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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분단과 평화 -이재정

야촌(1) 2019. 2. 16. 17:49

파일명 : 한반도분단과평화1강20120227.hwp

2012. 02. 27. 성공회대학교

 

한반도분단과 평화 제1강

 

한반도 분단의 역사, 그 배경과 현안 

이재정/석좌교수 leejj4100@skhu.ac.kr /010-9108-3001/교수실 7711

 

1. 19세기말 이후 힘의 외교무대

 

 가. 청일전쟁의 배경과 경과

1880년대 후반 일본은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해외시장 또는 해외 거점이 필요 했고, 일본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을 타개할 필요도 있었다. 여기에 제국주의 열강들도 동아시아에서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이나 미국이나 모두 일본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러시아가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가장 두려운 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열강들이 직접 대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허약한 왕실은 동학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청군의 개입을 요청하였고, 1894년 6월 8일 청군 2,400명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은 천진조약(天津條約)1)을 내세워 일본공사관과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육해군 대부대를 파병하였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조선정부는 동학군이 왕권에 대한 도전을 자제하면서 자진하여 철군을 하였기 때문에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했지만 대륙진출을 위하여 조선을 필요로 했던 일본은 오히려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수립한 후 1984년 7월 25일에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청군을 물리치고 8월 27일에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이 다시 전면전을 벌렸으나 일본군에게 우금치전투에서 완패하고 말았다.2) 한편 1984년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성[錦州城]을 점령했으며 11월 22일 뤼순[旅順]이 점령하고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해군은 1895년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키자 결국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 (下關條約)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과 랴오둥·타이완· 펑후의 할양, 쑤저우[蘇州]등 4개 도시의 개항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 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 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서의 동맹관계를 일본으로 선택하여 러시아와의 대결구도를 강화해 가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나. 러일전쟁의 배경과 경과

청일전쟁이 일본의 완승으로 끝난 후 조선의 정국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일의 대결 속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3)

 

그리고 1899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의화단 군대와 청나라 조정이 연합하여 각국 공사관을 공격하자 8국 연합군(서양 열강과 일본)이 청나라를 공격하게 되는데, 마침내 1901년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뤼순[旅順]에 해군기지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1904년에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자 러시아는 일본에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거나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선전포고할 것이라 경고하자 이를 일본정부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개시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4)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발틱함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패퇴하면서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일본이 쉽게 러시아를 제압하였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는 극동진출을 포기하고 발칸반도로의 진출과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과의 세력 다툼을 통해 지중해 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1907년 프랑스와 손을 잡았고, 러일전쟁에서 적이었던 영국과 연합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삼국 연합을 동서에서 봉쇄하는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대결의 연장선상에서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러일 전쟁은 세계 1차 대전의 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다. 가츠라-태프트 밀약

일본의 총리 가쓰라(桂太郞 )-미국대통령의 특사 테프트(William Howard Taft) 밀약은 1905년 7월 맺어진 미국과 일본의 비밀 협상을 말한다. 그 내용은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필리핀지배를 확인한다.

 

둘째, 극동의 평화를 위해 미, 영, 일 삼국은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 라는 것이었다.  

 

이미 일본은 1904년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하여 영국은 인도를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다는 협약을 맺은바있었다. 이 밀약으로 인해 1876년 조선이 일본에 개항을 하면서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은 강화도조약 이후 1882년 제물포에서 조미 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5)은 효력이 정지되고 일본은 마침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6)

 

이 조약을 체결한 일본 측 당사자는 하야시(林) (일본특명전권공사), 한국 측에서 박제순(외부대신)이다. 조약은 5개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정부는 동경주재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며, 일본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  

 

2. 일본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책임이 있으며, 한국정부는 이제부터 일본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약속함.

 

3. 일본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일본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한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사무를 관리함이 가함.

 

4.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다 그 효력을 지속하는 것으로 함.

 

5.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7)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결국 새로운 국제관계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어 조선은 마침내 힘없이 내려앉고 말았다. 당시에 조선(대한제국)은 강화도조약 이후 1882년에는 미국 및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며, 1883년에는 중국과 “조청상민수륙장정”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며 1894년에는 이탈리아 및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본과 불법 강압에 의하여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나라를 지켜갈 수 있는 힘도 없었지만 열강의 문호개방에 대한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다.


