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암 이병헌(眞庵 李炳憲)의 行蹟
글 : 후손 이한영 l 2008. 10. 20. 17:52
이병헌[李炳憲. 1870(고종 7)~1940] 公의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진암(眞庵), 백운산인(白雲山人). 公은 20세기 초엽에 유교 전통의 사회 체계가 붕괴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유교를 종교적 조직으로 재 건립하기 위한 공교(孔敎) 운동을 전개하고, 공교의 이념적 체계를 추구하는데 일생의 심혈을 기울였던 금문경학자이며, 종교사상가요, 종교 운동가라 할 수 있다.
공의 한국 근대 사상사 속에서 차지한 위치와 성격을 특정 지워본다면,
첫째, 공은 중국 강유위(康有爲)의 공교사상(孔敎思想)과 금문학(今文學)을 철저하게 수용하여 강유위의 사상체
계를 한국 근대사에 제시한 인물이다.
둘째, 공의 공교운동과 이념적 인식은 유교를 종교적 조직으로 파악하고 구성함으로써 유교의 종교화를 관철한 인
물이다.
셋째, 공의 공교운동은 당시의 보수적 유림들에 거부당하고 배척받으면서 일제치하 조선 사회의 유교전통을 개혁
하여 새로운 유교조직화를 시도하였던 개혁주의자이시다.
公도 그의 사상적 형성과정에서 청년기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는 한편, 면암 최익현선생을 만나 시국과 학문을 논란하기도 하였다. 또 호남의 노사 계통의 학자들과도 교류가 있어 당시 당색에 따라 교류하였던 일반 유림들과는 달리 파당을 초월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학연구(道學硏究)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30대초 거세게 밀려오는 서구 근대문물의 영향으로 서울의 풍색이 일변하여 가는 모습을 보고 유학도로서 이 시국을 어떻게 대처하여 나갈지 고민한 나머지, 수구배신(守舊排新=옛것을 지키고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것) 만으로는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는 의식전환을 가져온다.
이때부터 안목을 해외로 돌려 서양역사의 철학서적을 구입하여 통람하고 청국의 <무술정변기>를 읽고 청일전쟁 후 동아대국의 변천을 깨달았다. 또 강유위와 그의 변법사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한편, 1905년 한. 일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자 일본당국에 그 부당성을 항의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소 아끼고 재질이 특출한 동생을 서울에서 신학문을 수학케 하고, 자신도 장차 해외에 나갈 뜻을 품고 서울에서 영문을 익히며 또 미국인 알렌이 상해에서 발행하는 <만국공보>를 사서 읽으며 국외의 새로운 지식을 넓혀간다.
국권을 상실한 다음해인 41세 때부터 오인(吾人)의 최대급무(最大急務)는 교육에 있음을 깨닫고 교육에 헌신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와 사립교령(令)의 제한이 엄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 박은식, 손병희 등을 만나 서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면서 울분을 삭히고 탄식하였다. 45세시 정월에는 마침내 오랫동안 꿈이었던 서유(西遊)의 길을 떠난다.
北京에 도착하여 20여일을 머물면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공교회(孔敎會) 등을 방문하여 그곳 명사들과 교류하는 한편, 공교회 잡지를 통하여 중국의 유명한 인사들이 공교는 종교가 아니며 공자는 종교가가 아니라는 이론에 대한 논란을 보고, 기독교와 대비하여 「儒敎는 宗敎와 哲學이 合一한다는 宗敎哲學合一論」 일편을 써서 유교가 미신을 배제한 무상의 종교임을 역설한다.
그 후 北京을 떠나 곡부(曲阜)에 가서 노오부(老五府)의 공태사(孔太史)를 방문하여 평생의 경앙처인 성묘와 성림을 배알하고, 공문의 여러 노성한 선비들로부터 각별한 예우를 받으면서 교분을 두터이 하여 이후 많은 협조를 받게 된다.
孔太史(공상림)의 주선으로 4월 하순에는 홍콩으로 가서 마침내 오랫동안 갈망하여 왔던 중국 학술사상계의 제1인자인 남해 강유위(康有爲 : 1858~1927) 선생을 만나 도중에 쌓인 생각들을 토로하며 환담하였다. 공은 이후부터 12년간 5회에 걸쳐서 중국을 내왕하면서 강유위선생을 수십 차례 만나 시국과 유교에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하고 지도와 격려를 받는다.
공은 이미 30대 초반에 정주학(程朱學)을 위주로 한 재래의 도학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을 알고 유교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왔으며, 강유위 선생을 만나 많은 논난(論難)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유교개혁의 방향을 정립하고 실천하는데, 그 내용은 유교의 복원과 종교화였다.
복원이란 유교를 공자의 정설인 금문경학사상(今文經學思想)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유교경전(儒敎經傳)은 역사적 전수과정에서 왜곡과 변질이 있어 공자의 참다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춘추공양전의 삼세진화설(역사발전 3단계 설 거란, 승평, 태평) 이나 예기, 예운의 대동설 같은 개혁적이고 진보적 사상이 담겨져 있는 今文經學思想은 오랜 세월 채용되지 못하고 침회(沈晦)되어 왔다.
강유위 선생과 접촉에서 今文經學은 孔子의 진경(眞經)이며 현시대의 지도사상으로 적합함을 깨달은 공은 이를 발양(發揚)하기 위하여 온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今文經學說을 주장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게 된다.
