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목사이시현처숙인평산신씨묘지명
(公州牧使李時顯妻淑人平山申氏墓誌銘)
[생졸년]1622년(광해군 14) ~ 1682년(숙종 8)/향년 61歲
명재 윤증(明齋 尹拯) 찬(撰)
숙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주목사(公州牧使) 이시현(李時顯)의 아내다.
부친은 생원 척(惕)이고, 조부는 해수(海壽)이며, 증조는 군수 훈(勳)이고, 고조는 성미(誠美)인데 기묘년(1519, 중종 14)에 한림을 지낸 준미(遵美)의 아우이다. 모친은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득경(得慶)의 따님이다.
숙인은 천계 임술년(1622, 광해군 14) 12월 15일에 태어나 18세에 목사공에게 시집갔다.
목사공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손자이자 부사 성남(星男)의 아들이다.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다. 아들 세귀(世龜)는 진사로서, 아들 광좌(光佐)를 낳았다.
큰딸은 박성미(朴成美)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신언(申讞)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남학명(南鶴鳴)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그다음 임술년(1682, 숙종 8) 2월 20일에 숙인이 별세하였다.
목사공이 이보다 4년 앞선 무오년(1678)에 별세하여 홍산현(鴻山縣) 해안향(海岸鄕) 죽절동(竹節洞) 좌자(坐子)의 언덕에 안장되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장차 그 왼편에 부장(祔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세귀가 숙인의 행장(行狀)을 눈물로 짓고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묘지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행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선비(先妣)는 타고난 자질이 간명하고 정숙하며, 스스로 행동하거나 남들과 함께할 때, 차분하고 단정하였다. 평상시에 담소를 나눌 때는 그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들리지 않았고 명령이 규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세속에서 화려하게 꾸미거나 성내고 다투는 습성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처음에 이씨(李氏) 집안에 시집가니 대가족에 동서들이 많았으나 공손하고 조심성 있게 행동하여 위 아래와 안팎에 좋지 않은 말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조모 김 부인(金夫人)은 평소 성품이 엄격한 편이었다.
한번은 제사 도구를 관리하라고 명했는데, 첩 하나가 그것을 훔치고는 선비가 사사로이 사용했다고 고했다. 선비가 아무 말 없이 허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끝내 변명하지 않았는데, 그 후 첩의 간악한 행실이 탄로나 일이 밝혀지자, 김부인이 자주 칭찬하였다.
선친이 젊을 때, 방황하여 집안 식구나 살림을 돌보지 않다가 만년에 벼슬에 나아가 십여 년을 벼슬살이하였고, 또한 큰 고을을 여러 차례 맡기도 하였다. 선비는 생활이 궁핍할 때에도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선친이 출세하고 나서도 화려한 수레를 타고 뻐기지 않았으며, 옷이나 노리개도 예전보다 사치하지 않았다.
또 뇌물과 청탁으로 선친이 정사하는 데에 누를 끼치지도 않았다.
선친의 상을 당하자 선비는 아들 세귀(世龜)를 따라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궁벽한 마을에 묵으며, 모자가 서로 의지하며 슬픔과 괴로움 속에 삼년상을 마쳤다.
상복을 벗고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고 입고 먹는 것을 늙고 병든 노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였다. 자녀들이 선비에게 마음을 바꾸기를 여러번 청하였으나 끝까지 변치 않았다.
제사를 지내면 언제나 엄숙하게 정성을 다하였고 몸을 정결히 하였으며, 매번 제삿날이면 새벽이 될 때까지 앉아 있었다. 한번은 제수(祭需)로 쓸려고 과일을 저장해 두었는데, 마침 사돈집에서 잔치가 있다고 빌리러 오자, ‘제사에 사용할 물건은 사사로이 빌릴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처음으로 선친이 조주(祧主)의 제사를 모시게 되자 고금의 예서(禮書)들을 채록하여 《제식도설(祭式圖說)》을 지었는데,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세귀가 선친의 뜻을 이어 받아 모든 것을 《제식도설》에 따라 제사를 지내자 비로소 내외의 제관(祭官)이 구비되었다.
