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랑군과 낙랑국의 차이는 무엇인가 ㅣ 2004. 09. 30 :00:24
1. 독립된 나라인 '국(國)'과 한 나라의 행정구역인 '군(郡)'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런데 왜 낙랑'군'과 낙랑'국'을 구
분하지 않고 가르치십니까?
2.『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보면, 낙랑'왕'(王)인 최리(崔里)가 옥저 지방에서 고구려의 호동왕자를 만나
고 왕자에게 "혹시 북쪽 나라(북국. 北國) 사람이 아닌가?"하고 물은 뒤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지 않습
니까?
그렇다면 ― 낙랑왕은 고구려를 자기네 북쪽에 있는 나라로 보았으므로 ― 낙랑'국'(國)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
어야 하지 않는가요? 따라서 평안도에 있는 낙랑 유물들은 낙랑'국'(國)의 유물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 이
것들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주장하십니까?
3.『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면,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歸服 : 돌아와 엎드림. 즉 항복, 귀순)하였
다."고 적혀 있습니다. '국(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왕국인 낙랑과 대방이 신라에 항복한 것입
니다.
이로 보아 신라와는 가까운 곳이어야 하고 평안도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과 황해도에 자리잡고 있던 대방이 경상
북도에 있던 신라에게 항복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기록에 '국'(國)이라고 나와 있는데도 왜 '군현(?)'인 낙랑과 대방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가르치십니까?『삼국
유사』에 "낙랑과 대방이 군현으로 외람되이 '나라'라고 일컫더니, 마침내 신라에 항복한 것이다."라고 적은
구절 때문인가요? 하지만 원문을 보면 그건 일연이 단 주석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디까지나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歸服)하였다."는 구절 자체에만 신경써야 합니다.
4. 평안도에서 나온 고급 칠기나 화려한 금은 장신구, 그리고 수천 수백기나 되는 무덤, 성벽들이 '낙랑군'이 한
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증거'라고요? 그럼 왜 한족(漢族)이 '금은 장신구'를 허리에 달고 다녔으며 무덤까지
가지고 갔는지를 설명하셔야 합니다.
한족들은 금은 장신구보다는 옥(玉)으로 만든 장신구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낙랑'군'이 있었다는 평안도에
는 옥 장신구 대신 화려한 금 세공품만이 나옵니다. 한족의 무덤이라면 이럴 수 있습니까? 이 무덤들은 토착
지배세력의 무덤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고급 칠기가 한(漢)나라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학자들이 그 칠기
는 너무나 고급이고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수준이며 왕급(王級) 유물이라고 판정하였는데 그런 칠기가 수천 수
백점이나 한 군데에서 나왔습니다. 나라의 일개 관리일 뿐인 태수가 감히 황제만 쓸 수 있는 고급 칠기를 쓸
수 있습니까? 그것도 '변두리'에 임명된 태수가 말입니다.
또, 한족(漢族) 학자들처럼 그 칠기가 "중국 황실에서 쓰고 남은 것을 갖다 준 것"이라고 주장하시는데 황실이
그렇게 인심이 좋습니까? 고급 칠기가 일개 관리인 태수에게 갖다 줄 만큼 남아도나요?
그만큼 많이 만듭니까? 그런 고급 유물일수록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 적게 만들고 얻기도 힘들지 않습니
까? 그리고, 그런 고급 칠기를 민간상인들이 멋대로 빼돌려서 팔 수 있습니까? 그랬다간 처형당하지 않나요?
따라서 이 유물들은 낙양이나 장안이 아니라 이곳 평안도 일대에서 만들었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낙랑'국'(國) 왕(王)의 신하인 장인 집단이 이곳에 몰려 살면서 칠기를 만들어 왕에게 바친 증거라고 봐
야 합니다. 고급 물건이 나오면 다 한(漢)나라 겁니까?
5. 지금의 평안도 일대에서 나온 수천점의 '봉니' 때문에 이곳이 낙랑'군'(郡)이라고 주장하시지요. 그런데 '봉
니'가 도대체 뭡니까? 태수가 본국(本國)에 보내는 글을 안전하게 담아가는 용기 아닙니까?
문서가 목적지에 다다른 뒤에는 봉니를 깨뜨려서 그 안에 들어있는 문서를 꺼낸 뒤 봉니 껍데기는 버리지요.