2. 해방정국 이후 남북의 열강과의 외교적 관계

  

가. 8.15의 역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하게 1945년 8월 6일과 8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또 한편으로 8.15의 역사는 소련이 일본과의 동맹을 깨고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바로 그 다음날 만주와 북한에 진격해 들어옴으로써 일본은 항복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8.15는 일본이 전쟁에 지고 항복을 한 날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일본의 긴 식민통치의 압제로 부터 해방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국제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일본의 일부로서 패전국이었고 우리나라는 독립이나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점령”의 대상이었고 여전히 나라를 지켜갈 능력이 없어 일본의 지배가 계속 필요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이미 소련이 북한에 진군하여 점령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1945년 8월 11일 극동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하지에게 “한반도 38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전문을 타전하였다. 소련군이 그해 8월 22일에 평양에 입성하고 8월 25일에 평양사령부를 설치하자 이에 맞서 맥아더는 9월 2일 한반도를 북위38도선을 기점으로 미소양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맥아더는 더 나아가 9월 7일 남한을 미군이 점령하고 통치권은 본인이 행사하며 이를 거역할 때는 사형을 비롯하여 엄벌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9월 8일 하지장군이 이끄는 미국제24군단 제7사단을 필두로 제40사단과 제6사단이 남한의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자주권도 독립을 위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었다.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도 미국의 저지로 8월 18일 해방 후 불과 3일 만에 막을 내렸으며 자주적 정부수립을 위한 어떤 노력도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의 모진 “식민통치”가 끝나면서 더욱 절망적인 “분단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단식민통치”는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독립정부”를 만들어 냈고 이것은 곧 “국가분단”과 “국토분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남북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남북을 분할 점령한 소련과 미국의 패권쟁탈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해방 전후의 복잡한 국내 상황에서 민족지도자들의 “분열”을 말하거나 남북의 이념적 대결의 결과로 “분단”을 설명하려 하는 이들도 있는데, 분명한 것은 남북이 이미 다른 세력에 의하여 미소와 손을 잡고 분단대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의 “분단식민통치”는 손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단식민통치는 마침내 전쟁으로 이어졌다.8)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20일이 지난 1950년 7월 15일에 이승만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권을 미군에게 이양하는 소위 “대전협정”을 맺음으로써 “국가의 주권을 양도”하고 말았다. 나라의 대통령이 국권을 포기한 것이었다. (이것을 두고 후에 한국에 미군사령관으로도 왔던 리처드 스틸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말하였다.) 9) 

 

국권의 실질적인 힘이고 주권의 핵심인 군 작전권은 (평시와 전시로 따로 나누지만 실제로 전시 작전권이 실체임) 아직도 우리 손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 한미관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우리는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힘에 의해 남한 만의 단독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10) 이런 환경에서 미국의 영향 하에 종속적 입장에서 한미외교관계는 지속되어 왔다. 1953년 정전협정 직후에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 대통령의 철저한 “한반도 안보에 관한 항구적인 미국보장” 입장 때문에 1년여 넘게 발효가 지연되기도 하였다.11)

 

이후 5.16 군사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 부터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으며 이에 적극적인 한미 공조는 사실상 “절대적 종속관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자주국방, 자주외교 또는 비동맹외교를 주장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9년 12.12 사태이후 집권한 5공화국은 또다시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직접적인 한미 종속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외교문제가 되었던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개발계획 등은 완전 취소되었다.

 

1992년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외교 군사적 개혁조치로 인한 그 대가는 우리에게 IMF라는 최악의 “국가부도위기”사태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냉전의 해체와 유럽연합의 결성으로 미국의 패권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아시아 태평양각국을 유럽연합이 아닌 미국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관계를 발전시킨 과정에서도 한미관계는 여전히 북미관계의 한계 안에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권 때 작전권 환수문제는 한미 문제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주국방을 위한 토대를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은 전시작전권 환수를 대미 종속외교의 탈피와 군사주권 회복의 일환으로 다루면서 미국이 필요한 군사적 협력을 수용하는 양면외교를 펼쳐나갔다.

