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경천군 이해룡 사패 송금 물침비

야촌(1) 2017. 12. 16. 06:48

경천군 이해룡 사패 송금 물침비

(慶川君 李海龍 賜牌 松禁 勿侵碑)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 길 구간)에 있는 경천군 사패 송금 물침 비는 1614년 광해군이 제정 이달충(霽亭 李達衷)의 9대손(九代孫)인 경천군 이해룡[李海龍, 1546년(명종 1)~1618년(광해군 10)].선생에게 하사한 토지를 침범하거나 벌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2014년 2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송금(松禁)은 고려시대부터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소나무의 생장에 적당한 곳을 선정하여 보호하고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벌채를 금지한 산)의 제도를 두어 소나무 벌목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이해룡선생은 1588년(선조 21)에 통신정사(通信正使)를 맡은 송당 황윤길(松堂 黃允吉)을 따라 부사(副使)인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과 함께 통신사를 수행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중국에 대한 원군(援軍) 요청 및 일본과의 강화회담과정에서 역관(譯官=통역관)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처럼 외교일선에서 활약한 공적을 인정받아 군(君)에 봉해졌습니다.

 

비석전면에는 ‘慶川君賜牌定界內松禁勿侵碑(경천군 사패정계 내 송금물침 비)’ 즉, ‘경천군에게 하사한 경계내의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니 들어가지 말라’라는 명문이 있습니다. 후면에는 ‘萬曆四十二年甲寅十月(만력 42년 갑인 10월)’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1614년에 세워진 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실례를 방증하는 유물로서, 이 비를 통해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해 온 조선시대 송금정책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데.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송금비로서는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중요 점을 지닙니다.

 

특히 경천군은 조선중기의 서예가로서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본관은 경주(慶州), 벼슬은 선조 때의 역관‧ 사자관(寫字官)을 거쳐 1595년(선조 28)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습니다.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들로부터 한석봉(韓石峰)에 필적하는 명필로 격찬을 받았으며.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습니다.

 

또한 선조의 명에 의해『천자문』을 써서 올렸는데, 당시 왕실과 경천군(慶川君)의 증손인 사자관(寫字官) 동현(東鉉)공이 모사(模寫)하여 집에 전해오고 있었는데, 오늘에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아울러 보물 제813호인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의 편액(가로 200cm, 세로 80cm)과 경희궁(慶煕宮)의 흥화문 편액이 공의 글씨이며. 그리고 선생의 가문에는 한 대의 빠짐도 없이 10대를 이어 사자관과 서예가문으로 대를 이었는데 오늘날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 편액 글씨도 공의 10대손인 부경(副卿-대한제국 때의 從二品)을 역임한 소농(筱農) 이종태(李鍾泰) 공의 글씨입니다.

 

경천군 묘역은 후손들 묘와 함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 길 구간) 내에 경주이씨 묘역으로 소재합니다. 둘레길 운동 길에 여러제위 분들의 많은 답사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경주이씨 세전보감(慶州李氏世傳寶鑑) -1932

◇조선왕조실록-선조 편 

 

 

경천군 이해룡 사패 송금 물침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6번지 일원

소유현황 : 비문화재(경주이씨(慶州李氏) 경천군파 사유재산

                   송금물침비(松禁勿侵碑)는 북한산 둘레길 중 내시묘역길(현지점) 구간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일본과의 화평교섭에서 크게 활약한 공로를 인정 받아서 경천군(慶川君)으로 봉해진 이해룡(李海龍/제정공 이달충의 9대손의 사패지(임금이 하사한 토지)이자 그 주의사항을 알리는 비석 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나라의 모든 토지가 왕의 것이었기에 공(功)이 있는 신하 등에게 땅을 주거나 땅에서 나는 땔감 등의 생산물을 거두어 갈 수 있게끔 하였는데, 바로 이 비석을 통해서 사패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경천군에게 내려준  이 땅에 (무덤에) 함부로 들어가거나 소나무를 베지말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뒷면에는 1614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만력42년 : 1614년 甲寅 10월)이 남아 있습니다.

 

경천군 이해룡은 한석봉과 함께 당대의 명필로서 사자관(寫字官: 조선시대 승문원·규장각에 소속된 관원)을 담당하였으며, 임진왜란을 즈음하여 통신사의 일행으로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경천군 이해룡선생 묘

 

창덕궁 인정문 편액

 

덕수궁 대한문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조선명소 기념사진첩>에 북한산성 행궁의 위용이 담겼다. 1915년 홍수로

떠내려가기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에서 가장 내밀한 장소중의 하나인 산영루가 2014년에 복원되기전의 옛 사진이다. 

신영루(新營樓)는 숙종이 북한산성을 쌓기 전부터 있었으며, 산성을 쌓은뒤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2018. 07. 26 한겨레

 

 

▲고서화 속 신영루. ⓒ 경기G뉴스

 

▲1896년 독일인 엘러(Otto E.Ehlers)가 촬영한 신영루- 사진자료. ⓒ 경기G뉴스

 

복원전의 신영루(新營樓) 초석(礎石) 모습/2013. 05. 30

 

경기도문화재위원회 기념물분과는 2013년 5월 30일 북한산성에 위치한 ‘북한산 산영루지’를 경기도 기념물 233호로 최종 확정하고 복원사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북한산 ‘산영루(山映樓)’는 북한산성 내 태고사(太古寺) 계곡과 중흥사(重興寺) 계곡이 만나는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누각(樓閣)으로 산의 그림자가 수면위에 비치는 곳이라 해 ‘산영루’란 이름을 갖고 있다. 


산영루의 빼어난 경관은 많은 기록에 남아있는데 18세기 초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은 <차삼각팔경운>에서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산영루에 뜬 달을 기록하고 있고 이후 송상기『宋相琦, 1657년(효종 8)~1723년(경종 3)』의 <유북한기>, 17세기 후반 이엽『李燁,1729년(영조 5)~1788년(정조 12)』과 유광천『1732년(영조 8)~1799년(정조 23)의 도봉산과 삼각산 유람기, 18세기 후반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19세기 초 추사 김정희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산영루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덕무『李德懋,1741년(영조 17)~1793년(정조 17)는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산영루(山映樓)>라는 시(詩)를 남겼는데 산영루의 옛풍광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산영루(山映樓)에서"

 

이덕무(李德懋)


寒木深山動九秋 / 차가운 숲 깊은 산 가을이 서렸는데 
石橋東畔得高樓 / 돌다리 동쪽 언덕 높은 누각 서 있구려 
漱泉已有翛然意 / 맑은 샘의 양치질 정신이 개운해라 
休向人間說此遊 / 행여나 남에게 이 놀이 말할까봐.


출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오늘날의 북한산 신영루/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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