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법학 만초-이상설 전

야촌(1) 2017. 1. 15. 13:33

이상설에 대한 조선왕조 실록 자료내용

 

고종 30년= 1893년 조선 개국(開國) 502년

 

10.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2월 26일 갑술 1번째기사 / 건청궁에 나아가 월과 유생 중에서 우등한 사람에 대한 비교를 행하다. 하교하기를, "월과 우등인의 비교에 참가한 여러 선비들이 공부를 착실히 하였으므로 모두 가상하다.

 

이번이 창시한 해인만큼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책(策)에서 입격한 유학(幼學) 임홍준(任弘準), 진사(進士) 이일찬(李日贊), 유학(幼學) 이상설(李相卨) 생원(生員) 장석신(張錫藎)에 대해서는 식년 동당 회시(式年東堂會試)의 방목(榜目) 끝에 붙이도록 하라." 하였다.

 

11.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1901년 11월 5일 양력 3번째기사 / 경효전의 전작례와 작헌례 때의 찬례 이하와 제조 이하에게 시상하다.

 

경효전(景孝殿)의 전작례(奠酌禮)와 작헌례(酌獻禮) 때의 찬례(贊禮) 이하와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재극(李載克), 대축(大祝) 황회연(黃會淵), 예모관(禮貌官) 조동완(趙東完), 상례(相禮) 이상설(李相卨)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2. 고종실록 42권, 고종39년=1902년 5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 기로소 당상들에게 연회를 베풀다.이상설(李相卨)이 화반을 받들고 황태자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봉시가 무릎을 꿇고 받아 올렸으며 심상익이 영왕(英王)에게 꽃을 나누어주고 집사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꽃을 뿌려주자 음악이 멎었다.

이지용이 소금물을 올리고 윤헌이 소금물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으며 등가에서 ‘천년만세지곡(千年萬歲之曲)’을 부르고 춤추는 아이들이 들어와 ‘몽금척(夢金尺)’...

 

13.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1월 25일 양력 2번째기사 /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이하를 소견하다.이상설(李相卨), 시독관(侍讀官) 서긍순(徐肯淳)· 윤하영(尹夏榮)· 신성균(申性均), 시종관(侍從官) 정인헌(鄭寅獻)· 조중관(趙重觀)· 김용완(金容完)· 홍난유(洪蘭裕)· 조동준(趙東濬)· 이갑승(李甲承)· 조남익(趙南益)· 김황진(金璜鎭)이다.】 "영조(英祖)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후 갑자년(1744)에 어진을 도사(圖寫)한 전례가 있다. 그것을 이어나가는 의리로 보아 역시...

 

14. 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 진하 때의 각 차비 이하에게 시상하다.

진하(陳賀) 때의 각 차비(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겸장례 비서원 승(兼掌禮祕書院丞) 한인호(韓麟鎬), 예모관 부첨사(禮貌官副詹事) 이상설(李相卨), 상례 겸 선조관(相禮兼宣詔官) 서긍순(徐肯淳)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5. 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1월 30일 양력 3번째기사 / 조병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李相卨)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에 서임하였는데 윤용식은 3등에, 이상설은 4등에 서임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김성근(金聲根)을 장례원 경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정구(尹定求)를 상의사 제조(尙衣司提調)에 겸임시키고, 내부 대신(內部大臣) 김주현(金疇鉉)을 교방사 제조(敎坊司提調)에, 특진관(特進官) 이재각(李載覺)을 전선사...

 

16.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1904년 10월 14일 양력 3번째기사 / 신기선이 법부의 형법을 다시 교정하여 속히 편찬하도록 청하다.

이상설(李相卨),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윤성보(尹性普)·조경구(趙經九)·김낙헌(金洛憲), 법관양성소 교관(法官養成所敎官) 정명섭(丁明燮), 법부(法部) 법률기초위원(法律起草委員) 조창호(趙昌鎬)를 모두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에 차하(差下)하여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출근하여 사무를 보게 함으로써 수일 내로 끝마치는 것이 사리에 부합할 듯합니다. 삼가 성상의...<--- 이상설이 법관교육-법관양성소와 관련성이 고종실록 1904년 이 부분에도 있는 듯합니다.

 

17.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10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 신기선, 민병석, 김가진 등을 관제 교정소 의정관에 임명하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용태(李容泰), 학부 협판(學部協辦) 고영희(高永喜), 농상공부 고문관(農商工部顧問官)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특진관(特進官) 김만수(金晩秀), 종2품 이상설(李相卨),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허위(許蔿), 탁지부 고문(度支部顧問)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모두 관제 교정소 의정관(官制校正所議政官)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18.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10월 29일 양력 3번째기사 / 민영린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박용대(朴容大)를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조병필(趙秉弼)을 장례원 경에, 내부 판적국장(內部版籍局長) 이용세(李容世)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이상설(李相卨)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19.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9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 이용선을 궁내부 협판에 임명하다.

종2품 이용선(李容善)을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종2품 이상설(李相卨)을 학부 협판(學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0.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9월 11일 양력 3번째기사 / 박봉주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다.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박봉주(朴鳳柱)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박용대(朴容大)를 사직서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이상설(李相卨)을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종2품 이준영(李準榮)을 학부 협판(學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이상설이 법관교육-법관양성소와 관련성이 고종실록 1905년 이 부분에도 있는 듯합니다.