 

다. 남북은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으로서 동시가입을 하여 새로운 외교적인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것은 남북이 각각 일방적으로 주장해오던 한반도에서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입장을 벗어나 새로운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동구권의 정치적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전후하여 한국은 1990년 6월 4일 한소정상회담(노태우-고르바초프)에서 수교에 합의하였고. 1992년 8월 24일에는 한중수교를 맺은바 있어 한반도를 둘러싼 적대국간의 관계를 호혜적인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북미관계는 1994년 6월까지 북 핵 위기 속에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구체화되리정도로 고조되었으나, 6월 중순 지미카터 전 미국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평양회담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북한의 강석주 외교부제1부상과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핵 대사는 이후 중단되었던 북미 접촉을 재개하여 7월 제네바에서 제3차 북미고위급회담을 개최하였고,1994년 10월 21일에 제네바기본합의(Agreed Framework)를 채택하였다. 

 

제네바 합의에서 북미양국은 북한 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치경제관계를 정상화하고 핵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서로에 대한 공동 상응조치로 이루어진 이 합의문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위협과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보장을 해주기로 했으며, 북한의 흑연감속로(graphite-moderated reactor)를 대체하는 2기의 경수로(light-water reactor)를 제공하는 문제를 주선해 주기로 했다.

 

또한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로 인한 에너지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북한에 공급해 주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자신들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의 회원국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안전담보협정(Safeguards Agreement)의 규정을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또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 사이에서 합의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단계적 이행과 남북회담의 시행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 및 일본과 함께 다국적 컨소시움인 케도(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를 설립하고, 제네바 합의의 실질적 이행에 들어갔으며, 북한역시 기존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였다.12)

 

그러나, 제네바합의는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북미간의 논란 끝에 붕괴되었다. 미국은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프로그램을 진행시켜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며 중유공급을 중단시켰으며, 북한 역시 미국이 합의에 규정된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거부하면서 동결된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시켰다. 이를 계기로 1994년의 제네바 합의는 실질적으로 폐기되고 말았다.13)

 

이것을 다시 살려낸 것은 2000년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고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하여 각각 클린턴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하여 미사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현안에 대해 의견접근을 이룬 것이다.

 

구체적으로 조명록 방미 시 양국은 평화체제 전환 및 자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 경제교류협력, 미사일문제, 제네바합의문의이행, 인도주의문제, 반테러입장, 남북대화 등 대부분의 현안을 언급한 북-미 공동콤뮤니케를 2000년 10월 12일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는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문제, 미사일개발, 외교관계개선, 한반도 긴장완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클린턴대통령의 방북 등에 대해서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미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미국 내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 속에서 결실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북·일 관계는 1990년 9월 가네마루(金丸)의 방북과 3당(자민당, 사회당, 노동당) 선언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기를 만들었다. 3당 선언은 일본의 대북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3당은 양국 간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국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인정 한다”고 표명하고 있다,

 

둘째, “3당은 일본이 36년간 조선인민에게 준 불행과 재난, 전후45년 간 조선인민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 북한에게 충분히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 선언에서 조선식민통치에 대해서 일본이 북한에게 정치적·도의적 차원에서 사죄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이 이루어진 이후 북·일 양국은 1991년부터 2년간 도합 8차례에 걸쳐 수교를 위한 정부 간 교섭을 진행시켰으나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이 교섭과정에서 양국은 양국의 기본문제와 보상 문제 그리고 핵 문제를 비롯한 국제문제 그리고 이은혜의 신원확인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접근을 시도하였지만 근본적인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그 후 양국은 7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교섭을 재개할 수 있었으나 역시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 마침내 북미, 남북의 관계개선 등의 계기로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가 역사적인 방북을 하고 정상회담을 통하여 “평양선언”을 합의 채택하였다.  