집안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라 생각이 서로 맞지 않고 찬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선비가 과단성 있게 이를 좇아 술 주전자 북쪽에서 친히 감독하여 결국 《제식도설》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제수용품이 예전에 지내던 풍습에 비해 매우 간소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그러한 마음을 접고 예법에 따랐으니, 선비가 예법의 대체(大體)를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가벼운 병에 걸렸으나 선비는 일어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딸이 문안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두 딸에게 말하기를, ‘아마도 내가 창졸간에 말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은 유순함을 정도(正道)로 삼는다. 너희들은 행실을 신중히 하여 남편의 말을 어기지 말아라.’ 하였다.
병이 악화되자 세귀가 울며 하고픈 말을 하라고 청하자, 주위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네 선친의 초상 때에 관복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나를 염습할 때 금단(錦段)을 쓰지 마라.’ 하고 또 목숨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지 말고 여묘살이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임종할 때에 정신이 조금도 흐리지 않았다.
아, 선비와 같이 아름다운 덕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사람이라면 끝없이 복을 누려야 마땅한데, 수명이 회갑에 그쳤고, 선친의 품계가 하대부(下大夫)에 있었으나 만년에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탓에 미처 교첩(敎牒)을 받들지 못했으니, 이는 아마도 정해진 운명이 그리한 것이다.”
내가 행장을 받아 여러번 읽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기를, ‘부녀자의 아름다운 행적은 뇌사(誄辭)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아들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였다.
이러하니 내 아무리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려 한들 어떻게 그 청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에 삼가 행적의 대략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주역에는 항구한 덕을 말했고 / 易稱恒貞。
정전에는 유순함을 말했는데 / 傳言柔正。
내 숙인을 살펴보니 / 我觀淑人。
이러한 행실을 갖추었도다 / 庶幾此行。
훌륭한 산소 자리에 / 有樂斯丘。
남편을 따라갔도다 / 從其君子。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고 / 銘以告後。
