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눌헌 이사균 행장(訥軒李思鈞行狀)
1471 성종 2) ~ 1536(중종 31) /향년 66세
지퇴당 이정형 찬(知退堂 李廷馨 撰)
공의 휘(諱)는 사균(思鈞)이요, 자(字)는 중경(重卿)이다.
호(號)는 눌헌(訥軒)이고 증시(贈諡)는 문강공(文剛公)으로 경주(慶州) 사람이다.
고조(高祖) 이담(李擔)은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냈고, 증조(曾祖)는 이희(李暿)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상도관찰사 출척사(慶尙道觀察使黜陟使)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조(祖) 이계번(李繼藩)은 병조참판(兵曹參判) 행 위의장군(行威毅將軍) 충좌위 중부장(忠佐衛中部將)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 이식(李埴)은 이조판서(吏曹判書) 행 통훈대부(行通訓大夫) 평양부판관(平壤府判官)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호조판서(戶曹判書) 행 통정대부(行通政大夫)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추증된 김숙(金潚)의 딸인데, 성화(成化) 신묘년(辛卯年, 1471 성종 2) 10월 14일[壬申]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몸집이 크고 의젓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린 시절에 부친인 판서공이 평양 판관(平壤判官)으로 재임하면서 토관(土官) 중에서 학식(學識)이 있는 자를 골라서 공의 스승을 삼으라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저는 차라리 제 스스로 배울지언정 붓대를 쥐고 문서나 써내는 소이(小吏)에게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서는, 끝내 그에게 나아가 배우지 않았다.
이윽고 성장해서는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한결 뛰어났다. 국학(國學,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는데 공이 지은 글이 우연히 남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되자 공이 탄식하기를, “사내대장부가 어찌 남보다 밑에 있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부지런히 글을 읽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사(文辭)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다시 국학에 나아가자 일시의 제생(諸生)들이 모두 공의 총민(聰敏) 함에 탄복하였으며 이로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나날이 주위에 전파되었다. 홍치(弘治) 5년 임자년(壬子年, 1492 성종 23)에 진사시(進士試)의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 7년 갑인년(甲寅年, 1494 성종 25)에는 외우(外憂)를 당하였다.
11년 무오년(戊午年, 1498 연산군 4)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에 선보(選補)되었다.
이해 가을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13년 경신년(庚申年, 1500 연산군 6) 겨울에 복기(服朞)가 끝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전경(經筵典經)에 임명되었다.
15년 임술년(壬戌年, 1502 연산군 8)에 저작(著作)으로 옮겨 선교랑(宣敎郞)에 승진하였고, 그해 가을에 일에 대하여 말하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조금 후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승진되어 승훈랑(承訓郞)의 품계에 올랐다.
겨울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임명되었고, 17년 갑자년(甲子年, 1504 연산군 10) 봄에 회묘1)(懷墓)의 일을 논하다가 연산군(燕山君)의 노여움을 건드려 보은(報恩)에 유배(流配) 당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곤양(昆陽)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원년) 가을에 성상(聖上, 중종)이 반정(反正)하자 즉시 공을 다시 불러들여 부수찬(副修撰)에 임명하였는데 품계는 승의랑(承議郞)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507 중종 2) 봄에 수찬(修撰)이 되어 봉훈랑(奉訓郞)에 올랐으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봉직랑(奉直郞)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 때문에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에 임명되었고,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덕랑(通德郞)의 품계에 올랐다. 이어 이조정랑(吏曹正郞)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에 임명되어 조봉랑(朝奉郞)의 품계에 올랐다.
무진년(戊辰年, 1508 중종 3)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오르고 그해 가을에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오르고 겨울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오르고 다시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는데, 모두 제술(製述)이 우등(優等)하여 임금이 특별히 내려준 은명(恩命)이었다.
기사년(己巳年, 1509 중종 4) 여름에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옮겼는데 품계는 중직대부(中直大夫)였고, 곧이어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는데 품계는 통훈대부(通訓大夫)였다.
경오년(庚午年, 1510 중종 5) 봄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로 옮겼으며, 그해 여름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겸 지제교(知製敎)로 옮겨 유 승상(柳丞相, 유순정(柳順汀)을 말함)을 따라서 남쪽지방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정벌하였다.