 

2002년의 평양선언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고이즈미 수상에게 전후처리 문제 및 납치문제 등에 관해 전격적인 양보를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북일 수교에 대한 기본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이후 일본인 납치문제가 일본내부여론에서 악화되면서 일본정부가 합의사항을 지키지 못하면서 북일 관계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일본이 6자회담의 합의사항인 9.19합의사항이나 2.13합의사항의 이행에 있어서도 가장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북·중 관계를 중국 측은 “역사적동반자”관계로 말한다. 이 역사적 배경에는 북·중관계가 단순한 “우방”으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1945년 이후 국공내전(국부군과 인민해방군간의 내전)과정에서 인민해방군이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국부군을 이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당시 동북삼성에서 중국인민해방군(중공군)에 참전한 조선인의 숫자는 63,000여명이었고 연변에서만 35,000여명이 참전을 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만주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북한지역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후방기지를 만들어 훈련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7년 당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의 숫자는 대체로 5만~7만5천에 이르렀고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 주둔하였으며 이 군대가 1948년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부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열세였던 전세를 완전히 뒤집고 마침내 1949년 1월 31일 북경에 입성한 후 10월에는 광저우를 그리고 11월 30일에는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까지 함락시켰으며, 12월 27일에는 국민당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청두(成都)에 입성함으로써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내몰았다.14)

 

따라서 북한은 중공군이 국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지원을 하였고 중국공산혁명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이것이 모택동-김일성의 단순히 공산혁명의 동지적인 연대만이 아니라 북·중간의 “역사적 동반자”관계의 기초가 되었다.15)

 

이런 배경에서 1950년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택동(毛澤東)은 1950년10월25일 막대한 중화인민군지원군을 한국전선에 파병하였으며 중국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한 휴전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은 1953년 9월 1일~29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조·소 경제기술 원조협정”을 맺었고 같은 해 11월 10일~27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여 “조·중 경제문화합작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61년 7월 6일에는 소련과 “조소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7월 11일에는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북한이 1963년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현대 수정주의자로 비판하면서 심지어 “사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세계 공산대회 소집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 속에서 지도력을 키워나갔고 다른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나갔다.

 

북한은 1975년 4월 8일에는 유엔총영사관을 개설하는 한편 1977년 11월 14일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에 가입하였고 1975년 8월 25일에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16) 북한은 1990년대 이후 남북 간의 대화는 물론 수교협상을 위한 북미대화와 북·일 대화를 강화하면서 6자회담을 통한 협상과 함께 핵 개발 등을 통한 국제사회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온 것은 1940년대 후반 국공전쟁에서 북 공간의 이룩한 탄탄한 “역사적 동반자”관계가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

 

3. 한반도 분단을 둘러싼 외교적 현안과제

 

필자는 외교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나간 역사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외교적인 사례를 살펴보았다. 19세게 조선이 문호를 개방할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큰 틀에서 본다면 우리의 국제외교관계는 여전히 제국들의 이해관계에서 끊임없이 오류를 범하였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배경에는 분단이라는 상황이 한미공조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국내외적으로 “불합리한 제약”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념적인 대결도 민주주의의 실현도 대외 경제적 협상도 모두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 근대사의 억압적인 “문맥”에서도 해방될 수 없었다.

 

해결의 길은 없는가. 이제 북한-러시아(소련)-중국 이라는 북방대륙세력과 남한-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남방해양세력간의 냉전대결의 프레임을 벗어나 지역적 협력을 강조하는 지역공동체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안보 공동체, 경제공동체 또는 지역문화공동체를 구상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남북관계의 완전한 기반을 만들고 국제사회에서 “균형외교”를 통하여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반도 현안과제를 둘러싼 외교에서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일까.  분단이 다시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외교와 한중외교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균형적인 외교의 틀을 만들어 갈 것인가.

 

특히G2의 새로운 세계패권경쟁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국지적인 상황을 넘어 세계적으로 경제적 파탄을 몰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경제구조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도 단순히 국익의 손익계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평가를 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0~2007년에 이루어진 남북관계 발전을 이어갈 수 있도록 2013년 이후를 바라볼 때 남북대화 또는 남북관계는 어떻게 구상할 것이며, 이것이 국제외교무대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직도 우리의 국내외 상황을 제약하고 있는 종전문제, 전작 권 문제 그리고 정전협정의 대체문제 등은 우리의 외교활동에 어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북핵문제의 해결은 과연 북미관계의 정상화로 가능한 것인가라는 문제와 한반도 비핵화는 현실성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이제 2012년은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모두 국가권력구조를 변화시키는 해이기 때문에 2013년은 위의 과제들을 놓고 새로운 구상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전제는 화해와 균형 그리고 공동번영이라는 가치를 통하여 경쟁보다는 협력,  군사적 대결 보다는 경제적 협력을 통한 평화를 달성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남북이 동북아를 화해와 협력의 단계를 넘어 통일시대의 구체적인 평화체제를 이룩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이 남북 정부의 외교적인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초는 다시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의 충실한 이행을 통하여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1994년 제네바기본합의와 2005년 9.19공동선언의 실천이 여전히 유효하게 한반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외교적인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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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5년의 톈진협정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관련하여 조선에서 청 · 일간의 양국 군대의 철병을 약속한 것

