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한당 이공 묘갈명 병서(閑堂 李公 墓碣銘 幷序) - 24世

야촌(1) 2018. 11. 25. 22:22

한당공 이곤 묘갈명 병서(閑堂公 李鯤 墓碣銘 幷序) - 24世

◇생졸년 : 1484년(성종 15) 7월 7일 ~ 1537년(중종 32) 12월 25일 = 향년 54歲

 

동종 후예 이종락 찬(同宗後裔 李鍾洛 撰)

 

아!

사람이 고통과 역경을 당하면서도 덕을 힘쓰고 학문을 힘쓰며 은미함도 알고 나타남도 알아서 마침내 선대를 빛내고 후손을 감싸서 좋은 이름이 세상에 장구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상구(上九 : 착한사람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임)요. 만인의 신망인 것이니 한당(閑堂) 이공 같은 분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공의 휘는 곤(鯤)이요. 자는 도남(圖南)이요. 한당(閑堂)은 그의 호이다. 이씨는 경주(慶州)에 본관한지가 가장 오래되고 현달한 것이다. 신라의 대신 휘 알평(謁平)은 시조요. 고려에 휘 핵(翮)은 벼슬은 상서복야(尙書僕射)이고 호는 열헌(悅軒)이요.

 

휘 진(瑱)을 낳으니 호는 동암(東菴). 시호는 문정(文定)이요. 익재(益齋) 선생 휘 제현(齊賢)은 시호는 문충(文忠). 문장 도덕으로 성명(姓名)이 온 누리에 전파하였으니 보록(譜錄)이 없어도 알 것이다.

 

그의 아들 휘 달존(達尊)은 직제학(直提學). 휘 덕림(德林)은 지 여흥군사(知驪興郡事)로 태조(太祖)로 더불어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공신에 녹훈되었고 휘 신(伸)은 제주도안무사(濟州道安撫使)이니 공의 사대 이상이다.

 

증조의 휘는 계번(繼蕃)이니 낙안군사(樂安郡事)요. 할아버지의 휘는 윤인(尹仁)이니 삼도(三道 : 강원. 전라. 평안) 관찰사요. 아바지의 휘는 공린(公麟)이니 창평현령(昌平縣令)이요. 어머니는 순천박씨 이니 박 취금헌(朴 醉琴軒) 팽년(彭年)의 따님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음덕이 있어 여덟 자라를 꿈꾸고 여덟 아들을 낳아 모두 이름이 있음으로 사람들은 순씨(荀氏)의 팔용(八龍)에 비하였으니 공은 그 중에서 막내이다.

 

출생하면서 체국(體局=體貌)이 석대하고 재지(才智=재주와 지혜)가 뛰어나서 엄연히 친압(親押=옛날 임금의 수결)하지 못할 기상이 있었다.

 

문재(글을 짓는 재주나 솜씨)가 조달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학천(學薦=학문이 높은 사람을 추천하는 일)으로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어용(御用)을 위하여 말(馬)을 기르는 관공서의 從五品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고향의 적막한 곳에 은거하여 詩와 술과 고기 잡고 사냥하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었다.

 

아버지 창평공(昌平公)의 장인(丈人=아내의 아버지) 박 취금헌(취금헌 朴彭年)이 사육신에 연좌되어 근 30년을 고폐(錮廢=관직을 삭탈하고 종신토록 관리로 등용하지 않는 것) 당하였다가 성종(成宗=조선 제9대왕) 임인년(壬寅年=1482년 성종 12)에 어머니 홍씨의 절행으로 특별히 정려(旌閭)하고 그의 아들들을 서용(敍用=죄가 있어 벼슬을 박탈했던 사람을 다시 임용함)하기를 명하여 함열(咸悅=전북 익산지역의 옛 지명). 창평(昌平=전남 담양지역의 옛 지명) 의 현령(縣令=오늘날 읍의 수령으로 從五品 벼슬)에 나가게 되니 특수한 은전이다.

 

얼마 있다 공의 여러 형제가 모두 대, 소과에 용두(龍頭=大科 급제를 말함) 연방(蓮榜=小科에 합격한 명부)으로 잇달아 급제하니 가문의 경사가 다른 씨족으로서는 바랄 수 없었다.

 

연산조(燕山朝) 무오년(戊午年, 1948년 연산군 4)에 이르러 중씨 재사당(再思堂) 원(黿)이 김점필재(金 佔畢齋=金宗直을 말함) 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에 걸리어 갑자년(甲子年=1504년 연산군 10)에 사형(死刑)을 받고 아버지와 형제 모두를 연좌시켜서 귀양 보냈다.