효성스러운 아들을 위로하노라 / 且慰孝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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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淑人申氏墓誌銘
淑人平山申氏。故通政大夫公州牧使李公時顯之配也。其考曰惕。生員其祖曰海壽。其曾祖曰勳。郡守。其高祖曰誠美。己卯翰林遵美之弟也。其妣曰慶州金氏。得慶之女。淑人以天啓壬戌十二月十五日生。年十八。歸于牧使公。牧使慶州人。白沙文忠公恒福之孫。府使星男之子也。有一男三女。男曰世龜。進士。生男光佐。女長適朴成美。次適申讞。次適南鶴鳴。皆士人。後壬戌二月二十日。淑人終。牧使先四年戊午卒。葬于鴻山縣海岸鄕竹節洞坐子之原。至是將祔葬于其左。世龜泣狀淑人行事。以書請誌於拯其狀曰。先妣天資簡精貞淑。而動容接物之際。安詳端質。其平居言笑。不聞於墻廡。命令不出於閨閫。其於世俗紛華恚爭之習。漠然若無聞也。始歸李氏。族大娣姒多。敬順畏謹。上下內外。一無違言。皇姑金夫人性素嚴。嘗命典祀饗之具。有妾御竊去。而以先妣私用告。先妣默而受過。終不自辨。後奸露而事白。金夫人亟稱之。先君少落拓。不顧家人產業。晩而筮仕。官食十數年。亦累典雄州。先妣育窮無怨色。後亦不以文駟自榮。被服玩好。無侈於舊。又未嘗以苞苴請託。累先君之政也。先君之喪。先妣隨世龜廬于墓下。旅泊窮鄕。孤寡相依。銜哀茹苦。以終三年。服闋。歸于京第。猶以未亡自處。衣食之奉。有非老病所堪。諸子累請改之。而終不變。祭祀必誠以嚴。躬致精潔。每當祭日。坐而達曙。嘗儲果品。以備祭需。姻家有燕饗請貸之。不許曰。祭祀所用。不能私乞也。始先君奉祀祧主。嘗採古今禮書。著祭式圖說。未及行而歿。世龜承先志。一以祭式從事。始備內外官。家中刱見。多齟齬不悅。先妣斷然從之。親監於酒壺之北。卒以如儀。祭品視俗之舊頗簡。心以爲不安。而猶屈意從禮。其達於大體而無所自遂也類此。初感微疾。已自知不起。二女來寧而歸。語之曰。恐倉卒不能有言。婦德以柔順爲貞。敬愼爾儀。無違夫子命。疾革。世龜泣請所欲言。顧曰。先大夫之喪。不得備品服。殮我勿用錦段。且戒以勿滅性勿廬墓。臨歿。神氣不少爽。嗚呼。以先妣淑德懿行。宜享胡福。而壽止於周甲。先君官階下大夫。而晩年不樂在內供仕。以故不及受封牒。其命也歟。拯旣受而三復。不覺感涕曰。婦人之美。非誄不章。幸哉。有子如此哉。雖欲以不文辭。惡可以無從也。謹爲之敍次梗槩。而繼以銘。銘曰。
易稱恒貞。傳言柔正。我觀淑人。庶幾此行。有樂斯丘。從其君子。銘以告後。且慰孝嗣。
明齋先生遺稿卷之三十六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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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贈淑夫人平山申氏家狀 - 이세구(李世龜)
先妣姓申氏平山人也。始祖壯節公諱崇謙。佐高麗太祖。策開國元勳。名載史冊。其後八百年。世爲簪纓族。譜不絶書。御史中丞諱君平。當麗季政昏。剛直不撓。以不署政丞姜融等告身見斥。有大名。君平生諱琿翰林。琿生諱浩典理判書。浩生諱敬源。生諱元祐。元祐取從父兄弟正郞諱守福之子永錫爲子監察。永錫生諱援。援生諱遵美。登己卯薦科官翰林。爲世名賢。翰林之弟曰諱誠美有高行。是爲先妣高祖也。曾祖諱勳德川郡守。祖諱海壽娶坡平尹氏監察諱泰復女。實生皇考諱惕。少孤遭亂。篤學勤苦。登上庠竟不第。然寢席田畒。常聞咿唔聲。至老不衰。又喜酒愛客。人稱有長者風。娶慶州金氏諱得慶女。以天啓壬戌十二月十五日。先妣年十八。歸于慶州李氏我先人諱時顯。官至通政大夫公州牧使。我王考諱星男鐵原府使贈兵曹參判鰲興君。我曾王考諱恒福領議政鰲城府院君贈謚文忠公。世稱爲白沙先生。以吾族之大娣姒之多。難乎其爲婦。而奉舅姑敬。承夫子順。