 

21.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일 양력 5번째기사 / 이상설을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다이상설(李相卨)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비서감 경(祕書監卿) 김사철(金思轍)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정2품 이우면(李愚冕)을 비서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평양 군수(平壤郡守) 이승재(李承載)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 한진직(韓鎭稷)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22.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4일 양력 2번째기사 / 이상설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이상설(李相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에 의해서 맺어진 것이니 이치상 무효로 되어야 마땅하고 회의에서 동의한 여러 흉역들은 나라의 역적이니 법에서 용서할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도 성토하는 소리가 잠잠하여 수일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폐하가 무효를 극력 주장하고 준절히 따지고 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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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실록 25권, 고종 25년 12월 26일 계묘 2번째기사 / 민영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영달(閔泳達)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東副承旨)로 특별히 제수하고 권숙(權潚)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민형식(閔亨植)을 시강원 겸필선(侍講院兼弼善)으로, 이위(李暐)를 감리 원산항 통상 사무(監理元山港通商事務)로 삼았다.

 

2. 고종실록 28권, 고종 28년 8월 5일 병신 1번째기사 / 경무대에 나아가 일차 유생 전강을 설행하였는데 제술로써 강을 대신하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설행하였는데,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다. 부(賦)에서는 진사(進士) 윤종영(尹鍾永)과 민형식(閔衡植), 유학(幼學) 남장희(南章熙)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3. 고종실록 28권, 고종 28년 12월 3일 계사 1번째기사 / 정해윤을 이조 판서에, 민형식을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하다.

정해윤(鄭海崙)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민형식(閔炯植)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4. 고종실록 28권, 고종 28년 12월 25일 을묘 2번째기사 / 직각 권점을 행하여 박창서 등을 추천하고 대교 권점을 행하여 민형식 등을 추천하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박창서(朴昌緖), 김성규(金成圭), 이시영(李始榮), 이정직(李鼎稙), 조중엽(趙重燁), 윤두병(尹斗炳)이다.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형식(閔衡植), 오형근(吳衡根), 김교덕(金敎悳), 민영복(閔泳復), 김영기(金永冀), 박제횡(朴齊橫)이다.

 

5. 고종실록 28권, 고종 28년 12월 25일 을묘 3번째기사 / 민영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영소(閔泳韶)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서상우(徐相雨)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박창서(朴昌緖)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민형식(閔衡植)을 대교(待敎)로, 민영복(閔泳復)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서상훈(徐相勛)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6.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1월 18일 무인 4번째기사 / 심순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순택(沈舜澤)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김낙현(金洛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인승(曺寅承)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종묵(閔種默)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만수(金晩秀)를 시강원 겸필선(侍講院兼弼善)으로, 홍종영(洪鍾榮)을 겸사서(兼司書)로, 민형식(閔衡植)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7.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3월 7일 을축 3번째기사 / 이정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정로(李正魯)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만수(金晩秀)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민영기(閔泳琦)를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민형식(閔衡植)을 시강원 겸 필선(侍講院 兼 弼善)으로 삼았다.

 

8.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3월 20일 무인 1번째기사 / 민형식을 영남의 광무국회판에 임명하여 광산을 구관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민형식(閔炯植)을 영남(嶺南)의 광무국회판(礦務局會辦)으로 차하(差下)하여 도내(道內)의 각 광산(鑛山)을 구관(句管)하도록 하라." 하였다.

 

9.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3월 28일 병술 2번째기사 / 통제사 민형식을 소견하다.

통제사(統制使) 민형식(閔炯植)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10.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5월 2일 기미 3번째기사 / 조정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정희(趙定熙)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병익(金炳翊)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만교(李萬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형식(閔衡植)을 정랑(正郞)으로 삼았다. 김학수(金鶴洙)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가 곧 체차(遞差)하고 민영기(閔泳琦)를 임명하였다.

 

11.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6월 1일 정해 3번째기사 / 조병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병필(趙秉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임희상(林羲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규홍(金奎弘)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민형식(閔亨植)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2.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6월 18일 갑진 6번째기사 / 심순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순택(沈舜澤)을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정기회(鄭基會), 민영준(閔泳駿), 박정양(朴定陽)을 제조(提調)로, 김영수(金永壽)를 대제학(大提學)으로, 민형식(閔亨植)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심상진(沈相璡)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3.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7월 15일 경자 4번째기사 / 민형식을 이조 참의에, 민영규를 우참찬에 임명하다.

민형식(閔亨植)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영규(閔泳奎)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삼았다.

 

14.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7월 25일 경술 4번째기사 / 추상존호와 가상존호의 옥책문과 금인장을 진하할 때의 각 차비 이하에게 시상하다

민형식(閔亨植), 대거(對擧)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리 윤명섭(尹命燮), 상례(相禮) 조중엽(趙重燁), 선교관(宣敎官) 오정근(吳正根), 선전관(宣箋官) 이종칠(李鍾七), 홍학주(洪學周), 좌통례(左通禮) 이수홍(李秀洪), 우통례(右通禮) 박시순(朴始淳), 독옥책관(讀玉冊官) 김기수(金綺秀), 독금보관(讀金寶官) 이근수(李根秀), 대축(大祝) 김복성(金復性), 상호도감...

