을 도모하고, 태동(泰東)에게 부탁하여 기록하게 하니, 삼가 나라의 역사와 집안의 기록을 주워 모아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였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후에 별도로 기록한다.


선이 낳은 영(渶)은 직장이고, 찬은 준(遵)을 두었고, 선(選)은 부사로서 참의에 증직되었고, 근이 낳은 영휘(永輝)는 광흥창수(廣興倉守), 중휘(仲輝)는 참교(參校)를 엮임한 문강공께 손행(孫行)이시다. 수견(壽堅)은 현감으로 참판에 증직되었고, 영견(永堅)은 봉사(奉事)이고, 복견(福堅)이 있다.

 

광세(光世)는 참봉이고, 광유(光裕), 광작(光綽)은 사직이고, 광진(光震)은 진사를 하셨는데 문강공께 증손행이시다. 방좌(邦佐)는 참봉으로 판서에 증직되었고, 방보(邦俌)는 서령(署令)이고, 방우(邦佑), 방주(邦柱), 방량(邦樑), 방종(邦宗)은 사성이고, 무강(無疆)은 한천위에, 계웅(季雄)은 사직에, 계신(季神), 계령(季靈)이 있다.

 

균(鈞)은 별좌에, 일(鎰), 건(鍵)은 참봉을 하셨는데 문강공께 현손행이시다. 여기서부터는 많은 분들을 다 기록할 수 없어서 과거에 올라 관직이 있고 증직이 있는 분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좌참찬 정간공은 언수(彦秀), 현령(縣令)에 준수(俊秀), 좌참찬 문정공은 사수(士秀), 사직(司直)에 인수(仁秀), 생원에 충수(忠秀), 만호에 영수(英秀), 별제에 휘(褘), 판서에 증직되신 연손이다. 직장에 대남(大男), 참봉에 석남(碩男)은 문강공께 5대손행이시다.

 

검열에 확(擴), 현감에 추( ), 생원에 지(摯), 참봉에 발(撥), 주부에 식(拭), 판서에 진(振), 좌의정에 정(挺), 첨지에 항(抗), 사과(司果)에 염( ), 현감에 덕년(德年), 좌참찬에 증직된 람(擥), 사과에 유(柔), 참봉에 엄( ), 지평에 증직된 린( ), 정랑에 증직된 준(峻)은 문강공께 6대손행이시다.

 

별제에 존신(存信), 현령에 존선(存善), 참판에 존세(存世), 참봉에 유경(有慶), 판관에 유형(有衡), 현감에 유환(有煥), 지사에 유항(有恒), 승지에 유도(有道), 찰방에 존중(存中), 교리에 존도(存道), 지돈령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소민공(昭敏公) 존성(存性), 참봉에 상요(相堯), 감역(監役)에 상순(相舜), 참봉으로 참판에 증직된 상우(相禹), 호군에 성후(成後), 선전관에 성일(成一)은 문강공께 7대손행이시다.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참의에 증직된 경기(慶起), 진사에 석형(錫亨)과 익한(益韓), 생원에 익관(益寬), 영돈령에 혜목공(惠穆公) 창원(昌遠), 판서로서 영의정에 증직된 충정공(忠靖公) 계원(啓遠), 호군에 이연(爾淵), 동지에 이후(爾後), 현감에 이중(爾重), 좌랑으로 승지에 증직된 이숙(爾 ), 군수에 이한(爾翰), 장령에 이병(爾炳), 주부에 유(攸), 진사에 간(侃), 감역에 연(演), 호군에 호(灝), 생원에 시현(始顯), 현감에 시환(始煥)은 문강공께 8대손행이시다.

 

서령에 원석(元錫), 감역에 흥빈(興賓), 생원에 희빈(姬賓), 참봉에 광석(光錫), 부사에 기석(祺錫), 장령에 지석(祉錫), 선전관에 영석(永錫), 무과에 창석(昌錫), 첨지에 경석(敬錫), 승지에 윤석(胤錫), 장령에 진석(晋錫), 감사로서 참판에 증직된 구석(龜錫), 군수로서 찬성에 증직된 희석(喜錫), 좌의정에 사석(師錫), 참의에 가석(嘉錫), 참봉에 명한(鳴漢), 참봉에 명주(鳴周), 진사에 명원(鳴遠), 참봉에 명겸(鳴謙), 도사(都事)에 명봉(鳴鳳), 진사에 명국(鳴國)은 문강공께 9대손행이시다.

 

참봉에 연(演), 호군에 식( ), 생원에 명(溟), 호군에 용(溶), 참봉에 태징(泰徵), 부사에 태겸(泰謙), 사정(寺正)에 태상(泰相), 모사에 태기(泰期), 진사에 태개(泰開), 참의에 태동(泰東), 도정에 태래(泰來), 군수에 태휘(泰彙), 첨정에 태과(泰果), 판서에 태채(泰采), 승지에 태노(泰老), 감사에 태구(泰耉), 봉사에 태기(泰耆), 교리에 태일(泰一), 교리에 태억(泰億), 참봉에 문우(文宇)는 문강공께 십대손행이시다.