公이 이룩한 금문오경(今文五經)의 저술은 고문학(古文學) 일색인 한국철학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일일뿐 아니라, 중국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학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될 것으로 평가되며, 또한 강유위 선생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大敎의 흥・폐는 君의 앞에 놓여 있으며, 금일 동방의 신유교는 군으로부터 시작 된다’고 격려하는 한편, 중국에 사람이 많으나 仁弟와 같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고, 大地에 孔敎가 있는 날 仁弟의 저술이 流行하는 날이라 하여 극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최근 국내학계에서도 여러 학자들이 공의 학문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여 여러 편의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다음은 2003년에 출간된 서울대학교 금장태 교수의 저서인 <유교 개혁사상과 이병헌>에 기술된 내용과 1990년 대만에서 개최된 국제학술 논문집에서 발췌한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본다.
“이병헌이 今文經學을 국내에 도입하고 개혁하는 데 혁신적 역할을 하고 독보적 지위를 지녔던 만큼이나 그의 금문경학은 그 동안 후학 자들에 의해 계승되거나 확산되지 못한 체 무관심속에 파묻혀 있었다. 다만 최근에 이병헌의 시경주석을 검토하면서 그의 금문경학이 지닌 개혁적 성격을 들판에 일어난 작은 불길에 비유하여 그 자체는 맹렬하지도 뜨겁지도 않지만, 오래지 않아 그 불길이 들판을 태울 것이요,
조선시대 학문조류를 완전히 개혁하여 변하게 할 것이니 이 점이 이병헌의 시경공학고의 최대 공헌이라 할 수 있다는 논평이 제시되었던 일이 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사상사에서 그의 금문경학 연구가 지닌 혁신적 성격을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병헌은 한국근대사상사 속에서 강유위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조선후기의 극소수 실학자들에 의해 고증학적 경전해석이 시도되었지만, 여전히 주자학의 경학이 지배하는 한국사상계에서 공약학파 금문경학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었다.
한국 경학연구사에서 혁신적 관점과 이론으로 경학의 체계를 정립하였던 경우를 들어보면 17세기 후반 윤휴(尹鑴. 호는 白湖)의 고학 적 경학과 19세기 전반 정약용(茶山)의 실학적 경학, 그리고 20세기 전반 이병헌 (眞庵)의 금문경학적 경학이 근세의 한국경학사에서 가장 혁신적 변형을 일으켰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병헌의 금문경학은 우리시대의 경학연구에서 새롭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경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크게 기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한편 유교의 종교화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대역(大易)의 신도설교지의(神道說敎之義)를 들어 유교(儒敎)의 종교(宗敎)성을 천명하고 유교를 공자교로 하여 공자를 배천의 교조로 독존할 것과 교당을 세우고 今文經學을 번역하여 교사로 하여금 널리 천하에 전포케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하여 1923년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 배산서당(培山書院)을 창건하고 중국 곡부의 공자묘(사당)에서 성상(聖像)을 봉환하여 문묘에 안치하고 이곳을 유교 개혁의 본산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당시 보수적인 유림의 반대에 부딪쳐 크게 떨치지 못하고 지금까지 매년 석존의 예만을 올리고 있으며, 이곳은 오늘날에도 그 필요성이 절감되는 유교개혁의 정신이 생생하게 어리어 있는 곳이다.
이 배산서당의 창건에는 국내의 완고한 유림들과는 달리 해외의 신진동포, 특히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강유위 선생을 위시한 중국의 여러 학자들과, 그리고 곡부의 연성공부 및 공문(孔門)의 여러 석학들이 많은 지원과 찬성을 해 주었으며, 특히 김구(金九) 선생은 제3차 중국 방문 중에 있는 공에 대해 친일 그 두라는 밀고가 들어왔다 하여 1920.4.1-4.8일까지 공을 연금하여 혹독한 조사를 하였으나 모든 것이 오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단정하고 당시 유교를 매도하는 분위기였던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은 공의 유교개혁사상을 접하고부터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후 김구선생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며, 공의 유교개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연금에서 풀려난 2개월여 후에 김구 선생이 공에 보낸 편지(1920. 6. 21)중 일부를 소개하면 “선생의 이번 걸음은 장래 국가독립에 원기를 기르고 문화발전의 나침반을 갖춘 것과 같이 중요하며 우리 동방의 조교인 유교를 선생이 아니었으면 커다란 불행을 가져올 뻔 했습니다.
금일 동아일보를 본즉 소위 일 당국이 공자묘(사당)의 사설을 절대 불허한다니 이유는 경학원에서만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 경영하시는 사업에는 방해를 아니 하겠는지요”라며 염려스러운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현재 배산서당(培山書堂) 문묘에 봉안된 공자 진상(眞像)도 1923년 배산서당 낙성식에 맞춰 봉안하기 위해 공이 연성공부의 협조로 사진을 찍은 것을 김구 선생이 당시 중국의 유명한 화공을 시켜 서양기법으로 그린 것이며, 공자상과 진경을 가지고 귀국 시에는 김구, 이시영, 조완구 선생 등 수십 명의 임정요인들과 청년 단원들이 상해의 포동 항까지 나와 배에 오르는 공에 대해 정중하게 배웅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열적인 공교운동은 당시 조선사회의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강경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공은 今文經學 硏究와 저술에만 만년의 생애를 바쳤으며, 공의 문집은 중국과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인쇄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친필유고 분으로 남아 있다.
아세아 문화사에서 “진암전서(眞庵全書)”라는 표제로 1989년 상‧하 2권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82년 마이크로 필름에 수록 보관하고 있다. 또한 2003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인 금장태 박사가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이라는 표제로 저술하여 시중 서점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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