 

15.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8월 10일 을축 2번째기사 / 민형식을 시강원겸필선 겸 이조정랑에, 김교헌을 이조 정랑에 임명하다.

민형식(閔衡植)을 시강원겸필선(侍講院兼弼善) 겸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김교헌(金敎獻)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16.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 8월 21일 병자 2번째기사 / 강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찬(姜?)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보영(李輔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민형식(閔亨植)을 시강원 겸보덕(侍講院兼輔德)으로, 윤두병(尹斗炳)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정경원(鄭敬源)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7.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월 23일 정미 1번째기사 / 민형식을 이조 참판에 임명하다.

민형식(閔亨植)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8.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2월 28일 신사 2번째기사 / 김성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성근(金聲根)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근명(李根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형식(閔亨植)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19.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3월 27일 기유 1번째기사 / 강원 감사 민형식을 접견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민형식(閔亨植)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20.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8월 6일 을묘 2번째기사 / 조정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정구(趙鼎九)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민형식(閔亨植)을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송병옥(宋秉玉)을 시강원 겸사서(侍講院兼司書)로, 민영철(閔泳喆)을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삼았다.

 

21.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1월 29일 정미 1번째기사 / 의정부에서 금성현에 난을 일으킨 자들을 잡을 것과 금성 현령 이승일, 개성 유수 김세기의 탐오죄를 처벌할 것을 청하다.

 

민형식(閔亨植)의 장계(狀啓)를 보니 사관(査官)인 영월 부사(寧越府使) 홍병도(洪秉燾)가 금성현(金城縣)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을 조사하여 보고한 것을 일일이 들면서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을 민란(民亂)이건 저 고을 민란이건 할 것 없이 쌓이고 쌓인 억울함이 터진 것은 형편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이 간악한 무리들의...

 

22.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3월 3일 경진 3번째기사 / 형조에서 금성 현령 이승일이 장전한 실지 액수에 대해 해도에 관문을 보내다.

보내어 물은 후에 그 가동(家僮)을 잡아 가두고 독촉하여 받을 일은 이미 초기(草記)를 하여 윤허를 받고 해도에 관문을 보냈습니다.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민형식(閔亨植)의 등보(謄報)를 보니, ‘범장(犯贓)한 엽전(葉錢)이 1만 1,450냥(兩)인데 지금 이미 남김없이 준봉(準捧)하였다.’고 하니, 가동(家僮)을 가두는 이 조항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3.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6월 22일 정묘 5번째기사 / 민영준, 김세기, 민치헌 등을 원악지 정배하라고 명하다.

민형식(閔炯植)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못하는 짓이 없어 그 여독이 이웃 경내까지 두루 미쳤으니 원악도에 안치하라. 전 총제사(總製使) 민응식(閔應植)은 군영(軍營)을 창설하면서 고친 것이 많고 세금을 거두며 물의를 일으켰으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전전(前前)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세기(金世基)는 잔학한 짓을 하여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요행히 처벌을...

 

24.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6월 25일 경오 2번째기사 / 의금부에서 민영준, 민형식 등을 정배할 장소를 보고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영준(閔泳駿)은 영광군(靈光郡) 임자도(荏子島)에, 민형식(閔炯植)은 흥양현(興陽縣) 녹도(鹿島)에 안치(安置)하고, 민응식(閔應植)은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김세기(金世基)는 영양현(英陽縣)에, 민치헌(閔致憲)은 홍원현(洪原縣)에 정배(定配)하소서.’라고 아뢰었다.

 

25.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5일 기축 6번째기사 / 군국기무처에서 민영준, 민형식 등의 처벌과 강제로 빼앗은 산림과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줄 것 등의 의안을 올리다. 민형식(閔炯植)으로 말하면 탐학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광패하기 짝이 없었는데 도(道)를 관할하면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한다면 무엇으로 남도(南道) 백성들을 위로하겠습니까? 모두 해당 형률을 적용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1. 감사(監司), 수령(守令)과 재상(宰相), 시골 토호(土豪)들이 푯말을 세우고 입안(立案)하여...

 

26.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6일 경인 2번째기사 / 군국기무처에서 김창렬, 민영준, 민형식에 대한 처벌 등의 의안을 올리다.

죄를 다스리라는 처분을 이미 받았으니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체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 민영준(閔泳駿)과 민형식(閔炯植)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윤허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빨리 전하의 마음을 돌려서 여론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에 대해 비답하기를, "공론(公論)이 그러하니 응당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27.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7일 신묘 1번째기사 / 민영준, 민형식을 위리안치하라고 명하다전교하기를, "귀양 보낸 죄인 민영준(閔泳駿)과 민형식(閔炯植)의 일에 대하여 공론이 이러하니, 모두 위리안치하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28.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12월 27일 기사 2번째기사 / 총리대신이 영남 지방 관리들의 정사의 평가를 보고하고 그 처벌을 아뢰다.

閔炯植)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세 도(道)에 다 미쳤는데 탐오한 돈이 72만 1,277냥입니다.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의 책임은 더없이 중요한데도 백성을 학대하고 나라를 저버린 것이 대번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없이 통분하여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해당 아문(衙門)에서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고 탐오한 돈은 받아내어...

