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준(朴泰俊)
[출생] 1927. 9. 29,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졸년 ] 2011. 12. 13
사진출처 : ⓒ 연합뉴스 / 다음백과
■ 박태준(朴泰俊) - 포스코 명예회장
故 박태준 명예회장
집도 주식도 유산 한푼 안남긴 이유 - "남긴 재산이 전혀 없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일군 세계적인 철강회사 포스코는 1968년 4월1일 설립됐다.
그는 당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영문명 POSCO)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철강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포스코는 1988년 6월10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됐고, 3만 8058원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2007년 10월에는 최고점인 76만 5000원을 기록했다. 지난 13일 종가는 38만 9500원으로 시초가와 비교하면 10배 수준.'가치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도 포스코의 지분을 4%가량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포스코의 올해 3분기 누적 연결 조강 생산량은 세계 전체 물량의 4.5%에 해당하는 2900만t. 올해 3분기까지 연결 매출액 50조 2000억원, 영업이익 4조 4000억원을 달성했다.
그런데 박 명예회장의 유족 측은 그가 개인 명의로 남긴 재산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포스코가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크는 동안 그는 개인적인 부의 축적을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1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유족 측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정KPMG 부회장은 지난 13일 서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박 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박 회장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재산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라며 "본인 명의의 집도 없고 주식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제철소 창업 당시부터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라며면서 "큰딸의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고 전했다.
왜일까.국가 기반을 다진 거물 경제인이자 정치에도 몸담으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박 명예회장은 평소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1974 년 가을 관세법 위반혐의로 가택수색이 진행돼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장롱에는 이불과 옷이 전부였으며 금고에는 집문서와 패물 몇 가지, 해외출장의 흔적으로 남은 푼돈만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일본 미쓰비시가 포항제철이 일류 철강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자사의 설비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박 명예회장에게 특별한 선물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한 일화도 알려져 있다.
박 명예회장이 해운회사를 설립하면 미쓰비시은행이 돈을 출자해 화물선을 건조하고 화물 알선도 책임지겠으니 그 수익금을 전액 박 명예회장이 관리하라는 제안이었다.하지만 박 명예회장은 이 돈을 개인이 받을 수 없으며 포항공대를 지속적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수익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들어가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화물선 건조자금은 미쓰비시은행이 좋은 조건으로 융자하고 융자금의 95%를 상환할 때까지는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겨우 50억원의 포항제철 자금을 들여 거양해운을 만들었다.
이후 거양해운의 수익금이 포항공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장기융자 95% 상환' 조건은 자신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이를 손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부의 축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는 타계 직전 자비로 병원비를 조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앞서 박 명예회장은 지난달 9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며 회복되는 듯했으나 이달 초 다시 상황이 나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끝내 13일 눈을 감았다.
전문가들은 고인의 사인인 폐질환의 원인으로 석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인의 젊은 시절 국내 산업현장에서는 석면이 다량으로 쓰였는데, 고인이 워낙 활발한 현장 경영을 펼쳐 석면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 명을 달리한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정치인 박태준'으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국회의원 4선(11, 13∼15대) 국회의원에 구 민정당 대표위원, 구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 등이 그가 남긴 정치적 흔적이다.
다만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일본 망명 등 정치적 영욕을 거듭한 끝에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지만 불과 4개월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자 사퇴한 것이다.
총리직 퇴임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계 복귀 가능성이 꾸준히 점쳐졌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출처 : The Korea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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