또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옮겨 겸직은 예전과 똑같았으며, 그해 가을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어 누차 천전(遷轉)되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그 무렵의 어느 날에 임금이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는데 다른 승지들이 늦게 사진(仕進)하는 바람에 공도 함께 좌천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겸 지제교가 되었다.
계유년(癸酉年, 1513 중종 8) 봄에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그해 겨울에 박영문(朴永文)의 옥사2)(獄事)가 있었는데 임금이 공에게 참국(參鞫)하라고 명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14 중종 9) 봄에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이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모두 송서(送西, 문관(文官)이 서반(西班)의 한직(閒職)으로 보내지는 인사조치)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그해 여름에 강원감사(江原監司)에 임명되었다.
을해년(乙亥年, 1515 중종 10) 봄에 계 조모(繼祖母)의 상(喪)을 당하였고, 정축년(丁丑年, 1517 중종 12) 봄에 복기(服朞)가 끝나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여름에 형조(刑曹)로 옮겼다. 그해 겨울에는 중궁 책봉 주청부사(中宮冊封奏請副使)로서 중국의 경사(京師)에 사행(使行)하였다.
그 당시에 정덕『正德, 명 무종(武宗)의 연호』이 선부(宣府)에 있었는데, 공은 상사(上使)인 이계맹(李繼孟)과 더불어 경사에 80일 남짓이나 머물면서 무릇 주청(奏請)하는 정문(呈文)에 관계된 글들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지어져 나왔으며 마침내 중궁의 장복(章服)과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임금이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518 중종 13) 여름에 외임으로 나가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는데 그 까닭은 새로 벼슬하게 된 젊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 겨울에 팔도(八道)의 감사(監司)가 모두 부윤(府尹)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공도 갑자기 갈려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채 서울에 돌아오기도 전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
공은 매양 조정의 논의가 조용하지 못한 것을 우려하였으되 자기를 배척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느 날 경연(經筵)이 열려 공이 먼저 승정원에 나아가서 도승지 김희수(金希壽) 공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조정이 왜 이렇게 시끄럽소?”
하였고,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대답한 이야기를 진강(進講)한 일로 인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전에는 전하께서 조광조(趙光祖) 등에 대하여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다급하게 등용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마치 멀리 내쫓지 못하면 큰일이나 날 것처럼 그들을 배척하시니, 저는 전하께서 친히 그들의 좋은 점을 보고서 등용하였고 좋지 못한 점을 보고서 배척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의 비난이나 칭찬 때문에 그들을 등용하거나 배척한다면 아래에 있는 신하들로서는 믿을 바가 없게 되는 것이고 또한 전하의 깊이를 엿보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날 즉시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겼다. 어떤 사람들이 공에게 소신을 굽히고 시의(時議)를 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모두 웃어넘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경진년(庚辰年, 1520 중종 15) 봄에 함경감사(咸鏡監司)에 임명되었고, 가정(嘉靖) 원년(元年)인 임오년(壬午年, 1522 중종 17) 봄에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에는 진하사(進賀使)로서 중국의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23 중종 18) 가을에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임명되었고, 갑신년(甲申年, 1524 중종 19) 가을에 또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다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525 중종 20) 가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천전(遷轉)되었고, 그해 겨울에 수지중추부사(守知中樞府事) 겸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26 중종 21) 여름에 다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정해년(丁亥年, 1527 중종 22) 가을에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기축년(己丑年, 1529 중종 24) 여름에 특별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였다.
그해 겨울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가 곧이어 외임으로 나가 충청감사(忠淸監司)를 겸하였다.
그 당시에 우도(右道)에 심한 흉년이 들어서 임금이 대신(大臣)을 감사에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참여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30 중종 25) 봄에 만포(滿浦)의 호인(胡人)들이 우리의 변장(邊將)을 살해한 경보(警報)가 있어서 임금이 몹시 걱정을 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변방을 진정하려고 하였는데 공을 불러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공은 서울에 들어와 사나흘을 머물다가 즉시 임지로 길을 떠났는데 이때 임금이 공을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서쪽 변경의 변고(變故)가 심상치 않은데 경(卿)은 어떻게 처리할 셈인가?”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임소(任所)에 도착해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긴박하지 않은 변방 경보는 일일이 번거롭게 위에 말씀드리지 않고 싶습니다. 근래에 장수가 된 자들이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조정에 보고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는 한갓 번거롭고 시끄러움만 초래할 뿐입니다.