 

29.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6월 20일 기축 2번째기사 / 안경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2품 이윤용(李允用)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조병직(趙秉稷)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민형식(閔亨植)을 왕후궁 대부(王后宮大夫)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에게 임시로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의 사무를 대리하라고 명(命)하였다.

 

30.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7월 3일 신축 2번째기사 / 법부에서 6월 27일 조칙에 의하여 민영준 등 19명을 석방하다.

조병식(趙秉式), 민영주(閔泳柱), 민형식(閔炯植), 김세기(金世基), 민병석(閔丙奭), 이용태(李容泰), 김문현(金文鉉), 이용직(李容直), 조필영(趙弼永), 조병갑(趙秉甲), 민응식(閔應植), 김창렬(金昌烈), 조만승(曺萬承), 임치재(任穉宰), 서정철(徐廷喆), 심능필(沈能弼), 조준구(趙駿九), 민영순(閔泳純) 외 260명을 방송(放送)하자는 뜻으로 아뢰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31.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 민영준과 민형식에 대한 형벌을 법대로 할 것을 명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민영준(閔泳駿)과 민형식(閔炯植)의 범죄가 매우 엄중하지만 섬에 귀양 보내는 가벼운 처벌을 주었다. 그런데 사면하는 은전〔赦典〕을 그들에게까지 함께 주었으니 형벌을 잘못 적용한 것을 면할 수 없다. 모두 법부(法部)에게 법대로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32.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6일 양력 3번째기사 / 민영준, 민형식을 정배하라고 명하다.

민영준(閔泳駿), 민형식(閔炯植)을 교동군(喬桐郡)에 유십년(流十年)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법부(法部)에서 칙교(勅敎)를 받들고 징역십년(懲役十年)으로 조율(照律)하였는데 특지(特旨)로 유배(流配)로 바꾼 것이었다.

 

33.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5월 22일 양력 1번째기사 / 민영준과 민형식을 석방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참작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교동군(喬桐郡)에 10년 유형(流刑)을 지고 간 죄인 민영준(閔泳駿)과 민형식(閔炯植)은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34.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8월 27일 양력 2번째기사 / 이근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종2품 이근명(李根命)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규장원 직학사(奎章院直學士) 민형식(閔亨植)을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정낙용(鄭洛鎔)을 인산(因山) 시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35.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9월 1일 양력 4번째기사 / 이헌직 등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다.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김석진(金奭鎭)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김영목(金永穆), 종2품 윤길구(尹吉求)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한성근(韓聖根), 종2품 민형식(閔炯植), 종2품 민병한(閔丙漢)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36.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9월 18일 양력 3번째기사 / 조정구와 민형식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다.

종2품 조정구(趙鼎九)와 종2품 민형식(閔亨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7.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12월 9일 양력 4번째기사 / 김영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종필(趙鍾弼), 정2품 김세기(金世基)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김완수(金完秀)를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특진관(特進官) 민형식(閔亨植)을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에, 특진관 조정구(趙鼎九), 종2품 조정희(趙定熙), 종2품 김학수(金學洙)를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38.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4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 조병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형식(閔亨植)을 궁내부 특진관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김완수(金完秀)를 경모궁 제조에, 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 이은용(李垠鎔)을 사직서 제조에, 종2품 송도순(宋道淳)을 태자궁 시강원 첨사(太子宮侍講院詹事)에, 종2품 김영목(金永穆)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3품 주석면(朱錫冕)을 법부 형사 국장(法部刑事局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39.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20일 양력 4번째기사 / 빈전에서 별전을 지낼 때의 찬례 이하에게 시상하다.

이하와 황태자(皇太子)가 별전을 행할 때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贊禮)인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병직(趙秉稷), 비서승 겸장례(祕書丞兼掌禮) 조병필(趙秉弼), 대축(大祝) 박창서(朴昌緖), 집례(執禮) 장승원(張承遠), 예모관인 부첨사(副詹事) 심상찬(沈相瓚), 상례(相禮) 민형식(閔衡植)에게 가자(加資)하였다.

 

40.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2월 5일 양력 5번째기사 / 이주영을 궁내부 특진관에, 민형식을 시강원 첨사에 임명하다.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이주영(李胄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從二品) 민형식(閔亨植)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였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41.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2월 10일 양력 5번째기사 / 부알례와 친제 때의 종헌관 이하와 혼전의 향관과 산릉의 수릉관, 각 차비관 이하에게 시상하다. 민형식(閔亨植), 신련 배종 부첨사(神輦陪從副詹事) 김석규(金錫圭), 상례(相禮) 조중목(趙重穆),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명규(金明圭), 전사관(典祀官) 조진만(趙鎭萬), 대축(大祝) 신대균(申大均)·최창부(崔昌溥)·이석종(李奭鍾), 좌장례(左掌禮) 이승구(李承九), 우장례(右掌禮) 김규형(金奎馨), 별군직(別軍職) 정기택(鄭騏澤), 호위대 부위(扈衛隊副尉) 민준식(閔峻植),...

 

42.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5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 민형식, 이은용, 민영돈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하다.