 

중종이 반정되자 신원(伸冤) 복관(復官)하고 귀양 간 이를 모두 석방하였으나 그러나 세변과 가화가 연거푸 번복되어 사람의 정리로서 감내하지 못 할일이니 공이 영귀를 얕보아 훌쩍 멀리 뛴 것이 또한 마음의 결정적인가 보다.

 

봉자(鳳子). 인손(麟孫=훌륭한 자손)에 미치어 도학을 천명하여 세상에 거유(鉅儒=큰 선비 즉 대학자)가 되고 가업을 확장함으로서 백대 후에도 사람들은 수락동(水落洞) 이씨를 칭찬하며 감탄하고 추모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공의 음덕에 미친 바요.

 

전에 굴함이 장래에 편 것이니 아! 성대하도다. 중종(中宗)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 12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탄생한 성종(成宗) 갑진년(甲辰年, 1484년 성종 15) 7월 7일을 계산하면 향년 五十四歲이다.

 

묘는 수락동(水落洞) 국내(局內=묘역 안) 계좌(癸坐=북동쪽 방향/正北에서 동쪽으로 15도를 중심으로 한 각도 안의 방향을 말함) 언덕위에 있고 뒤에 가선대부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겸직은 비례에 준하였다.

 

초취(初娶)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宋氏)니 소생(所生=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고 재취(再娶) 부인은 덕수이씨(德水李氏)니 진사(進士) 규(葵)의 따님이다. 성종(成宗) 계축년(癸丑年. 1493년 성종 24) 정월에 출생하여 중종(中宗) 을미년(乙未年.1535년 중종 30) 9월 22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공(公)의 묘와 쌍분(雙墳)이다.

 

6남 3녀를 낳으니 맏이 혼(渾)은 진사(進士)인데 무후(无后=자식이 없음)하고 정(淨)은 진사요. 호는 풍계(楓溪)로 문장이 사람을 경동(警動=깨우쳐 단속하고 격려함)하였고 징(澄)은 생원(生員)이요.

 

잠(潛)은 진사니 태학(太學=중앙교육기관) 천거(薦擧)로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문도(門徒=제자)를 가르치어 인재를 양성하니 섬계(剡溪) 문인록(文人錄)이 있고 심(深)은 참봉(參奉)이요. 다음은 흡(洽)이요. 또 하나의 아들이 있으니 장(漳)이요. 딸은 진사 김진양(金震楊)과 김담(金霮). 류경방(柳景芳)이요.

 

손자(孫子)에 충윤(忠胤)은 참봉이요. 효윤(孝胤)은 진사(進士)요. 다음은 의윤(義胤)이니 둘째 아들 소생이요. 사윤(思胤)은 부호군(副護軍=,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사품 무과벼슬)이니 셋째아들 소생이요.

 

넷째아들 소생에 득윤(得胤)은 은일(隱逸=은거하는 학자로서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사람. )로 사헌부(司憲府=관리들을 감찰하는 관청) 지평(持平=正五品). 공조. 형조의 정랑(正郞=6조의 正五品 벼슬)인데 성리서를 연구하고 역학(易學=주역)에 조예가 깊어 학자들이 서계(西溪) 선생이라 칭하였으며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되고 광윤(光胤)은 문과에 급제 교리(校理=正‧從五品)로 임진란에 의병을 일으켜 공로가 있으며,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창윤(昌胤)도 진사요. 딸은 홍순각(洪純慤)이니 문과 급제로 군수(郡守)요. 다음은 정방(鄭방)이요. 다섯째아들 소생 정윤(貞胤)은 참봉이요. 다음은 청윤(淸胤)이요. 딸은 양인(梁認)이요. 여섯째아들 소생은 정윤(禎胤)이요. 증손(曾孫). 현손(玄孫)은 기록치 않는다.

 

아!

도(道)는 헛되이 나지 않고 경사(慶事)는 마구 모이지 않는 것이다. 대개 방이 비면 밝음이 나고 구렁이 깊으면 물이 담기는 것은 종류로 모음이 필연적이다.

 

저들이 진출만을 바라고 요행수를 구하여 자손에게 위험을 남겨주는 이가 비록 한 때에 떨침은 있으나 발자욱과 길바닥에 고인 물 같아서 그에 마름을 서서 볼 것이다.

공(公)의 축적함이 근본이 있어 선대를 계승하고 향기로운 혜택이 무궁하여 자손을 감싸주는데 비하면 고하(高下)와 청탁 대체 어떠한가?

