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도안무사(濟州道安撫使)。이신(李伸)
생졸년 미상, 본관은 경주(慶州),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증손, 아버지는 사간(司諫) 덕림(德林)이고 어머니는 총랑(摠郞) 몽정(蒙正)의 여(女)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배위는 형부상서 최잉(崔陾)의 세째딸 경주최씨이다.
조선 태조 6년 丁丑(1397년)에 삼척진첨절제사(三陟鎭僉節制使/三陟府使 겸직)로 부임하고 태조 7년 戊寅(1398년)에 이임하다. 그는 1401년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등극하면서 동생 이미(李美)를 중히 쓰고자 관직을 주며 불렀으나 그가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부름을 거부하자 화가 난 태종이 당시 이미를 제주 향리(濟州鄕吏)로 폄류(貶流=관직을 떨어뜨리고 유배 보냄) 되었던 서재(西齋) 이미(李美)의 친형이다.
그는 늘 외진 섬에서 쓸쓸히 지내는 아우를 항상 못 잊어 하다가 조정에 상소하여 세종 2년(1420년) 제주도 관리를 자원하여 그해 음력 2월 5일 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從二品으로 濟州牧使를 겸직)로 제수 받아 5월에 제주에 입도 취임하였다.
그리고 동생 이미(李美)에게 고향에 돌아갈 것을 매일 같이 설득하였다. 하지만 동생 이미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담은 시(詩) 한수로 형에게 속 마음을 전하며 거절하자 동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형 이신은 고민 끝에 강제로 동생을 출륙(出陸) 시키고자 화북포(禾北浦) 까지 데리고 왔으나 심한 풍랑으로 이도 실패하자 포기하고 그해 11월에 스스로 자원하여 받았던 관직을 사임하고 홀로 귀향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420년 11월, 제주의 정의ㆍ대정 두 현(縣)에 처음으로 향교를 설치, 생도는 각각 50여 명이고. 주인(州人)으로서 경서에 밝고 수양된 자를 선발, 교도(敎導)로 임명하고 훈학(訓學)에 힘써도록 하였다고 제주경재소(京在所 : 출장소)에서 알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주의 정의향교(旌義鄕校)와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제주 도안무사 이신(李伸)의 재임 시 최초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세종 8년(1426년)에는 태안현감(泰安縣監-從六品)을 역임 했다.
[참고문헌]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국립중앙도서관[古2198-1]),
관풍안(觀風案), 관안(官案)/1895년경,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1766년 尹蓍東 편저, 왕조실록(王朝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