[음력 무술년(戊戌年) 윤3월 11일] 종2품(從二品) 민형식(閔亨植)·이은용(李垠鎔)·민영돈(閔泳敦)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43.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7월 27일 양력 3번째기사 / 민형식을 회계원 경에 임명하다.

종2품(從二品) 민형식(閔亨植)을 회계원 경(會計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44. 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 9월 8일 양력 1번째기사 / 민병승과 민영주를 궁내부 특진관에, 민형식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하다.

종2품 민병승(閔丙承)과 민영주(閔泳柱)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민형식(閔炯植)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45.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2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 민형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형식(閔衡植)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조종필(趙鍾弼)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박봉빈(朴鳳彬)을 함경남도 관찰사에, 부첨사(副詹事) 조민희(趙民熙)를 평안북도 관찰사에, 나주 군수(羅州郡守) 김직현(金稷鉉)을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6.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4월 25일 양력 1번째기사 / 이경직을 성균관장에 , 민형식을 학부 편집국장에 임명하다.<---  이것이 이상설이 1900년에 정부 첫 수학교과서 저자로 산술신서를 쓰는데 최적의 저자로 추천된데 관련이 있습니다.

학부 편집국장(學部編輯局長) 이경직(李庚稙)을 성균관장(成均館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봉상사 부제조(奉常司副提調) 민형식(閔衡植)을 학부 편집국장에 임용하고 주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47.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7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 / 민형식을 의정부 총무국장에 임명하다.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민형식(閔衡植)을 의정부 총무국장(議政府總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48.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8월 24일 양력 2번째기사 / 서상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원수부 검사국장(元帥府檢事局長)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조종필(趙鍾弼)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은용(李垠鎔)을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민형식(閔亨植)을 황해도 관찰사에, 안동 군수(安東郡守) 정세원(鄭世源)을 평안남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4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2월 19일 양력 4번째기사 / 정월 초하룻날에 축하드릴 때와 전당에 앉아서 축하를 받았을 때의 각 차비관 이하에게 시상하다

이용직(李容稙)·김사철(金思轍), 독옥책관(讀玉冊官) 권응선(權膺善)·정우묵(鄭佑默), 선전관(宣箋官) 민상현(閔象鉉), 계상 집례(階上執禮) 민형식(閔衡植), 예모관 첨사(禮貌官詹事) 이주영(李胄榮), 대거(對擧) 부첨사(副詹事) 이용태(李容泰)·윤달영(尹達榮)·이호성(李鎬性), 상례(相禮) 조동완(趙東完), 별간역(別看役) 강건(姜湕)·김효익(金孝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5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1일 양력 3번째기사 / 조정희를 비서원 경에, 민형식을 판리(辦理)공사에 임명하다<--  이것이 법관 양성소와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정2품 조정희(趙定熙)를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민형식(閔衡植)을 판리공사(辦理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From:배병호

Sent: Friday, January 13, 2017 11:01

To:Sang-Gu Lee

Subject: RE: 배 교수님, 감사합니다. Re: 연구계획서, 다행이 부재의 법학 공부 기록이 몇가지 더 있어서 제안서에 쓸 내용이 더 많아진 듯합니다.

 

이 교수님께

열정적인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보재선생의 법학관련 자료를 저에게도 주시면 법학 만초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집에서 갑오경장 후 조선의 제1호 법률로써 1895.3.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의 시행과 관련된 관련 문서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고종 실록이 없고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의 관련 문헌 등이 소실되거나 보존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김효전교수님의 책에도 그 부분에 관한 자료가 없습니다.

법학 만초의 저술 시기는 십간섭, 조세론, 국가론, 법률조례 등의 저술시기와 유사할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저술의 제작시기가 다른 저술에 나타나 있기를 바랍니다. 일단 부재선생의 법학연구의 틀을 분석하면서 법학만초에 초점을 맟추고 그 의의를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주제를 같이 연구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만나 다른 저술에 대한 자료를 보고 방향을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참고로 어제 진천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진천의 보탑사 등 진천에서의 하루 관광 거리는 충분합니다.

배 병호 드림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Sang-Gu Lee <sglee@skku.edu>
받는사람: 배병호 <bbh0358@daum.net>
참조: 이재화 <jhlee2chn@skku.edu>, 김채식박사 <mittsso@hanmail.net>
날짜: 2017년 1월 13일 금요일, 10시 11분 13초 +0900
제목: 배 교수님, 감사합니다. Re: 연구계획서, 다행이 부재의 법학 공부 기록이 몇가지 더 있어서 제안서에 쓸 내용이 더 많아진 듯합니다. ^^

배 교수님,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Proposal 양식이 저희 자연계 양식과 비슷하여, 계획대로 준비하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상설의 법학교육에 대하여 아래에 증빙을 일부 찾아서 보내드린답니다.

