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문산 이공 홍석 묘갈명(文山李公洪錫墓碣銘)

야촌(1) 2020. 12. 9. 23:21

작성일 : 2007, 10 . 15

 

이홍석「李洪錫, 1838(헌종 4) ~ 1897(고종 34)」

◇경주이씨 37世 종(鍾)자 항렬로 삼성그룹 고(故) 이병철 회장의 조부이시다.

 

문산 이공 묘갈명(文山李公墓碣銘) - 심재 조긍섭 찬(深齋 曺兢燮 撰)

 

의춘현(宜春縣: 오늘날 의령의 별칭)에는 옛 유자(儒者)가 있으니, 문산(文山) 처사 이공(李公)이다.

 

공은 일찍이 당세(當世)의 경학(經學) 선생을 좇아서 의례(儀禮)의 학문을 익혔지만, 이것을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그 배운 바를 행하는 것을 주로 하였는데, 그 행한 것으로는 또 후모(後母) 김씨(金氏)를 잘 모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향리(鄕里)의 사람들은 지금도 공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모공(某公)을 두고 하는 말인가? 후모를 잘 모셨다.”라고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여러 해가 지나서 공의 아들 찬우(纘雨)가 자기 종제 적우(績雨)가 지은 유사(遺事)를 가지고 긍섭(兢燮,1873~1933)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유사에는 “공의 나이 15세에 부친이 병을 앓고 또 몹시 가난하였으며, 두 아우가 있었는데 모두 어렸다.

대인공이 개연히 ‘이 아이는 재주는 있지만 가난해서 학업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어찌 농사일을 아울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모친이 ‘이 아이는 약하고 두 아우는 자랐으니, 어찌 농사일을 더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읽고서 “이 분은 분명 현명한 어머니일 것이니, 모시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공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칭송을 받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뒤 이어 유사에는 또 “공이 생모 강씨(姜氏)의 상을 당한 것은 겨우 9살 때였고, 3년 뒤에 김씨(金氏)가 들어왔다. 대인공이 일찍이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너를 춥고 굶주리게 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바로 ‘어머니의 어질음은 이웃에서 알고 있으니, 어찌 애라고 박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우들이 잘못하면 문득 감추고 덮어주려고 애를 썼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탄하기를 “진정 이런 일이 있었구나. 공이 능히 어머니가 기뻐하시도록 했구나.”라고 하였다.

 

혹자가 “진정 이와 같다면, 어찌해서 공이 커서도 매를 맞았는가?”라고 묻자, “이것이 더욱 공의 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모로 큰애를 매로 때린 것은 혐의스러운 것이 아니니, 효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매를 맞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공이 성재(性齋) 허 문헌공(許文憲公)에게 학문을 배우게 되었을 때, 모친은 길이 멀고 몸이 약해서 어렵겠다고 생각하였지만, 공은 완곡하게 말씀을 드려 허락을 받았다. 돌아올 때는 심의(深衣)를 입고 치포관(緇布官)을 쓰고서 왔으니, 이로부터 혼인과 제사를 지내는 일에는 조리가 분명하게 되었다.

 

공은 집안 살림을 잘 꾸려내어 만년에 상당히 넉넉하였다.

모부인을 모시는 데는 달고 맛난 음식을 빠트리지 않았으며, 생모와 후모의 친정인 자신의 두 외가와 처가(妻家)와 사가(査家)에 모두 제전(祭田)을 마련해 주었다.

 

후모 집안인 김씨가 주손(冑孫)이 없자 공이 양자를 세워주었고, 집안의 살림도 모두 힘껏 마련해 주었다.

두 아우에게는 자기보다 후하게 해 줄 생각을 해서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얼마 뒤 집안일을 아우에게 맡기고, 문산정사(文山精舍)에 스스로 물러나 시를 읊조리고 글을 읽고 외면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동학비도(東學匪徒)의 난리 때는 사는 곳이 큰길이 가로 지나는 곳에 있어서, 모친을 모시고 삼가(三嘉)의 산골짜기로 거처를 옮겨 두어 해를 지냈다.

 

일찍이 일 때문에 고향에 갔다가 우연히 독감에 걸렸다.

자제들을 불러서 크게 슬퍼하면서 “어머니께서 늙으신데 끝까지 봉양을 못하고, 할머니의 열행(烈行)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나의 불효를 드러낼 것이다.”라고 하고 돌아가시니, 정유년(1897, 광무1) 5월 6일로 향년 61세이다. 장현(長峴)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는 홍석(洪錫), 자는 성윤(成允)이다.

그 선계(先系)는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시조 거명(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이다.

 

그 뒤에 휘 일신(日新)은 이태조(李太祖)의 공신이었다.

