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음악산책(월드)

[동영상]Top Of The World-카펜터스

야촌(1) 2018. 8. 6. 00:22

[오빠]Richard Carpenter.

□ 1946년 10월 15일생

□ 피아니스트. 편곡자. 작곡자. 가수

□ 유년시절 클래식 피아노를 접한 인연으로 음악으로의 인생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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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Karen Carpenter[1950 ~ 1983] 향년 33세

□ 1950년 3월 2일생

□ Richard의 여동생

□ 드럼& 보컬

□ 1983년 2월 4일 신경성 식욕부진으로 인한 심작발작으로 사망.

□ 드럼에 먼저 소질을 보이던 Karen은 오빠[Richard]의 도움으로 노래를 시작.

 

캐런 카펜터(Karen Anne Carpenter)는 미국 남매 듀오인 카펜터즈(Carpenters)의 리드 보컬로 유명한 가수다. 보컬 영역은 콘트라알토로 알려져 있고 보컬 외에도 뛰어난 드럼 실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카펜터즈 시절 드럼을 연주하며 노래도 불렀지만 가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드럼을 할 블레인(Hal Blain) 등의 세션에게 양도하고 무대에선 보컬만 맡아 앨범 이후로는 잘 연주하지 않았다.

 

오빠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rpenter)의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밴드부가 가입한 캐런은 오빠를 지도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실로폰과 비슷한 악기인 그로겐슈필을 배웠다. 하지만 캐런은 이 악기를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친구인 프랭키 차베즈(Frankie Chavez)의 연주를 보고 드럼으로 바꾸었다.

 

1965년엔 오빠 리처드의 대학 친구인 웨스 제이콥스(Wes Jacobs)와 삼인조 밴드를 결성해 밤업소를 돌며 재즈를 연주했고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베이스 주자 조 오스본(Joe Osborn) 등 여러 뮤지션들과 스펙트럼(Spectrum)이란 팀을 만들었고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음반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모두 다 거절당했는데, 당시 멤버였고 이후에 Top Of The World의 가사를 쓰는 존 베티스(John Bettis)는 대부분의 음반사들이 “회사에 손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이 때의 자료들은 조의 집이 불타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결국 듀오가 된 캐런과 리처드는 1969년 마침내 A & M사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후에 란 이름으로 바꾼 데뷔 앨범 을 발표했다.

 

캐런이 보컬과 드럼을 맡았고 리처드가 13곡 중 10곡을 만들었다. 그리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비틀즈(The Beatles) 커버 곡인 Ticket To Ride가 빌보드 싱글 차트 54위에 올랐다.

 

그러나 두 번째 앨범 부터 곧 히트 행진을 시작한다. 이 앨범에서 We've only Just Begun은 싱글 차트 2위에, 리처드 챔벌린(Richard Chamberlain)의 곡을 커버한 Close To You는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앨범은 200만장이 넘게 팔렸다.

 

세 번째 앨범 에서도 Rainy Days And Monday를 비롯한 3곡의 탑3 히트 곡을 내면서 400만장 이상을 팔아치웠고 두 번째 싱글 차트 1위곡 Top Of The World가 수록된  <A song For You>는 3백만 장 이상을, Sing과 Yesterday once More가 수록된 은2백만 장, 세 번째 싱글 차트 1위곡인 Please Mr. Postman과 Only Yesterday가 수록된 은 백만 장 이상을 판매하며 6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리처드가 향 정신성 의약품인 퀘일루드에 중독되고 나서는 공연을 자주 취소하게 되었고 이후 싱글차트 10위권 곡을 단 한곡도 배출하지 못했다. 물론 카펜터즈의 인기 하락에는 달달한 음악보다는 펑크적 경향을 선호하는 새로운 조류와 디스코의 열풍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자 캐런은 프로듀서인 필 라몬(Phil Ramone)과 솔로 앨범에 착수한다.

 

이 앨범은 성인 취향에 맞추어졌으며 디스코를 비롯한 댄스 음악에 역점을 두었고 성적인 가사를 차용했다. 하지만 음반사와 오빠의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보류되었다. A & M사는 이 음반에 든 제작비를 카펜터즈의 향후 수익에서 제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1989년 캐런이 솔로로 녹음한 일부의 곡들을 포함해 란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1996년이 돼서야 보너스 트랙이 담긴 완전한 앨범이 팬들에게 공개되었다. 앨범 제목은 다.

 

캐런은 1967년경부터 의사의 지도아래 스틸맨 다이어트란 것을 시작했다. 하루에 8잔의 물만 마셨으며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그 외의 음식도 극단적으로 거의 먹지 않았다.

 

이 다이어트를 계기로 66kg였던 카렌은 10kg 이상을 뺐고 카펜터즈가 최상의 인기를 누릴 때인 1975년 9월엔 41kg까지 빠졌다.

 

1982년엔 Now를 녹음한 뒤 거식증으로 살이 너무 빠져 치료를 받았다.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기 위해 치료를 받았지만 살은 더 빠졌고 현기증이 일었다. 거기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자 1982년 9월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선 체중을 끌어올리기 위해 급격히 체중을 늘리는 요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거식증으로 인해 쇠약해진 심장에 무리를 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2개월 후 캐런은 퇴원을 했고 카펜터즈의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공연에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당시 지인들에게 “엉덩이가 생겼어요”라고 활기차게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3년 2월 4일 캐런은 심장마비로 부모님의 집에서 3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검결과 최종 사인은 섭식 장애로 인한 심장마비였고 만성적인 질환으로 인한 악액 질도 발견되었다.

 

토큰 시럽 중독에 관한 의견도 나왔으나 명확한 흔적을 찾진 못했고 이후 리처드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캐런의 죽음으로 거식증과 과식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었고 외모 지상주의로 인한 섭식 장애로 수많은 연예인들이 이 병을 앓고 있음이 알려졌다.

 

캐런의 가족들은 거식증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는 카펜터즈 재단을 설립했고 이후에는 예술과 교육까지 지원을 넓혔다. VH1은 캐런의 죽음을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93위로 꼽았다.

 

1987년엔 토드 헤인즈(Todd Haynes)감독에 의해 영화로, 1989년엔 조세프 사전트(Joseph Sargent) 감독에 의해 TV 영화로 만들어졌다.

 

1999년엔 VH1선정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뮤지션 100명 중 29위에, 2008년 롤링 스톤지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 중 94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