 

종락(鍾洛)이 여기에서 마음의 충격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공(公)의 묘(墓)에 옛 묘표(墓表)가 있었는데, 세대가 이미 멀어짐에 돌이 완결되어 일지 못하겠음으로 후손 종찬(鍾瓚)이 새롭게 바꾸려 종락(鍾洛)에게 묘갈명을 부탁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이는 문단에 권위 있는 이의 해당한 일인데, 아! 현대가 횡서(橫書=문자를 옆으로 쓰는 글씨)로 번국 되어 세상에 자운(子雲=중국 전한 때의 문장가) 같은 이가 없으니 어찌 무관심 할 수만 있겠는가!?

 

감히 가승(家乘=한집안의 역사적 사실을 적은 책)에 기록된 바로서 바로잡아 은괄(檃栝=속세를 피하여 혼자 지내면서 품고 있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서차하고 명(銘)으로 이어 이르되.

 

아! 우리 경주이씨는 동방에 빛난 성씨일세!

 

익재(益齋)께서 우뚝하게 탄생하니 문장에 주장이요. 도학에 종통이로다.

창평공(昌平公)의 자라 꿈은 상서스러운 운수가 대통하였네.

 

훌륭한 팔형제 팔난(八難=여덟 형제를 나타낸 말로 곧 이들 형제가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이라기 어렵다는 뜻)은 순씨(荀氏) 팔용(八龍)에 비하였네.

 

태운(泰運=걱정없이 편안하게 지내는 운수)이 불운(不運)과 교체함에 취금헌(醉琴軒).에 연좌되었네.

통탄스럽도다. 무오(戊午)와 갑자년 사화(史禍)에 한 집안이 흉화를 만났네.

 

공(公)은 고반「考槃=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한 현인을 말함」에 맹세하니 환로는 구름 사라지듯 하였네.

숨고 닦으니 향기로운 혜택은 풍부하도다.

공덕이 학계에 존하였으니 자손은 융성하였네.

 

옛 묘표와 새 묘갈은 유궁(幽宮=깊숙한 곳에 있는 궁전으로 분묘를 가리킴)을 빛냈지.

내 말이 아첨함이 아니요.

무궁한 후세를 밝게 보임일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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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陵參奉李公 鯤 墓碣銘 幷序 - 蘇輝冕

 

士之閼于年而猶聞于後。歷選前修。蓋無幾多。而公實有之。是遵何德。公姓李諱鯤。系出慶州。新羅佐理功臣諱謁平。其鼻祖也。于後。江陽君諱開。以罔僕於麗。貶降陜州。因居焉。此陜川氏貫籍之所由移也。至十世孫諱春啓。官戶部尙書吏部侍郞。是生牧使諱夢符。牧使生縣令諱麟祥。縣令生左司勇贈戶曹判書諱孟根。於公爲曾祖也。祖諱禮之官進勇校尉。以孝聞。考諱克恭副司直。妣光山金氏誥恭人。而生一男。卽公也。公生而聰睿絶倫。孝友天植。德業不待勉強而日進。文章不期藻華而日就。世蔭之餘。自然之勢。有宮鍾之聞而桃李之蹊。弱冠。已除獻寢郞。赴不幾日。旋卽慨然曰。學未成。余何以宦爲。乃還第遂初。益復祇慄洞屬於事親之節。沉深刻苦於性理之學。庶將明體適用。飛而盡翰。不幸三十而夭。悲夫。然而鄕邑猶稱誦之。雲仍尙齎恨焉。是遵何德。如公者。可謂不言而信者也。亦可謂入人之深者也。嗚呼。重可悲夫。配晉州蘇氏。育一男。曰時賀。時賀有三子。長光胤旌孝。次光緖。次光前。公墓在恩津南梧桐里負庚之原。孺人亦祔焉。公之諸孫。方謀樹碣。以公之孫寅植有雅于不佞。不嫌不佞之不文。謬託闡幽。不啻一再。辭不獲。略述其一二。遂爲之銘。銘曰。
懿公行治。遹追世休。孝友聰明。有操有修。弱冠郞調。旋賦初服。及時翺翔。將施大畜。奈此嗇齡。壯志莫遂。吁嗟蒭蕘。寔敬梧隧。<끝>
 

仁山先生文集卷之十五 / 墓碣銘

 

 

↑한당공 묘표-1538년에 세운 묘표

   묘의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佳陽里) 44-4

 

한당공 묘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