그 분의 손자 휘 계번(桂蕃)에 와서는 벼슬은 주부(主簿)이니, 비로소 의령(宜寧)에 살게 되었다.

 

몇 대를 내려와 휘 유(宥)에 와서는 좌승지(左承旨)였다.

이 분이 휘 종욱(宗郁)을 낳았으니, 호가 화헌(和軒)이고 학문과 행실을 갖추고 있었는데, 공에게는 9세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원철(源哲)이며, 조부의 휘는 기민(機敏)이며, 부친의 휘는 재봉(載鳳)이다.

 

외조부는 강중흠(姜重欽)이며, 후모(後母)의 아버지는 김기열(金箕悅)이다.
부인는 순흥(順興) 안정헌(安鼎憲)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바로 찬우(纘雨)이고, 조준규(趙俊奎)와 이찬후(李鑽厚)에게 출가한 두 딸을 두었다. 찬우의 세 아들은 어리다. 조준규의 아들은 용섭(鏞燮)이다. 이찬후의 아들은 원석(元奭)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명(銘)을 붙인다.

효는 누가 어려웠던가 / 維孝孰難(유효숙난)

임금과 민자건과 왕상이라 / 曰舜騫祥(왈순건상)

공이 행한 것을 살펴보면 / 揆公所履(규공소리)

어찌 서로 비교가 되지 않으리오 / 胡不相方(호불상방)

타고난 것이 이미 아름다운데 / 旣生之美(기생지미)

또한 학문을 바탕으로 하였다오 / 亦資之學(역자지학)

이런 유자에 대해 말하지 말라 / 毋曰是儒(무왈시유)

저 글이나 조탁하는 / 彼哉雕琢(피재조탁)

 

옮긴이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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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文山李公墓碣銘 - 深齋 曺兢燮 撰


宜春縣故有儒者曰文山處士李公。公甞從當世之經學先生爲儀文之學。然不以是自表襮于人。獨以行其所學爲主。其行也又以善事後母金氏聞。凡鄕里之人。至今聞有擧公名者。則曰是某公也耶。善事後母。公沒有年。其孤纘雨以其從弟績雨所爲遺事。求兢燮爲墓銘。其文有曰公十五而大人公病且貧甚。有二弟皆幼。大人公慨然語之曰是兒材。然貧不能卒學。卽我死無寧並治田事。母夫人曰是兒弱。二弟且長。奈何以田事加之。予讀之曰此自賢母。何事之之難。而公乃得此於人耶。已又曰公喪所生母姜氏甫九歲矣。三年而金氏入。大人公甞於寢所問。母無汝寒饑乎。則對曰母之賢。隣里所知也。豈兒而薄乎。諸弟有失。輒務掩匿覆盖之。予乃歎曰有是哉。公之能有以感悅母也。或曰夫如是。奚公之長而被撻也。曰此彌見公之孝也。夫以後母而撻長子。不以爲嫌。非孝其孰能就此。公之從學於性齋許文憲公也。大夫人以其遠且弱難之。公婉辭以得請。及歸以深衣緇冠等來。盖自是婚祭之間。井井有條理矣。公能幹家。晩年頗裕。其所事母夫人者。甘旨無闕。而二母家及妻黨婦黨。皆爲致祭田。金氏無主嗣。公爲之立後。至居室什物。皆與致力焉。於二弟則思厚於己。以豫親志。旣而委家事於弟。而自屛於文山精舍。嘯歌講誦。以爲終老計。東匪之難。以所居枕孔道。奉大夫人移寓三嘉峽中。居數歲。甞以事至故里。偶感疾甚。呼子弟大戚曰母老而不能終養。王母之烈而不能表于世。天乎其彰我不孝矣。乃卒丁酉五月六日也。享年六十一。葬于長峴酉坐之原。公諱洪錫字成允。其先出自慶州。始祖居明官蘇判。其後有諱日新。爲李太祖功臣。至孫諱桂蕃官主簿。始居宜寧。數傳至諱宥左承旨。生諱宗郁號和軒。有學行。於公間九世。曾祖諱源哲。祖諱機敏。考諱載鳳。外祖曰姜重欽。後母之父曰金箕悅。配順興安鼎憲女。有一男卽纘雨。二女趙俊奎,李鑽厚。纘雨三男幼。趙俊奎男鏞燮。李鑽厚男元奭。餘並幼。銘曰。
維孝孰難。曰舜騫祥。揆公所履。胡不相方。旣生之美。亦資之學。毋曰是儒。彼哉雕琢。<끝>

 

암서집> 巖棲先生文集卷之二十九> 墓碣銘

 

 

↑조부 이홍석(1838~1897/부인 순흥안씨와 합폄) 묘/1967년 경남 의령에서 이곳 수원시 이목동

    으로 이장하였다, 좌향은 자좌 오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