 

무과에 동빈(東彬), 도사에 명빈(明彬), 군수에 익빈(益彬), 부솔(副率)에 행빈(行彬), 교리에 도빈(道彬), 세마에 두빈(斗彬), 진사에 정빈(鼎彬)은 문강공께 십일대손행이시다. 남자만을 기록하고 여자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대를 나타내고 나이 차례로 되어 있지 않는 것은 대체로 기록을 간략하게 하기 위해서며, 계보 서열대로 기록하고 서파(庶派)는 기록하지 않았다.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보문각대제학 증시문강 조공묘비

(輔國崇祿大夫 領中樞院事 兼 兵曹判書寶文閣大提學 贈諡文剛 趙公墓碑)


숭정기원후 80년(1707) 정해(丁亥) 월 일에 세우다.


10대손 통정대부 이조참의지제교(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 태동이 삼가 기록 한다.
10대손 가선대부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절도사순찰사관향사평양부윤(嘉善大夫平安道觀察使兼兵馬節度使巡察使館餉使平壤府尹) 태구가 삼가 글을 쓰다.


10대손 통훈대부 해주목사해주진병마첨절제사(通訓大夫海州牧使海州鎭兵馬僉節制使) 태기가 삼가 전액을 쓰다.


추기
광무 4년(1900년) 경자(庚子) 9월에 홍릉의 봉표로 동군 수석리 건좌의 산에 옮겨 모셨다.

옛 산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된다. 그 뒤 39년이 지난 무인(戊寅,1938년) 5월에 문강공 묘비를 새로 모신 산소로 옮겨 세웠다. 그 사업의 전말을 기록한다.


부군(府君)의 묘를 옮겨 이장한 기록은 이미 전에 기록하였다. 사패(賜牌)로 산과 들을 받은 곳은 수석, 가운, 이패동 3리로 면적은 46정(町) 반이며 옛날과 다름없이 은전을 받은 것이다. 옛날 산 즉, 양주 금곡의 율북(栗北)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구비(舊碑)를 남쪽으로 옮기는 일은 16대손인 병원(秉元)이 각 종중과 협의하여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누락된 것은 추가로 새겨 후에 살피도록 한 것이다. 세(歲) 계미(癸未,1943년) 4월에 16대손 병균(秉均) 삼가 기록하다.

-------------------------------------------------------------------------------------------------------------------------------------

 

[원문]

 

