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양산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

야촌(1) 2020. 2. 12. 22:28

■양산 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梁山 領相 李裕元 永世不忘碑)

 

1869년(고종 6)에 당시 양산군(梁山郡) 소속이던 구포면(龜浦面)이 동래군(東萊郡)에 탈속(奪屬)되게 되었다. 양산군민들이 양산군으로 환속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사림 우석규(禹錫奎)·서상로(徐相魯)·이기수(李基洙) 세 사람이 직접 한양에 가서 임금을 배알하고 향론을 아뢰도록 선정되었다. 막상 한양에 올라갔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임금을 배알할 가망이 없었다.



세 선비는 남산 봉수대에 봉화를 올려 임금께 알리려 했는데, 결국 의금부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봉화를 올린 사연을 말하자 당시의 영의정 이유원(領議政 李裕元)이 삼인의 의기를 가상히 여겨, 봉화한 사건을 면책하고 구포면을 양산군에 환속하도록 조치했다.

 

향민들이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세 비석을 세웠는데, 영의정과 복설(復設) 당시의 군수와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를 기린 비이다. 세 선비는 관직이 없어 영의정의 비석 뒷면에 이름만 병기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한 세 선비의 이야기이다. 

 

실제 비석에는 인물들의 이름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설화에는 구포를 다시 양산에 환속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지역민의 자긍심이 내포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1983년 양산군에서 발간한『내 고장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비의 구성은 비두와 비신. 비좌로 이루어져있다.

 

비두는 높이 60㎝. 너비는 102㎝. 두께 27㎝로 꽃과 구름이 새겨진 관석(冠石)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121.5㎝. 너비 54.5㎝. 두께 25㎝이고 비좌는 가로 98㎝. 세로 62㎝. 높이 7㎝의 시멘트 구조물로 되어있다.

 

비문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있고 비의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물망비(領相大監 李閤 裕元 永世不忘碑)」 적고 오른쪽에는 아! 우리 상공이시여! 끼치신 은택을 우러러 사모한다네.

 

읍이 유지되고 백성들이 생존된 것이 누구의 힘이던가(猗我相公 景仰遺澤 邑支民存 伊誰之力)라고 새기었으며  왼쪽에는  ‘호수를 잊은 물고기와 가지에 걸린 사슴꼴이 되어 고을의 백성 모두 모여 이에 한 조각 비석을 세웠다네(忘湖之魚 足+票柯之鹿 咸聚境民 玆成片石)’ 4言 詩를 새겼다.

 

또한 다른 비석과 달리 비석 앞면 오른쪽 맨 끝에   ‘상지십육년기묘십이월일립(上之十六年 己卯十二月  日立)’ 이라고 건립일을 적었고 왠쪽 맨 끝에는  ‘통훈대부양산군수겸동래진관병마동첨절제사이능화근찬(通訓大夫梁山郡守兼東萊鎭管兵馬同僉節制使李能華謹撰)’이라 하여 양산군수 이능화(李能華)가 비문을 지었음을 보여준다.

 

 

↑양산향교 홍살문을 들어가서 왼쪽편에 있다. 여러 비가 있는데 뒷줄  왼쪽에서 5번째 비다.

 

소재지>경남 양산시 교동1길 10(교동 198-2)/양산향교 내

 

 

사진 출처 >닥밭골(심충성)

 

① 領相大監 李閤 裕元 永世不忘碑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불망비)

 

    猗我相公(의아상공)   / 아! 우리 상공이시여!

    景仰遺澤(경앙유택) / 끼치신 은택을 우러러 사모한다네.

    邑支民存(읍지민존) / 고을이 유지되고 백성들이 생존된 것이

   伊誰之力(이수지력) / 이 누구의 힘이던가.

 

   忘湖之魚(망호지어) / 호수(고장)를 잊은 물고기와

   足+票柯之鹿(?가지록) / 가지에 걸린 사슴꼴이 되어

   咸聚境民 / 온 고을 백성이 모두 모여

   玆成片石 / 한조각 비석을 세웠다네.

 

  上之十六年 己卯十二月  日/1879년(고종 16) 음력 12월 일에 세움

 

  通政大夫行梁山郡守 兼 東萊鎭管兵馬同僉節制使 李能華 謹撰

  통훈대부행양산군수 겸 동래진관병마동첨절제사 이능화 근찬

 

  뒷면

  鄕約長 : 李慶球

  鄕公員 : 鄭有珏

  鄕有司 : 白東瑄

  左首 : 安平重

  行首 : 金瑀臣

  吏房 : 鄭志奎

  龜浦復設狀頭  : 禹錫奎.  徐相魯.  李基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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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行郡守 魚公 允中 永世不忘碑

 

 龜浦旣復 구포땅 이미 되찾았을 때,

 公適此土 公께서 마침 이 고을 계셨네.

 恤民牧 백성 구휼하는 牧民事 바쁘시며

 見事威武 일 처리하는 위엄 당당하셔라!