다행이 보재의  법학공부 기록이 몇 가지 더 있어서 제안서에 쓸 내용이 더 많아진 듯합니다. ^^

 

국제 법을 역술한 <십간섭(十干涉)>을 비롯하여  ...  계약법 등의 법률인 <법학민초>ㆍ<조세론>ㆍ정치학인 <국가론>ㆍ <법률조례>

 

멋진 연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상구 올림

 

 .....시절에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서순만, 이범세 등과 어울려 한학 뿐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하였다.....되던 해인 1885년에는 이들과 신흥사에서 8개월간 합숙하며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보재(溥齋, 이상설)의 학우는 자신(이시영)과 그의 백형인 회영을 비롯하여 남촌의 3재동으로 일컬었던 이범세, 서만순과의 만남이요, 주옥같은 글씨로써 명필로 이름을 남긴 조한평, 한학의 석학인 여규형, 절재로 칭송되던 시당 여조현 등이 죽마고우이었고, 송거 이희종과는 결의형제의 맹약까지 한 사이였다. 또한 보재는 학우 간에서 선생 격이었기에 그 문하생으로는 우하 민충식 등 7,8명이나 있어 동문수학자는 17,8명이나 되었다.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주석 7) 참고문헌: 7> 이완희, <보재 이상설선생 전기초>, 여기서는 윤병석, 앞의 책, 12~13쪽. 

6> 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11쪽, 일조각, 1998. 

이회영은 이상설과 더불어 인근의 영재들과 함께 한학과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10대를 보내었다. 

 

‘이상설, 불꽃의 시간’은 구한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인이자 민족교육자, 근대 수학교육의 선구자인 이상설(1870∼1917)의 일대기를 그린 2부작 다큐멘터리다. 그는 독립운동사의 가려진 전략가이자 불운한 시대의 천재, 고종의 외교특사였지만 순종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됐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장원급제한 유학자이면서도 법학, 정치, 수학, 과학 등 근대 학문의 선구자이자 민족교육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이상설, 그 너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여규형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남부 호현방 회동(현 중구 회현동 일대)에 살고 있었다. 근처에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였던 이상설과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등이 살았다. 따라서 7촌 조카인 여준을 이들에게 소개하고 어울리게 하였던 것이다. ...

 

여준은 신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과거준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7세가 되던 1888년에 여준은 관학인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재학하는 유생을 대상으로 치루는 응제(應製)에 응시하였다. 이 당시 그는 여규형의 주선에 의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한학 공부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준은 더 이상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것은 당시 여규형의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896년 여준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관직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죽마고우’로 지낸 이상설이 1896년 성균관 관장이 되며 동문수학한 여준과 고향 친구인 위당 안숙을 발탁하여 성균관 직원에 임명한 것이다. 이상설은 새롭게 개편된 성균관에서 전통적 유학 과목이 아닌 새로운 과목을 가르칠만한 사람으로 함께 신구학문을 공부하고 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여준이 적임자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준의 관직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설이 한 달 만에 성균관 관장에서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과 이어 벌어진 을미사변 등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또 아관파천으로 조선에 러시아의 간섭이 심화되고 친러세력이 득세하였다. 이때 지방 유림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을 일으켜 봉기하였으며, 개화세력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외세 배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국 속에서 1898년 9월 여준은 이상설, 이회영 등과 함께 남산의 홍엽정에 올라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국을 토로하며 그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우선 이천만 동포를 깨우치고 일으켜 세워 민지(民智)를 계명하고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 문화가 발전하고 풍기가 선명해져서 독립과 자유가 완전해지고 세계열강과 나란히 경쟁한 다음에야 보국안민을 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이상설의 집에 서재를 만들어 수시로 회합을 가지며 정치, 경제, 법률, 동서양사 등 신학문에 관한 책들을 강독하며 서로 열띤 토론도 하였으며 신학문 서적을 번역도 하였다. 또한 개화 혁신을 통해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방도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며 국가의 자주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도 마련할 계획도 세웠다.

 

이와 함께 여준은 중국의 양계초(梁啓超)가 지은「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애독하였다. 당시 개혁적 자강운동가들은 나라를 구하고 자강혁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위한 방략을 사회진화론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음빙실문집」을 통해서였다. 여준도 이 책을 통해 국가의 자강혁신을 위한 방법을 구하려 한 것이다.

 

2. 교육활동을 통한 구국운동

 

1) 서전서숙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과정에서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들은 당시 민중의 태도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그것은 처음에 상소운동과 가두연설을 통해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려하였지만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운동 방향을 먼저 백성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육계몽에 눈을 돌렸다.

 

여준․이상설․정순만․이동령 등도 황무지 개척권 양여 반대 운동과 을사조약 강제 체결 반대 운동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교육을 위해 1906년 10월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던 것이다.

 

여준이 민족교육활동을 위해 용정으로 가게 된 계기는 이상설․이회영 등과의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상설은 을사조약 파기운동 후 자택에 은거하며 표면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은밀히 이회영․여준․이동녕․유완수․장유순․이시영 등과 의논하여 국외 망명과 구국운동의 새 방략을 계획하였다.

 

이상설은 이동녕 등과 함께 1906년 음력 4월 하순경 비밀리에 조국을 떠나 상해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이상설의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황달영․정순만․김우용․홍창섭 등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북간도 중에서도 한인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갔다.

 

이상설 등의 일행은 용정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서 제일 큰집인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 1906년 10월경 건물을 개수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때 학교이름을 서전서숙이라 한 것은 ‘서전’이 그곳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전서숙을 세우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관헌의 검문을 피하기 위하여 가명을 사용했다. 정순만은 왕창동, 이상설은 이당, 이동녕은 이량, 여조현은 여준, 박정서는 박무림, 김우용은 김동환, 황달영은 전공달 등으로 바꿔 사용하였다.

