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영전(靈前)에 올린 박태준의 보고서
박태준(朴泰俊, 1927. 09. 29 경남 양산 출생~2011. 12. 13 졸)/壽 85歲
"포항 제철의 大役事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다시 읽어보는 故박태준 회장의 25년 만의 보고서
다음의 글은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올린 25년 만의 보고서이다.
박태준 회장은 1992년 10월 포항제철 4반세기 大役事(조강 연산 2,100만 톤)를 완성한 직후 朴 대통령의 지시를 완수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올렸다. 25년만의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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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 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게!“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시던 그 카랑 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 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13 차례나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 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 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솟구칠 뿐입니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
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머리 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 드린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진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루기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 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오며, 삼가 각하의 명복을 비옵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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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서슴없이 포스코 박 태준 회장을 떠올리곤 했는데 어제 그 분의 영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인터넷에서 박태준님이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25년 만에 보고한 글을 읽고 왜 이리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두 巨人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 모습인지라 벗님들께 함께 읽어보시자고 올렸습니다.
삼가 박태준님의 편안한 휴식을 빌며 대한민국을 지켜주는 영령이 되주시길 기원합니다.
박태준의 뜨거운 인생
↑1970년 당시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
(좌측 박태준 회장)이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일본서 어린 시절 - 와세다 공대 들어갔다 귀국
◇6·25 참전해 죽을 고비… 전쟁 뒤 육군대학 수석 졸업
◇포항제철 건설 - "난 고속도로 감독할 거야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
◇박정희 '종이마패' 건네 1971년 8월 일본 도쿄. 4월 시작한 포항제철소 공장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
본 미쓰비시의 설비 담당자는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
다"며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태준은 "하루 무조건 700㎥ 이상 콘크리트를 타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하루 3시간 씩만 눈을 붙이고 쉴 새 없이 현장을 독려했다.
박태준의 철강 신화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는 1970년 4월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첫 쇳물을 뽑아냈고 25년 재임하는 동안 포스코를 조강 생산 2100만톤 급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와세다 공대 입학.....6·25 참전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와세다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
이후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갔다.
6·25전쟁 때에는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박태준은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았다.
1950년 6월 27일 박 회장은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아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 순간을 각오했지만 이때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에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박태준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친척 어른 소개로 부인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녀는 신혼 휴가 뒤 서울로 떠나는 남편에게 첫 선물을 건넸다.
자기 은사인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 그것이 박태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만난 것이었다.
●박정희
"자네가 제철소를 맡아"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미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경영 능력을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해외 출장을 나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박태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1965년 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렀다.
박정희는 박태준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
●대일 청구 자금으로 포스코 건설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1969년 1월 한국과 워싱턴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KISA)과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박정희
"임자한테 내가 졌어"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주장했고,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고 주장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했기에 민간 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에서 세 차례나 토론이 있었다.
줄담배를 태운 박정희가 마침내 말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박정희는 이후 박태준에게 전권을 준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이른바 종이마패를 주기도 했다.
<출처 : 조선 Biz Copyright __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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