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학으로 본 낙랑군
낙랑군 인구통계 '목간'도 나와
北 학자들 "낙랑국 유적" 주장
일제에 의한 자료조작설도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1년여의 힘겨운 전쟁 끝에 왕검성을 함락하고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4개의 군현을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는 당시 사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 낙랑군을 제외한 진번·임둔·현도군은 토착민의 반발로 수십 년 만에 통폐합되거나 외곽으로 쫓겨났다.
낙랑군만 서기 313년 고구려에 멸망될 때까지 420여년간 존속했다.
20세기 들어 일본 학자들은 식민사관의 정립 과정에서 낙랑군을 중국 왕조의 '식민지'로 주목하였다. 여기에 적극 부응한 것이 고고학이었다. 식민 지배의 기초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반도의 고(古)건축을 조사하던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교수는 1909년 평양 부근에서 벽돌무덤을 발견했다.
평양이 옛 고구려의 수도였으므로 그는 이를 고구려 무덤으로 여겼다. 하지만 논란 끝에 1910년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평양 일대의 무덤들이 낙랑군 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20년대 통계에 의하면 평양 인근에는 1600여 기의 낙랑 무덤이 있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발굴 조사를 통해 낙랑 문화가 중국의 한나라 문화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원시 미개(未開) 단계에 있던 조선인은 한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을 통해 중국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문명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단이 발견했으며 낙랑군에 소속된 점제현의 장(長)이 산신에게 제사드리는 내용을 새겼다. 서기 85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낙랑 무덤에서 그 이전 고조선의 독특한 세형동검 문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중국 한나라 무덤과 다른 독자성을 지녔던 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평양 일대에는 중국 한나라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낙랑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나라계 주민은 고조선화하고 고조선계 주민은 한화(漢化)하면서 '낙랑인'이라는 독특한 종족 집단(ethnic group)을 형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일제의 식민주의적 의도를 간파한 사람은 정인보였다. 그는 낙랑군 관련 명문(銘文)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했다. 봉니(封泥)는 다른 군현으로 보내는 문서에 날인한 것이므로 낙랑군과 예하현의 봉니가 낙랑군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또 평양에서 효문묘(孝文廟)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단지가 발견되었는데 효문묘는 효문제가 행차한 곳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낙랑군에는 효문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 제기는 당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지만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이후에 한대 하남군이 있었던 곳에서 하남군 관리의 봉니가 출토됐고, 한나라 효문제가 행차하지 않은 서쪽 변방의 돈황에 효문묘가 설치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낙랑예관(樂浪禮官)' 관직명이 새겨진 수막새.
낙랑군 자료 조작설은 광복 후 북한 학계에 계승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북한 학계는 고조선 중심지가 중국 요령성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도 당연히 만주에 있어야 했으므로 낙랑군의 평양 존재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 학자들은 낙랑군 관련 명문 자료가 조작되었거나 낙랑군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까지 북한은 평양 일대에서 2600여 기의 무덤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이 무덤들을 마한의 유적으로 해석하다가 최근에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던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평양 일대 무덤들은 낙랑군 유적이 분명하다.
특히 1990년대 초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현별 인구 통계를 정리한 목간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고고학 100여 년의 조사와 연구 성과에 따르면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음을 의심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출처 :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 글: 오영찬 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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