옛날의 변방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은 자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포의 변고는 틀림없이 야인(野人)들이 오래전부터 계획하여 일으킨 난리가 아니고, 모두 변방의 장수들이 스스로 잘못해서 말미암은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이어 옷가지와 군기(軍器)를 하사하였으며 공이 데리고 가는 편장(編將)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사(賞賜)를 내려주었다.
신묘년(辛卯年, 1531 중종 26) 겨울에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판윤(判尹) 겸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하였고, 임진년(壬辰年, 1532 중종 27) 겨울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옮겼다가 곧이어 이조(吏曹)로 옮겼다.
계사년(癸巳年, 1533 중종 28) 여름에 병조(兵曹)로 옮겼고 그해 가을에는 호조(戶曹)로 옮겼는데 병조와 호조에 임명된 것은 임금의 특명에 따른 것이었다.
갑오년(甲午年, 1534 중종 29) 여름에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옮겼고, 을미년(乙未年, 1535 중종 30) 봄에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는데 겸직한 것은 예전과 똑같았으며 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다.
그 무렵에 간신(奸臣)이 정사를 함부로 농단하여 정인(正人)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였는데, 공은 의금부의 당상관(堂上官)으로서 억울하게 무함 당한 자들을 힘껏 구원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공의 처지를 위태롭게 여겼다.
어느 이름난 고관(高官)이 감옥에 수감되어 장차 사형을 당할 판국이었는데 공은 그가 무고하게 죽게 된 것을 애처롭게 여기고 안율(按律)하여 임금에게 품계(稟啓)할 때에 그를 두둔하는 것처럼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이 즉시 대궐 바깥으로 새어나가서 공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성품이 본래 꿋꿋하고 지조가 있어서 조금도 누구에게 아부하는 뜻이 없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알고 있다.”
하고는, 단지 송서(送西, 문관(文官)을 서반(西班)으로 보내는 인사조치 하라고만 명하였다.
그해 여름에 지중추부사로 옮겼고 얼마 안 되어 외임으로 나가 경상감사(慶尙監司)를 겸하였는데, 하직하는 날에 임금이 인견하고 위로하기를,
“근래에 감사들이 체모(體貌)를 잃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이에 대신을 가려 뽑아서 보내는 바이니, 경은 멀리 외방에 나가는 것을 힘들게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36 중종 31) 여름에 다시 소환하여 판윤(判尹)에 임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종기(腫氣)를 앓기 시작하였는데 서울에 들어온 뒤에는 점점 위독해졌고 그로 인하여 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이때에 이르러 병이 매우 위독해졌다.
이에 주위의 어떤 사람이 공에게 시첩(侍妾)을 부르겠다고 청하였으나 공은 재차 안 된다고 말하더니 잠시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66세였고 이때가 병신년 8월 초5일이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고 쌀ㆍ콩ㆍ종이ㆍ돗자리ㆍ관곽(棺槨) 등을 부의(賻儀)로 내려주었으며, 군졸(軍卒)들을 지급하여 무덤을 만들도록 하였고,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이해 11월 초9일에 광주(廣州)의 명일원리(明逸院里)에 장사지내니 간 좌 곤향(艮坐坤向)의 언덕으로 선영(先塋)의 옆인데, 이는 공의 유명[치명(治命)]을 따른 것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매(豪邁)하고 금도(襟度)가 활달하였으며 용모가 우람하여 관대하면서도 엄격하였다.
집안일은 모조리 부인에게 맡겼고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돌덩이처럼 혼자 앉아 지내면서 집안사람이나 소인(小人)들과 더불어 상대하지 않았다.
빈객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우스운 이야기와 농담을 곧잘 나누어 따스한 봄 날씨처럼 부드럽게 상대하였고, 평생 동안 자잘한 체면 따위는 따지지 않고 살았으되 조수(操守)하는 바는 확고하여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았으며, 공무(公務) 외에는 남에게 명함을 보내거나 누구를 찾아가거나 남을 배웅하고 영접하는 등의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친족 여자로서 살림이 가난하여 시집을 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공이 반드시 데려다가 양육하여 자기 재산을 내어 시집을 가도록 해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러 번 시위(試闈)를 관장하였는데 시권(試券)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나 잠깐 사이에 고과(考課)를 평정(評定)하였으되 털끝만큼도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고, 문장을 지을 때에는 붓을 쥐면 그 자리에서 당장 지어내고 다듬거나 고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 저술한 것들을 짓는 대로 버리곤 하였으므로 공의 자제들이 그 빠뜨린 글들을 수습하여 지금 약간 권(卷)을 만들었다. 공은 고려 때 정승(政丞)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익재 선생『益齋先生, 이제현(李齊賢)』의 8대손이 되는데 그 기개와 문장이 오래전부터 유래하여 전해온 바가 있는 셈이다.