 

서전서숙은 처음 학교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금을 내어 운영하였다. 이상설이 5,000원, 이동녕이 3,000원, 정순만과 황달영이 각각 500원을 김우용이 300원, 홍창섭은 100원을 부담하여 무상으로 교육하였다. 학교는 이상설이 숙장으로 총괄하며 이동녕, 정순만등과 함께 운영하였다.

 

여준이 언제부터 용정에 가서 서전서숙의 교육활동에 참여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다음해 4월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1907년 일제 통감부가 용정에 설치한 간도파출소 소장의 보고서를 보면 서전서숙의 창립에 관여한 사람으로 이상설․이동령․황달영․홍창섭․정순만․김동환을 거론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설 다음으로 숙장을 지낸 여준은 제외되어 있어 나중에 합류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1907년 헤이그특사 3사람 중 유일하게 국내에 있었던 이준을 블라디보스톡으로 안내한 사람이 여준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이회영은 헤이그 특사 파견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이상설이 특사로 가게 되어 숙장을 그만두게 되자 여준을 만주로 보내 서전서숙의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여준은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결정되어 서전서숙을 떠난 이후에 참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이준이 국내를 떠난 때인 1907년 4월 21일 이후 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전서숙의 교육은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개숙하였으며 처음에 학생들을 갑, 을반으로 나누어 갑반을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등반이었다. 폐교당시 학생수를 보면 갑, 을, 병으로 나누어 모두 74명이었다. 가르친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근대적 학문이었다. 이상설은「산술신서」상․ 하권을 저술하여 갑반의 산술을 가르쳤으며,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술, 여준은 한문․정치학․법학 등을 가르쳤다.

 

1907년에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숙장을 그만두고 학교에서 떠나면서 학교 사정은 어려워졌다. 거기다가 이상설은 헤이그특사 활동비를 학교 재정에서 충당하였다. 여준이 2대 숙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학교는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져 갔다. 결국 서전서숙은 학교운영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숙장인 여준과 남은 교원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서숙의 갑반 학생을 거느리고 훈춘현 탑두구로 이주하여 서전서숙을 재건립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학생을 더 모집하여 3개 반 74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1년간 단기 속성과정으로 수업을 마치고 모두 졸업시키고 완전 폐교하였다. 서전서숙은 개숙하여 1년도 안되는 시기인 1907년 8, 9월경에 폐숙하였다. 서전서숙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속되었지만 간도 지역의 민족 교육의 선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오산학교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어 여준이 국내에 돌아왔을 때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화 되어 거의 식민지 단계에 접어들 때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교육을 통한 자강혁신만이 쓰러져가는 국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여준이 서전서숙에서 교육활동을 위해 용정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상동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는 귀국하자마자 1907년 4월에 상동청년회와 관서지방 기독교도가 주축이 되어 창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여준은 신민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며 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있던 이승훈과 연결되어 오산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승훈은 먼저 초등학교 과정의 강명의숙을 세워 신교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중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그 해 12월 24일 오산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설립한 후 교원으로 신구학문에 조예가 깊은 여준과 육군연성학교를 마친 서진순을 초빙하였다. 당시 이승훈은 개혁적 자강론의 입장에 서서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여준의 사상의 바탕이 되는 사회진화론적 입장과 어느 정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어 이 학교 교원으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여준은 오산학교에 부임하여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을 읽고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 부임한 여준은 수신 ․ 역사 ․ 지리 ․ 산술 ․ 대수 ․ 국가학 ․ 법학통론 ․ 한문 ․ 헌법대의 등을 맡아 가르쳤다. 여준은 이상설 등과 오랫동안 신학문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오산학교 학생들에게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독립운동의 선구자> 이상설 평전/[3장] 학문연찬과 출사 시기 2016/06/26 08:06 김삼웅 


이상설이 출사하여 활동할 때는 점차 국운이 기울어 경각에 이르고 있었다. 500년 조선왕조는 외세의 침탈에도 이를 막아낼 기력을 상실한 채 허우적거렸다. 이상설은 신학문을 공부하고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익히는 당대 청년 중에는 보기드문 학식과 어학 실력을 갖췄다. 



신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습득하면서 간간히 미국인 선교사로서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고종의 외국인고문과 한성사범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헐버트(H.B.Hulbert) 박사에게 배웠다. 두 사람이 친교를 맺고 뒷날 헤이그 사행(使行) 때 헐버트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맺은 교분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상설이 신학문을 수학할 때 쓴 것으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국제법을 역술한 <십간섭(十干涉)>을 비롯하여 수학인 <수리>, 물리ㆍ화학ㆍ식물학인 <백승호초>, 계약법 등의 법률인 <법학민초>ㆍ<조세론>ㆍ정치학인 <국가론>ㆍ <법률조례>와 그의 저술인 <중학수학교과서> 등의 자료는 그의 신학문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달필로 된 한문에 간혹 영ㆍ불ㆍ일문을 주기(註記)로 섞어 쓴 이들 자료는 그 내용이 지금 보아도 전문적인 것들이다. 



