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안중근 의사 유묵(安重根義士 遺墨)

야촌(1) 2020. 4. 1. 10:44

■ 안중근 의사 유묵(安重根義士 遺墨)

 

안중근(安重根 : 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이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 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제569-21호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절전독(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569-25호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팔목정징(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제569-22, 23호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왼손 악지가 잘린 손을 보이고 있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모습(1862∼1927)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에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짧고

단호한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 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안중근 의사 순국 15분전 모습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공근 과 홍석구 신부(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에게 전하는 마지막 유언 장면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5분전 어머니가 지은 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모습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세의 나이로 1910년 3월 26일 여

    감옥에서 사형 으로 생을 마감하신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자 애국자이자, 당시 대한독립군 중장의 신분

    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아침 9시 도착,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 예정의 날 아침에, 불과 5m의 거리에

서 6발의 권총사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했다.


그가 6차례의 재판을 받는 중에, 왜 그를 암살했나는 질문에 15가지의 이유를 명쾌히 설명, 당시 검찰관이나

형무소 헌병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동영상에 여실히 나온다.

 

 

동양평화론은, 그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명쾌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한중일 3개국이 경제

합하고, 통화도 단일 통화를 채택하면 더욱 번성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동영상의 하부에서는 일본의 학자도,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시인한다. 이토

부미가 하얼빈에 간 것은, 한일합방과 만주 이권을 러시아와 담판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1. 보물 제569-1호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중국 당(청)  고종이 운주공예(張公藝)의 집 당호(堂號)로, 9대가 한 집에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 준 글이다.

 

 

2. 보물 제569-2호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3. 보물 제569-3호 년 년 세세 화 상사(年年歲歲花相似) 년년세세 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4. 보물 제569-4호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인용

 

 

5. 보물 제569-5호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 아기안면 화국미성유 강개 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 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 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 지

   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6. 보물 제569-6호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7. 보물 제569-7호

    용공난용 연포기재(庸工難用 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통감(通鑑)』에 자사(子思)가 위왕(魏王)에게 말한 내용에서 인용

 

 

8. 보물 제569-8호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9. 보물 제569-9호

    오로봉위필 삼상작연지 청천일장지 사아복 중시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뱃속에 담긴 詩를 쓰련다.

 

 

10. 보물 제569 - 10호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 知松栢之不彫)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시들다/쇠약해지다) 않음을 안다).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인용

 

 

11. 보물 제569-11호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임 생각 천 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12. 보물 제569-12호

      장부수사심여철 의사림위기사운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도다.

 

 

13. 보물 제569-13호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글을 배우고 예법으로 몸단속을 한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14. 보물 제569-14호(지정일 : 1972.08.16.)

      제일강산(第一江山) 폭 96.6cm × 길이 38.6cm. 원 김양선 목사 소장으로 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에 기증 함.

 

 

15. 보물 제569-15호(지정일 : 1972. 08. 16.)

       청초당(靑草塘) 37.6㎝×67㎝(가로) ×37.6㎝(세로) 민병기 소장,

 

 

16. 보물 제569-16호(지정일 : 1972.08.16.)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크기 : 74.9㎝(가로) ×39.7㎝(세로) 한중호 소장,

 

 

17. 보물 제569-17호(지정일 : 1972.0 8. 16.)

       인지당(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의 당호

      크기 : 67㎝(가로)×37.6㎝(세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18. 보물 제569-18호(지정일 1972.08.16.)

       인내(忍耐) : 안중근은 어려움을 참고 견딘 남자이다.

      크기 : 26.8㎝ × 72.1㎝,

      김성섭 소장,

 

 

19. 보물 제569-19호(지정일 1972.08.16.)

      극락(極樂) : 지극히 즐거운 곳 크기 : 68.2㎝(가로) × 33.2㎝ 강신종의 소유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되었다.

 

 

20. 보물 제569 – 20호 운재(雲齋) :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 공부하는 건물 이름의 재호를 쓴

      것임. 크기 : 67.8㎝(가로) x 32.8㎝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21. 보물 제569-21호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追悔何及)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때를 놓쳐 실기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22. 보물 제569-22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유묵 오른쪽에 증(贈) 안강

     (安岡) 검찰관이라 씌어져 있다. 이는 친절하게 대해 준 당시 뤼순법원 검찰관 야스오카에게 증정한 것

     이다. 야스오카 사후 장녀 우에노(上野)가 소장하다가 1976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거쳐 남산 안중

     근의 사기념관에 기증했다.

 

 

22. 보물 제569-23호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의사를 경호했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天葉十七)에게 써 준 유묵이다.

 

     제대 후 지바는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하여 이 유묵을 일본에 가지고 가 사진과 함께 정성으로 모셨다.

     그의 사후 미망인과 양녀 미우라(三浦)가 봉안하다가 구리고마의 다이린지(大林寺)를 거쳐 1980년 도쿄 국제

     한국연구원을 통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었다.

 

 

24. 보물 제569-24호

       천여불수 반수기앙이(天與不受 反受其殃耳)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춘추』 의전(春秋義戰)의 ‘天與不取 反受其咎’(천여불취 반수기구)와 같은 뜻이다.

 

 

25. 보물 제569-25호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 蠻邦可行)

     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25.보물 제 569-26호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이다.

     2007.11월 보물지정, 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