 

2) 이 당시의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가 장렬한 전쟁을 하였는데, 동학의 다른 입장이었던 김개남장군이 이

   끄는 정예군은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3)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러시아 편으로 돌아선 것으로 해석되었다.

 

4) 한반도의 분단은 1904영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결 속에 러시아가 북위 39선으로 분단통치를 제안하였고 1945년에는 미국의 극동사령관 맥아더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분할통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5) 미국과 조선이 맺은 통상조약으로서 강화도조약이후 미국이 압박을 가하여 맺은 불평등조약. 조선의 특명전권대사인 신헌과 미국의특명 전 공사인 Robert W. Shufeldt가 제물포에서 조인한 14조의 통상조약. 그 주요 내용은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의 한 개체로 인정하고 공사급외교관을 상호 교환한다. 치외 법권은 잠정적이다. 관세자주권을 존중한다. 조미양국 국민은 상대국에서의 상업 활동 및 토지의 구입, 임차(賃借)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영토권을 인정한다. 조미 양국 간에 문화학술의 교류를 최대한 보장 한다.

 

6) 이 조약의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인데 이미 1904년8월22일에 재정과 외교부문에 고문을 둘 수 있도록 한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제1 한일협상조약이라고 하기 때문에  을사늑약을 제2 한일협상조약이라고도 한다.

 

7) 그러나 이것은 강제와 협박에 의해, 그것도 각료의 형식적 의결만 거쳐 이뤄진 것이다. 고종의 서명도, 공식명칭도 없었다. 이렇게 최고 주권자의 승인도, 서명도, 명칭도 없었으니 법 절차상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고 국제법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었다.

 

8) 한국전쟁은 아직도 이름이 분명치 않다. 처음에는 “동란”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사변”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히는 중요하다.  필자는 이 전쟁은 제2차 대전을 끝내면서 이어진 “여진”과 같은 국제 전쟁이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바에 의하면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존하는 의무가 있으 며 국가의 안정을 책임을 지고 국군을 통솔할 권한이 있다.

 

10) 우리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주장하는 것은 유엔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통하여 수립한 정권이라는 점에서 옳은 견해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선거가 가능한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인정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남북대화를 가능하게 열어갈 수 있는 전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독일에서 서독헌법이 규정하는 바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11)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 C,에서 대한민국의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의 서명을 거쳤지만, 이후 비준서 교환은 여의치 않아서 결국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하였다. 전문과 6개조로 이루어진 상호방위조약 가운데 제6조가 문제였다. 제6조는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이승만은 이 조항이 불만이었다. 이승만은 '무한정'을 요구했고, 미국 측은 미·필리핀상호방위조약에 유효기간을 정한 규정이 있음을 들어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12) KEDO는 2007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3)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한길사, 2003 참조  제네바기본합의를 제대로 이행하는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북미관계가 악화된 것은 2005년 9.19공동선언이 합의된 후 곧바로 이행시도도 못한 채  몇 년을 지나야 했던 BDA 문제제기와 중단유형이 비슷하다.

 

14) 당시 국부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하고 있었고, 병력이나 장비 면에서 중공군에 월등하였기 때문에 1946년 국공합작이 깨지고 전투에 들어갔을 때는 국부군이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하였다.

 

15) 모택동은 1949년10월1일 북경에서 중화임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16) 남한의 가입은 부결되었다.

 

17) 2010년 북한이 원심분리기 시설을 개방하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 등의 제제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이명박 정권의 5.24조치 이후 북중무역량의 변화를 보면 압박과 제재의 수단들이 무력했음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