接上下簡正而有恩義。一心畏謹。不沮不溢。內外宗黨無違言。家素淸貧。先君又落拓。確然自守。未嘗顧家人産業。以此麁糲屢空。布裙不完。至病不能興。終無怨色。撫養子女。辛勤敎育。皆有成立。先君晩而筮仕。十數年皆官食。亦屢典䧺州。不以文駟自幸。被服玩好。無侈於舊。前後所至。未有以蟠木苞苴。夤緣請托。累及官政者。齊家之化。固有所自。而我先妣淑愼其身。克媲賢德。亦可擧隅而見也。崇禎戊午。先君棄不肖孤。將以治命葬于鴻山。距京師五百里。親戚皆有遠而難之之意。先妣問於孤子世龜曰汝將奈何。對曰請廬於墓。以護新阡。先妣曰是吾志也。己未春。提挈幼孤。移家于鴻。被苫泣血。以終三年。其間再營葬三易舍。絶黨窮鄕。草樹茂密。家人不堪其苦而先妣隨分處之。勸課僮僕。辛勤稼穡。雖在禍釁流離之際而家衆以不散亡。辛酉仲冬。克還于舊居。墓道諸事。亦略有綜緖。可守而護也。先君家奉祧主。嘗採古今禮書。著祭式圖說。饌品儀註一以禮家爲主而參酌通變。方講而行之。草刱未究。大故及焉。至是世龜禀于先妣。請以祭式將事。吾家久不備內外官。登降拜俯多齟齬。婦人輩皆不悅。羣議然。先妣斷而行之。親監於酒壺之北。卒以如儀。家禮祭品。視家之舊頗簡。心甚不安。猶屈意從之。克成先君之志。其治家制事。無所自遂。大抵此類也。嘗以未亡人自處。衣食之奉。極其簡朴。諸子以爲非老病所堪。屢請改之。終不肯變。至於先君平日服御之物。見輒悽愴流涕。以此家人不忍啓其篋笥。奉祭祀誠而嚴。必躬自執事。滌濯烹飪。務令精潔。每當饗祀。坐而達曉。亦未甞以老自懈。嘗儲果品以備祭需。姻家有燕饗請貸之終不許。家人疑其薄。先妣曰祭祀所用。不敢私相乞貸也。世龜以家衆多而食少。將就耕於驪水之陽。家人素不間耒鋤。又數歲作苦。懲於廬鴻之時皆掉頭。先妣獨贊之。冀其成就也。少多疾病。晩獲蘓完。而禍故之餘。積傷在躬。有時氣上頭疼。寒熱交作。鎭日乃已。歸京之後。子女團聚。兒孫在膝。忘憂寫哀。聊以自遣。而至於階庭戶闥。觸目傷懷則有不能自抑者矣。壬戌正月念後感寒疾。初似微恙。輾轉沈篤。家人不以爲危。而自知不起。申南兩家婦暫歸夫家。皆戒之曰老人之氣力不可恃。恐倉卒不克有緖言。婦德以柔順爲貞。敬愼爾儀。無違夫子命。二月十九日夜。連進獨參湯。疾已病幾不能言。世龜泣請曰豈有欲言者乎。曰先大夫之喪。不得備品服。斂我以鄕紬。勿用錦段。汝素病。無固執以自保。葬訖卽反哭。勿復廬墓。時諸女皆有家。獨朴家婦早寡。夫家零替。恐煩念。又請曰世龜在。母以朴家妹爲念。頷之曰吾不慮也。諸女有奔馳來省者。號之曰母識我乎。曰識之矣。吾固言老病不可知。他日相對。恐不能言。今雖識不能言奈何。及曉謂侍者曰初昏病已不可爲。賴藥力以至今。今不可復用藥矣。鷄旣鳴矣乎。對曰鳴矣。曰吾得良日死矣。精神終不少爽。二十日戊辰朝。竟棄不肖孤。卒于內寢。享年六十一。生一男四女。男曰世龜進士。娶判書朴長遠女。生一男名光佐。女長適朴成美。次適申瓛生一男。次適南鶴鳴生一女皆幼。次十歲而夭。先妣天姿簡精貞淑。推之於動容接物之際。安詳端質。皇姑金夫人性素嚴。命典祀饗之具。妾御盜其物。以先妣私用告。事有至難者。先妣嘿而受過。終不自辨。後其人有罪。奸露而事白。金夫人亟稱之。其平居言笑。不聞於墻廡。命令不出於閨閫。御婢使常掩其細過。屢戒不悛然後略施夏楚。而未嘗加聲氣詬怒。末流衰俗。專以衣服飮食相高。或交遊姻戚務爲辨強。而溫溫自持。靜拙以居。其於紛華恚爭之習。漠然若無聞也。嗚呼。以先妣淑德懿行。宜享胡福。而有子無良。不克盡其藥餌之奉。壽止於周甲。封秩已躋於夫人。而先君歸自星州。不樂宦進。在內未嘗供仕。以故不及受命牒。以淑人題銘㫌。嗚呼其亦命也歟。何其酷也。日者云年月不利。不可以祔。是歲四月二十日。權厝於旁崗。十二月二十九日卯時。將祔左於先君。同墳異穴。實鴻山縣東海岸面鳳凰山下竹節洞坐子之原也。不肖孤世龜冥然苟存。謹摭先行。濡血而書。不敢溢辭。以求掩坎之銘於仁人君子。竊附張憑之義。且志其終天之痛云。崇禎壬戌九月日。不肖孤世龜泣血謹狀。<끝>
養窩集册十 / 家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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