즉 봉니는 오늘날의 편지봉투나 소포봉투입니다. 따라서 봉니 껍데기가 많이 버려져 있는 곳은 태수의 문서가
도착한 곳이지 출발한 곳이 아닙니다. 태수가 다스리는 군현(郡縣)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봉니 껍데기가 많이 나왔으니 그곳은 태수의 문서가 도착한 본국(本國)이라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곳이 '군현'이 되어야 합니까? 만약 낙랑'군'이 한(漢)의 군현이었다면 낙랑태수가 보낸 봉니는 낙양과 장
안에서 나와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중국 군현'이라는 낙랑'군'을 다스리는 태수가 중국이 아니라 평안도에 있는 '낙랑[국](國)'에게 봉
니에 넣은 문서를 많이 보냅니까? 이른바 '낙랑봉니'는 오히려 평안도에 낙랑'국'이 있었고 낙랑'군'은 그 낙
랑'국'의 군현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거꾸로 생각하십니까?
6. 대방이 나라가 아니라 군현이라고요? 그럼『삼국사기』「백제본기」에 고구려가 쳐들어오자 백제에게 도와
달라고 한 '대방(帶方)'이 왜 '국(國)'으로 나옵니까? 군현이면 '군(郡)'이라고 적어야 하고 그 지배자는 '태수
(太守)'여야 하지 않나요?
왜 그 기록에는 '대방 왕王'의 딸에게 백제 책계왕이 장가들었다고 적고 있습니까?
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왜 대방'군(郡)'이 아니라 대방'국(國)'이 낙랑'국(國)'과 함께 신라에 항복합
니까? 군현이었다면 '군(郡)'이 항복했다고 적어야 옳지 않나요? 왜 '나라'를 '군현'이라고 가르치십니까?
7.『삼국사기』「신라본기」와『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낙랑'이 백제나 신라와 자주 충돌하는데 왜 낙랑
군'과 대방'군'의 '주인'인 중국 쪽의 기록에는 이와 비슷한 무력충돌 기록이 없습니까?
자기네 군현이 이들과 싸웠다면 마땅히 자세히 적어서 백제나 신라를 비난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고구려와 '낙랑'이 싸운 기록만 나옵니까? 고구려와 싸운 낙랑은 대륙에 있던 군현이고 백제, 신라
와 싸우던 낙랑은 중국과는 무관한 '독립국가'여야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낙랑"이라는 말이 나오면(대방도 마찬가지지만) 무조건 낙랑'군'이라고만 풀이하십니까?
8. 기록에는 서한(전한) 때부터 설치된 '한 군현'이었다는 평안도 유역에 왜 훨씬 뒤인 동한(후한)의 유물만이 나
오고 전한(서한)의 유물은 안 나옵니까? 만약 기록대로 서한 때부터 설치되었다면 서한 때의 유물도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서한 때의 유물부터 먼저, 많이 나오고 동한 때의 유물은 나중에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동한 때의 유물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한 무제(유철)가 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기록에 나오는 데로 동한 때 광무제가 이곳을 원조해서 동한 때의 유물이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교과서에는 평안도에까지 전한(前漢)이 세력을 뻗쳤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9. 수나라 때 양광(수나라 양제)이 "고구려가 감히「한사군」을 쳐서 빼앗았으므로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되찾
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빼앗긴' 한사군이 수나라의 땅 이름으로
나옵니다. 군대가 모이는 하북성에 '낙랑[도](道)', '현토[도](道)', '대방[도](道)' 같은 길 이름이 나옵니다.
분명 '낙랑, 대방'은 고구려에 '빼앗겼을' 터인데 왜 수나라 땅이었던 하북성에 '빼앗긴' 땅의 이름이 나옵니
까? 그렇다면 고구려에도 '낙랑, 대방'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수나라에도 '낙랑, 대방'이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얘기
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
이는 고구려가 차지한 '낙랑'과 중국 땅 안에 있는 '낙랑'이 같은 낙랑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한 쪽에는 낙랑'국'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그 나라의 군현인 낙랑'군'이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
까?
또, 낙랑은 원래 하북성이나 요서에 있다가 위만에게 쫓겨나고, 다시 한나라가 그곳을 차지하자 동쪽으로 달
아나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낙랑'군'은 원래 낙랑이 그곳에 있었기에 한나라가 그 이름을
따서 군현을 세웠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또 그와는 별도로 낙랑'군'이 - 낙랑국이 만든 - '본국'인 낙랑국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다고 봐야 옳지 않습니까?
왜 낙랑과 대방이 한 군데에만 있었다고 보십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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