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 이상설①]
베델 “신구학문 겸비 당대 제일 학자” 평가
[아시아기자협회] 2018. 07.23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19세기 말 서양선교사를 통하여 서양 수학과 과학이 조선에 들어왔다. 1883년 뮐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f, 穆麟德, 1848~1901)의 추천으로 최초의 관립 영어교육기관 동문학(同文學通辯學校, 1883년 8월)이 세워지고, 영국인 핼리팍스(T. H. Hallifax, 奚來百士, 1842~1908)가 그 해 11월에 부임하여 주도적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동문학에서는 영어, 일어, 필산(筆算)을 가르쳤다. 해관(海關) 업무를 위한 학교이므로 간단한 계산법을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도를 위하여 설립한 배재학당(1885), 이화여학교(1886), 경신학교(1886), 정신여학교(1890) 등에서 신교육을 시행하였다.
1886년 동문학을 폐교하고 이어서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English College)을 설립하였는데 이 때 호머 헐버트(H. B. Hulbert, 1863~1949)는 주도적으로 육영공원의 학제를 서구식으로 정하고, 영어, 역사, 과학, 지리, 수학 등을 1891년까지 가르쳤다.
근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고종황제는 당시 국운을 바로 잡는 길은 교육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갑오개혁(1894.12.12) 직후 1895년 2월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내렸다.
이는 쇠락하는 국운을 교육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우리나라 교육사상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역사적 사실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또 갑오경장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를 실시하면서 신교육을 실시하는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 각급 관립학교를 설치하였다.
이상설(1870~1917)의 호는 보재(溥齋)이다. 그가 신학문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5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15세는 요즘 중학생 나이지만 그는 이미 혼례를 올린 성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이 충만한 사대부 성인이었다.
이 때 매일의 학과일정 즉, 학습 커리큘럼은 한문뿐 아니라 수학, 영어, 법학 등이었다. 15세에 결혼하여 10년 동안 과거 준비를 하면서도 이미 헐버트(Homer B. Hulbert) 등과 교류하며 외국어와 서양과학 책을 구하여 학습하며 영어, 프랑스어 및 다양한 신학문을 공부했다.
이로부터 명성이 자자해져서 유학을 마친 사람들조차 다투어 찾아와서 ‘추가강론’을 듣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불교, 법률, 정치,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당대 최고 수준의 학식을 갖추었으며, 일어, 러시아어, 영어, 불어에 능통한 수재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따르면 이상설은 어려서 배운 유학의 경지가 넓고 깊어 ‘율곡을 이을 대학자’로 인정할 정도였고, 을사늑약 후 고급관리 자리를 박차고 교육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이상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독립열사 이준, 이위종, 그리고 헐버트 등을 대표하는 고종의 밀사로만 알려져 있지만, 해외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하 독립운동계의 핵심인물 일뿐 아니라, 신구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른 당대의 천재였다.
이상설의 진정한 선각자적 탁월성은 시국과 사회의 큰 전환을 살피고 곧 근대사상과 근대학문 전반에 대해서도 거의 독학으로 습득하였다는 점에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8~1953)의 회고담은 신상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이상설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상설은 결혼 후 장동에서 현재의 명동성당 북쪽(저동)으로 이사했는데, 이시영의 집과 앞뒷집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만나 친하게 지냈으므로 이시영의 회고담은 믿을만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보재(이상설)의 학우는 나와 나의 형인 회영(1867~1932)을 비롯하여 남촌 3대 재능아로 꼽히던 이범세(1874~?), 서만순, 조한평과 한학의 석학인 여규형(1848~1921) 등 쟁쟁한 인재들이었다.
나중에 대부분 정부에서 중추적인 일을 하게 된 이들 학우들 중에서도 보재는 단연 선생 격 이었기에 그 문하생도 7~8명이나 되었으니, 그와 동문수학한 사람들은 17~18명 정도에 이른다.” 박규수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모인 유길준, 박영효, 서재필 등이 1870년대를 대표하는 개화·개혁의 선두주자였다면, 이들은 1880년대를 대표하는 최정예 차세대 엘리트 집단이었다.
베델(Ernest T. Bethell)이 책임을 맡고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아래와 같이 그를 신구학문을 겸비한 당대 제일가는 학자로 평가했다. “(이상설)씨는 대한에서 학문으로 최정상급(第一流)이니, 일찍이 학문적 소양이 비길 바 없이 뛰어나서 동서학문을 독파했는데 성리문장 외에 특히 정치, 법률, 수학(算術) 등의 학문이 부강의 발판이 되는 학문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이외에도 구국계몽운동에 가담했던 이관직(1882~1972)의 <우당 이회영선생 실기>와 박은식(1859∼1925)과 장석영(1851∼1926), 그리고 중국인 관설재 등이 남긴 이상설 평설의 일관된 요지는 19세기 말 조선에서 법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이상설만이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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