領中樞文岡趙公墓碑銘


有明朝鮮輔國崇祿大夫領中樞院事兼兵曹判書寶文閣大提學 贈諡文岡趙公墓碑文


我十代祖文剛公府君諱末生字平仲盖公當我 獻 英之際協贊經綸致世隆平德業文章冠冕一代至今號爲名臣而年代寢遠事蹟 有存者悲夫世傳舊有麗牲之石記載頗悉屬有家難埋其碑而遂不得其然歟嘗按國朝故實 太宗十一年公侍講至鄒書事是君則爲容悅者 上問其義公對曰臣之於君陳善閉邪匡救其失職也若一以事君爲心見君之失而不言是阿順以爲容逢迎以爲悅者也上以爲然十六年首相河崙請行致仕之法 上詢諸公對曰七十致仕古之良法凡年至而請去者聽有問則召焉 上從之時講武多就遠地公極陳其弊 上嘉納命行之近畿秋 上宴廣延樓酒 特召公講論洪範陰陽之理 世宗元年倭寇邊 上王及 上召廷臣議乘虛討對馬島咸曰不可獨公贊其決遂遣將李從茂直 巢穴公又奉 旨移書諭島酋禍福賊皆撤還效順觀於此足徵公獻替 謨之盛也河敬齋演記公戊午承 命巡撫三道翌年申夫人暴逝 上命馳驛傳訃盖異恩也謹稽舊譜我趙氏自 贈判院事諱岑始籍楊州寔公曾祖也祖保勝別將諱仁弼 贈戶曹判書考書雲觀正諱誼贈判中樞院事 楊州申氏公以洪武庚戌生遊文貞公趙庸門聞性理之學早登司馬辛巳魁增廣及第差料物庫副使癸未以書狀官如京師還拜獻納禮吏曹正郞丁亥登重試第二庚寅以記注官與脩太祖實錄選也歷執義典農寺正辛卯擢代言丙申陞知申事戊戌超拜刑曹判書俄差奏聞使移判兵曹兼集賢殿寶文閣大提學世子左賓客後階輔國領中樞丁卯四月二十四日考終壽七十八葬于楊州金村妙積山西鹿負乙之原配貞敬夫人平山申氏檢校漢城府尹諱夏之女己未正月十四日卒 葬公墓右生三男長璿尙太宗女貞靜翁主封漢原君次瓚中軍司直季瑾江原監司再室咸昌金氏王輔之女墓在咸昌下西生女歸縣監辛帶紅公與伯氏靖平公啓生後先主兵迭秉文衡昆第子姪同時 顯門戶鼎盛一再傳而諸房不振唯公後彌大闡高科登顯仕者殆三十人至於塗莘之卜爲國榮姻豈非公積善種德之餘慶歟 歟休哉公所著詩文放 無存只五六篇行于世舊居在城南馳駱洞宗胄繼傳遺 宛然今諸後孫 懼夫始終大略亦將彌久而愈泯謀立石以視遠屬泰東殺爲記謹 國乘家牒序次如右孫曾以下別錄于後 璿生渶直長瓚生遵選府使 贈參議瑾生永輝廣興倉守仲輝參校公孫行也壽堅縣監 贈參判永堅奉事福堅光世參奉光裕光綽司直光震進士公曾孫行也邦佐參奉贈判書邦 署令邦佑邦柱邦樑邦宗司成無疆漢川尉季雄司直季神季靈鈞別坐鎰鍵參奉公玄孫行也自玆以降多不能記只以登科第有官贈者錄焉左參贊貞簡公彦秀縣令俊秀左參贊文貞公士秀司直仁秀生員忠秀萬戶英秀別提褘贈判書連孫直長大男參奉碩男公五代孫行也檢閱擴縣監 生員摯參奉撥主簿拭判書振右議政挺僉知抗司果 縣監德年 贈左贊成擥司果之柔參奉 贈持平 贈正郞峻公六代孫行也別提存信縣令存善參判存世參奉有慶判官有衡縣監有煥知事有恒承旨有道察訪存中校理存道知敦寧贈領議政昭敏公存性參奉相堯監役相舜參奉 贈參判相禹護軍成後宣傳官成一公七代孫行也尙衣院正 贈參議慶起進士碩亨進士益韓生員益寬領敦寧惠穆公昌遠判書 贈領議政忠靖公啓遠護軍爾淵同知爾後縣監爾重佐郞 贈承旨爾 郡守爾翰掌令爾炳主簿攸進士侃監役演護軍灝生員始顯縣監始煥公八代孫行也署令元錫縣監興賓生員姬賓參奉光錫府使祺錫掌令祉錫宣傳官永錫武科昌錫僉知敬錫承旨胤錫掌令晋錫監司贈參判龜錫郡守贈贊成喜錫左議政師錫參議嘉錫參奉鳴漢參奉鳴周進士鳴遠參奉鳴謙都事鳴鳳進士鳴國公九代孫行也參奉演護軍 生員溟護軍溶參奉泰徵府使泰謙寺正泰相牧使泰期進士泰開參議泰東都正泰來郡守泰彙僉正泰果判書泰采承旨泰老監司泰耉奉事泰耆校理泰一校理泰億參奉文宇公十代孫行也武科東彬都事明彬郡守益彬副率行彬校理道彬洗馬斗彬進士鼎彬公十一代孫行也書男而不錄女著代而不序年者盖以記主簡略房有長第也庶派不錄

輔國崇祿大夫領中樞院事兼兵曹判書寶文閣大提學贈諡文岡趙公墓碑

崇禎紀元後八十年丁亥 月 日立
十代孫 通政大夫 吏曹參議 知製敎 泰東 謹記
十代孫 嘉善大夫 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管餉使 平壤府尹 泰耉 謹書
十代孫 通訓大夫 海州牧使 海州鎭 兵馬僉節制使 泰期 謹篆

追記
光武四年庚子九月因洪陵封標遷奉于同郡水石里乾坐原距故山南十里後三十九年戊寅五月徙舊碑立新崗記其事之 終始焉

府君墓遷葬事實己載前記而 賜牌山野在於水石加雲二牌三里而面績四十六町二反依舊 出 恩典也故山卽楊州金谷在栗北而誤記南焉舊碑遷立十六代孫秉元各宗中協議竣功而所記未免漏略今又添刻以備後之覽詳云爾
歲癸未四月 日 十六代孫秉均謹記

 

조말생선생 묘 / ⓒ남양주 럽

 

조말생은 죽어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말생의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있으나 정식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란다.

 

↑조말생 묘표 /ⓒ구름떠가고 바람부는 정원

 

   글씨가 잘 보이지 안치만 겨우 읽으면 좌측부터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 보문각 대제학 시 문강 조공 말생지묘 정경부인 평

   산신씨 부우(祔右) 입니다. 일반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합장(合葬)할때 부좌(祔左)라 해서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는데 ...........

 

조말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