 

 敏也蒲政 민첩하시기 子路의 蒲宰 때 처럼,

 禱于桑雨 논밭에 비 내리기 몸소 비셨네.

 可語一片 한 조각 비석이 말을 전하여

 不忘千古 千年토록 잊히지 않으리.

 

 己卯 十二月  日

 時座首 崔鳳來

 行首 金瑀臣

 吏房 金達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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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行郡守 李公 能華 愛民善政碑

 界分燥濕  農土를 燥地 濕地 나누시고,

 俵莫矯球  벼 가마니를 함부로 뺏지 않으셨네.

 我能軾  우리 어진 원님 기다렸더니

 蘇雨鳧藻  오리 먹는 좋은 풀로 살리셨네.

 

永鉅  영원히 鉅鹿郡 재해 맑히시고,

普施和氣   널리 和氣 베푸셨네.

石篆  溪의 비석에, 구루山(禹廟)

        篆刻으로

以彰其惠   그 은혜 널리 널리 밝혀야 하지.

 

己卯 十二月 日

士林 李中儀

座首 安平重

吏房 鄭志奎

行首 金瑀臣

吏房 鄭志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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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유원 영세물망비(領相李裕元永世不忘碑)

 

조선말 1869년(고종 6)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慶尙道 梁山郡 左耳面) 소속이던 구포(龜浦=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지역)가 동래군(東萊郡)에 탈속(奪屬)되게 되었다. 이에 양산 군민들이 양산군으로 환속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양산의 유림(孺林)에서 우석규(禹錫奎)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경주이씨) 세 사람을 공의(公議)로 추대하여 한양[서울]으로 보내었다. 시골 선비로서 백방으로 주선해도 임금을 배알 할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남산 봉수대에 올라가서 밤에 봉화(烽火)를 올려 결국 의금부(義禁府-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로 잡혀갔다.

 

세 사람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구포(龜浦=左耳面)가 오랫동안 양산군 소속인데 인부족(人不足) 세부족(勢不足)으로 동래 쪽에 빼앗겼으니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의 영상(領相=領議政) 이유원(李裕元) 대감에게 보고되자 영상은 세 사람의 의기(義氣)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 봉화 사건을 면책하고 1875년(고종 12)에 구포(좌이면)를 양산군에 환속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향민(鄕民)들이 영상 이유원 대감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 물망비』이다. 다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한 세 선비는 관직이 없어 영상대감의 비석 뒷면에 이름만 병기(倂記)했다.

 

이 비석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91번지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입구 국도변에 세워져 있다가 지금은 양산시 교동 1길 10(교동 198-2), 양산 향교 앞 비석 군에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비두는 높이 60㎝. 너비는 102㎝. 두께 27㎝로 꽃과 구름이 새겨진 관석(冠石)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121.5㎝. 너비 54.5㎝. 두께 25㎝이고 비 좌는 가로 98㎝. 세로 62㎝. 높이 7㎝의 시멘트 구조물로 되어있다. 비문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있고 비의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영상대감 이합 유원 영세 물망비(領相大監 李閤 裕元 永世不忘碑)」라고 적고 오른쪽에는 「아! 우리 상공이시여! 끼치신 은택을 우러러 사모한다네.

 

읍이 유지되고 백성들이 생존된 것이 누구의 힘이던가(猗我相公 景仰遺澤 邑支民存 伊誰之力)」라고 새기었으며 왼쪽에는 「호수를 잊은 물고기와 가지에 걸린 사슴 꼴이 되어 고을의 백성 모두 모여 이에 한 조각 비석을 세웠다네(忘湖之魚 足+票柯之鹿 咸聚境民 玆成片石)」라고  4언시구(四言詩句)로 구성되어 있다.

 

또 앞면 오른쪽 맨 끝에「상지십육년기묘십이월일립(上之十六年 己卯十二月 日立)/1875년(고종 12) 12월 일」이라고 건립 일을 적었고 왼쪽 맨 끝에는「통훈대부 양산군수 겸 동래 진관 병마동 첨절제사 이능화 근찬(通訓大夫梁山郡守兼東萊鎭管兵馬同僉節制使李能華謹撰)」이라 하여 근립 당시의 양산군수 이능화(李能華)가 비문을 지었음을 보여준다.  <끝>

 

[참고문헌]

 

『내 고장 전설』- 1983 양산군청

『부산북구향토지』- 2014 부산 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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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들이 세 비석은 구포를 되찾았다는 뜻의 구포복설비(龜浦復設碑)라고 한다.

① <영상대감 이유원 영세불망비>는 구포를 양산군에 복원 조치한 영상대감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이며

② <군수 어윤중 영세불망비>는 복원될 때 군수의 공덕을 기린 것이고

③ <군수 이능화 애민선정비>는 비석을 건립할 당시의(1879년) 군수 공덕을 기린 것이다.

      이 세 비석은 양산의 내원사 입구 국도변에 세워져 있다가 현재는 양산 향교 앞으로 옮겨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출처 >부산 북구 향토지-2014 북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