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정부인 경주이씨 열행비

야촌(1) 2019. 8. 28. 01:45

[한국의 여성인물]

 

가슴 뭉클한 외로운 비석하나

정부인 경주이씨 열행비(貞夫人月城李氏烈行碑)

 

울산 동구 남목 비석 골은 지금은 그 위치가 조금 옮겨졌지만 남목 1동 사무소와 남목고등학교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정부인 경주이씨열행비’가 세워지면서 '비석골'이 유래됐다고 한다.

 

『교남지(嶠南誌)』에는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열녀 14명이 소개되고 있다. 그중 경주이씨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지아비를 섬겨 가문을 빛낸 사람인데,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여성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부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주이씨(조선시대 양반집 부녀자는 이름이 없이 성만 기록하였음)는 1849년(현종 15)에 이근영(李根營)의 딸로서 울산군 동면 남목리(蔚山郡 東面 南牧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부녀자가 배워야 할 그 당시의 내훈(內訓)을 익혀 여인으로써의 도를 닦았다.

 

패백을 드릴 나이가 됨에 따라 김재환(金在環)이라는 청빈한 선비에게 시집을 갔다,

김재환은 품성이 순후하고 효심이 지극하여 온 고을이 그의 인격을 흠모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주이씨 또한 남편을 일심으로 받들고 일문의 화목에 힘써 이웃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여교(女敎)』에 말하기를 “아내가 비록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하나 남편은 아내의 하늘 인지라 아내는 마땅히 예로 공경하여 섬기되 아버지를 대하듯 해야 한다.

 

몸을 낮추고 뜻을 나직히 하며, 거짓으로 존대하지 말고 오로지 순종할 뿐 그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경주이씨는 여교의 가르침대로 남편을 일심으로 받들고 일문의 화목에 힘써 이웃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불행하게도 과거(科擧) 공부를 하고 있던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경주이씨는 이때부터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달여 먹였으나 차도 없이 병은 점점 위중하여 사경에 이르렀다.

 

최후 수단으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으나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세연이 다하여 짧은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향년 30세였다. 참으로 난감한 이 형편은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감내하기 어려웠다. 다부진 마음으로 장례를 치른 후 3년상 마치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또 칡뿌리 캐어 겨우 연명하면서도 삭망의 성묘 소분(掃墳) 등 기타 모든 상례를 정성껏 치렀다고 한다.

‘참고 견디는 것’ 그것 하나만을 좌우명으로 삼아 시련을 감내, 죽은 남편에 대한 사모의 정과 예를 극진히 할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람 마음만큼 강인한 것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하겠다.

 

예로부터 인륜도덕에 충·효·열세가지 기본강령이 있었다. 이중 정(貞)은 타고난 성품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인데, 부인이 남편을 위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였다. 이 도리를 능히 행하는 사람이 드문데 이씨는 이를 실행하였다.

 

한편 가정이 극빈한 가운데서도 자녀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고 법도대로 가르쳤다.

그는 생계를 위해 품삯 바느질을 하면서 정부인 장씨(1598년(선조 31) ~ 1680년(숙종 6)”의 『이한(離恨)』을 곧잘 읊었다고 하는데, 아래는 이를 적은 것이다.

 

누각에 삼경의 밝은 달이 내리고(樓閣三更明月下/누각삼경명월하)

강가에는 천리의 거룻배 돌아온다(江淮千里小舟廻/강회천리소주회)

만일 뱃사공이 이내 한(恨)을 안다면(舟人若解深閨怨/주인약해심규원)

태우고 간 낭군님을 태워 오련만(載去河郞更載來/ 재거아랑갱재래)

 

마침내 이런 가상한 일들이 나라에 알려져 이씨는 1899년(광무 3년) 2월 3일에 정부인(貞夫人)에 가자(加資) 되고, 남편인 김재환(金在環)은 이조참판의 벼슬에 증직(贈職) 되었다.

 

나라에서‘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표창하는 특별한 은전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1929년에 많은 선비들이 뜻을 모아 표장비를 세웠다.

 

또 그의 아들 철호가 어머니의 불후의 정절을 천양하려고 대한제국 시절 전 경상남도관찰사 이재현(李載現.1870~미상/全州人)에게 명문을 의뢰, 비문을 받았다.

 

이재현(李載現)이 쓴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경주의 먼 후예로 이런 정절부인 있었네(月城遠裔 乃有夫人/월성원예 내유부인)

시집간 김문(金門)은 본디 청빈한데(嫁于駕洛 家素淸貧/가우가락 가소청빈)

 

아 청춘에 성(城)이 무너지는(남편의 죽음) 통한을 맛보았다(崩城痛恨 在靑春)

만고 천신 고생 속에 땅을 치고 하늘을 불러본다(叩地叫天 萬苦千辛)

 

두 아들 외동딸 양육에 일신 돌보지 않고(二子一女 撫育全身)

의탁할 곳 없는 가세에 지친(至親)도 없었으니(家勢零丁 近無至親)

 

칡뿌리로 연명하며 애련(愛憐)을 되씹었네(採葛延命 哀憐幷臻)

열렬하신 그 절개에, 백발만 성성 히 돋아나고(烈烈貞操 白首惟新)

 

정려 각(旌閭閣) 열녀비에 안팎으로 빛이 난다(閣之石之 文質彬彬)

영원히 꽃다운 이름이여! 온 고을의 자랑이도다(不朽芳名 聳動鄕隣)

 

한편 이씨는 억호와 철호 두 아들을 두었으며, 철호의 아들 두천(斗千)은 방어진중학교 교감(2011년 5월 현재)으로 재직하고 있다.

 

<각주>울산동구지

 

 

↑정부인 경주이씨 열행비/소재지 :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70(서부동)

    이 경주이씨 열행비는 울산광역시 동구 서부동 626-6번지 밭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위해

     2003. 5. 1일 현재 소재지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70(서부동 522-1번지)으로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