이상설의 신학문은 이와 같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과학ㆍ수학ㆍ철학ㆍ종교ㆍ외국어 등 각 분야에 걸쳐 있었는데, 특히 수학과 법률에 있어서는 대가로 지칭되었다. 때문에 이상설이 애독, 소장하던 서적만도 수천 권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해외에 망명한 뒤 일제 지배연간에 거의 산실되어 버렸고 해방 후에 그의 진천 고택에 그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뒤 고물상으로 넘어가 없어질 뻔한 이 서책들을 당시 부통령 이시영이 회수하여 국회도서관에 기증, 소장하게 하였다. (주석 1)

 

한때 이상설 평전을 쓰고자 했던 위당 정인보는 보재의 학문세계를 다음과 같이 집약한다. 

문장은 경교(鯨鮫)를 넘어뜨릴 만하고, 성리는 근굴(根窟)을 뚫었다. 깊은 생각은 역학과 수학에 궁달하였고, 정치와 법률에 통하였다. 예악에는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고, 역사 지리에도 더욱 연구가 깊었다. 외국어 정도는 오히려 얕은데 속하여 스승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 러시아 학문에 통하였으니 톨스토이와도 참교하였다. (주석 2)



1904년 영국인 배설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간,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민족지이던 <대한매일신보>는 이례적으로 이상설의 학문에 관해 기사를 실었다.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ㆍ법률ㆍ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이로 말미암아 성명과 칭찬이 자심하여 한인(韓人)의 여론이 모두 말하기를, 이분이 만약 조정의 윗자리에 앉으면 문명의 정치를 가히 이룰 수 있다 한다. 이는 또한 외국 사람으로 한국에 온 이는 다 익히 들은 바다. (주석 3)

이상설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박은식ㆍ장석영ㆍ이승희ㆍ조완구 등 당대의 석학들이 높이 살 만큼 널리 인정을 받았다. 젊은 시절 막역한 학문적 동반이었던 이시영은 해방 후 귀국하여 보재에 관해 몇 가지 일화를 전했다. 



이상설이 28세 때의 일이다. 영남의 명유로 지칭되던 이승희(李承熙)가 이상설을 찾아와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벌인 바 있었다. 그때 성리학의 심오한 학리는 물론 주자(朱子)의 대혹 (大惑)한 바 까지도 논급하였다 한다.(…) “구학(舊學)에 있어서는 박흡하고 통수하여 구경백가(九經百家)를 말하듯이 기송(記誦)하여 선생(이승희)을 대할 때 항상 성리학을 강설하였고 그 유(類)가 대개 부합하였으므로 더불어 토론하여 여고(旅苦)를 잊기에 이르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사실성이 높은 것이라 하겠다. (주석 4)

이상설은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서재라는 70노인에게 불교를 강습하고,

 

일본에서 법학 (도쿄법학원 동기생 유치학, 이면우, 장도, 유창희)을 공부하고, 돌아온 <장도ㆍ이면우(1905년에 한성법학교-후에 보성전문에 흡수- 교사에 임용 )  등 유학생>들이 오히려 그에게서 강설을 들었으며, 

2> 정인보, <담원문록> 권2, 연세대학교 영인본, 1967.
3> <대한매일신보>, 광무 9년 11월 24일치, <독이참찬소(讀李參賛疏)>.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는 천주교인 방재만이 그를 찾아와 신학에 관한 토론을 듣고 탄복을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주석 5)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제1인자로 칭송되고 또한 가장 먼저 학계에 수학을 수용한 것 같다. 그 무렵 일본에서 유학한 남승희가 수학으로서는 이름이 높았으나 고등수학에 있어서 이상설이 독보적 존재로서 그는 능가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한성 법학교는 1905년 1월 전직 관료 윤덕영(尹德榮), 현직 국장 이용복(李容復)이 학교 설립을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2월 23일 현재 서울시 중구 수하동의 관립 소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시행했다. 입학 분야는 야간의 법학과와 주간의 예비보통과로 구성되었고, 입학 자격은 17세 이상이었다. 입학시험 과목은 법학과의 경우 내외국 지지(內外國地誌), 역사, 산술(筭術), 국한문 작문, 예비보통과의 경우 국한문 독서, 작문이었다.

 

한성 법학교의 교직원은 교장 현채(玄采), 교감 나수연(羅壽淵), 강사 신해영(申海永), 유치형(兪致衡), 이면우(李冕宇) 등 총 12인으로 구성되었고, 학생은 입학시험을 통해 101명을 선발하였다. 1월 25일 법학전문과의 개학식을 거행하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예비보통과는 본래 1월 26일 개학 예정이었지만, 연기하여 3월 3일 개학하였다. 

 

법학전문과의 교과목은 법학통론, 민법, 상법, 형법, 행정법, 국제법, 파산법 등 근대 법학과 함께 전통 법률인 명률(明律)이 포함되었고, 법학 외에 국가학, 경제학, 재정학 등이 있었다. 예비보통과는 국내⋅해외 지리, 역사, 물리학, 작문, 산술, 일본어를 교육했다. 1905년 2월에는 추가 모집을 통해 90여 명의 학생을 받아들여 총 200여 명의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성황에도 불구하고 학교 건물 판매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여 한성 법학교는 가을 신학기 개강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보성 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야간의 법률학 전문과를 신설하여 한성 법학교 학생 20여 명을 받아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