임금을 시종(侍從)하는 관원으로 궁궐에 10여 년간이나 출입하면서 안마(鞍馬)와 음식 등 임금에게 하사받은 물건들이 매우 많았고, 세 번이나 경조 윤(京兆尹)을 지내고 4조(曹)의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임금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무릇 지론(持論)과 몸가짐에 있어서는 정직하고 변덕스럽지 않은 까닭에 두 번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마침내 지위가 덕망에 차지 않았으며 몸이 죽은 뒤에도 집안일을 이어받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는 조야(朝野)가 함께 아쉽게 여긴 바이다.
공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황씨(黃氏)는 인동현감(仁同縣監)을 지낸 황근창(黃謹昌)의 딸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일찍 죽고 딸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최륜(崔崙)에게 시집가서 2남 5녀를 낳았다.
이 중에 장녀는 유경란(柳景蘭)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고, 차녀(次女)는 군수(郡守) 이희문(李希文)에게 시집갔고, 3녀는 참판(參判) 이몽량(李夢亮)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4녀는 도사(都事) 이경우(李景祐)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고, 5녀는 교리(校理) 박근원(朴謹元)에게 시집가서 박충수(朴忠秀)와 박정수(朴貞秀)를 낳았다.
큰아들 박충수는 지금 성주판관(星州判官)으로 있으며 경명군(景明君)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5남 5녀를 낳았고, 작은 아들 박정수는 병오년(丙午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지금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있으며 부사(府使) 성근(成謹)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1남 4녀를 낳았다.
공은 집안의 제사를 이어갈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제(同生弟)인 군수(郡守) 이사권(李思權)의 셋째 아들 이정(李侹)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았다. 이정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지윤제(池允濟)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1녀를 낳았는데 그 딸은 유학(幼學) 이녕(李寗)에게 시집갔다.
[각주]
1) 회묘(懷墓) : 연산군의 생모(生母)인 폐비(廢妃) 윤씨(尹氏)를 말함.
2) 박영문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되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나
문신(文臣)들이 무관 출신인 자기를 배척하여 자주 탄핵하는 것에 원한을 품고서 마침내 1513년(중종 8)
에 신윤무(辛允武)를 포함한 무인들을 규합하여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 : 성종의 열째아들)을 추대하
여 무신의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다가 의정부의 노비인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처형되었
고 그 아들들도 모두 교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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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剛公李思鈞 傳[散班] - 李廷馨
○文剛公李思鈞。字重卿。成化辛卯生。捷弘治戊午科。事中宗。官至吏曹判書。性骯髒不肯隨時俯仰。不容時務。出爲全州府尹。及靜庵等被罪。袞輩意公必懷憾。入拜副提學。公就召辭職曰。光祖等被罪事。臣不能詳知。必是欲爲善事而不能無過中。憎疾者多而然也。又伏見傳光祖等之敎而竊思之。自上若知此人等只爲國事而無他念。則其罪當末勘而不減。恐上心有所疑阻也。賞罰雖加於匹夫。若有僭濫。則大累君德也。古人有一言悟主者。如臣無狀。安有回天之力乎。敢辭。於是大忤時論。正言趙琛劾之曰。李某用心。難信也。遆拜工曹參判。洪相公暹嘗爲吏郞。醉過許沆家。發觸忤之言。沆與金安老構陷。暹鞫於闕庭。受百餘棍。公爲義禁府堂上。發議力救。欲啓其冤。或曰。當問諸金相。然後可啓也。公奮然曰。生殺之權。在於人主。豈可取裁於大臣。同參者勉從。遂啓之。命減死。長流興陽。卽日。公被㙜劾免官。未幾。出爲慶尙監司。安老出餞於興仁門外。公聞之。由崇禮門而去。其倔僵如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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