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진사시(進士試)

선비정신-故이장희 선균관대학교 문과대학교수

야촌(1) 2016. 9. 5. 13:01

■선비의 본의와 선비정신

 

이장희(李章熙)/1938 ~2016.06 -壽79歲

전 성균관대학교 교수.

 

목 차

Ⅰ. 선비의 정의

Ⅱ. 선비의 조신

Ⅲ. 선비의 수칙

Ⅳ. 선비의 직분

Ⅴ. 선비의 출처거취와 대사待士의 도

Ⅵ. 선비와 언로 ― 언론통색(言論通塞)과 사기(士氣)

Ⅶ. 선비정신

Ⅷ. 여언 ― 선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Ⅰ. 선비의 정의

 

나는 한때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선비에 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무수한 의병장 가운데는 무업(武業)에 종사했던 인물보다 ‘문(文)’을 업으로 삼았던 선비들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알 듯도 싶은 선비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명쾌한 대답을 하기 어렵다. 양반(兩班) 사족(士族)이라 해서 이들이 모두 선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선비가 양반사족 중에서 나올 수는 있겠으나 양반이 모두 선비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선비와 사족 양반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선비와 사족 양반을 따지기에 앞서 사족과 양반은 서로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이에 대하여 유몽인(柳夢寅)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족(士族)을 귀하게 여겨 양반(兩班)이라 부르는데, 양반이 된 자는 동반(東班/文官)과 서반(西班/武官)에 나간다." 1]

1] 柳夢寅, 『於于集』 後集, 卷4, 趙秀才書齋記라 하여 양반과 사족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선비가 양반사족 중에서 나올 수는 있겠으나 양반사족이 모두 선비가 될 수는 없다. 선비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육경(六經)중에 일경(一經)에 통달하고 육예(六藝) 중에 일예(一藝)에 능통하면 선비가 될 수 있겠으나,

 

2] 그러한 학식과 재능을 갖추지 못해서 궁마(弓馬)나 익혀 무직(武職)으로 발신할 경우, 그들이 양반사족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선비로서의 구비요건을 갖추지 못해 선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李德懋, 『靑莊館全書』, 卷21, 編書雜稿 1.宋史筌儒林傳論.

 

그렇다면 선비의 학문을 필했다고 해서 누구나 선비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선비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와 가법(家法)이 있는 것이다. 성혼(成渾)은 이에 대해 선조(宣祖)에게 아뢰기를

 

"생각건대 척리[戚里 : 예전에, 임금의 내외척(內外戚)을 아울러 이르던 말]의 사람들과 사대부(士大夫=선비)는 청탁(淸濁)의 종류가 다릅니다. 선비된 자는 지킴이 매우 엄격하여 항상 오멸(汚滅)을 받는 것을 조심해야 되고, 그들과의 교결(交結)을 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신은 선대 이래로 모두 사대부의 이름을 얻어 가법이 전해 오고 있으며, 신도 젊어서부터 수신(守身)의 의(義)를 들어 왔는데, 척리의 사람과 더불어 서로 사귀어 정(情)을 맺고 부탁함은 한 몸을 저버리고 덕(德)을 그르칠 뿐 아니라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가법과 수신의 의의 엄격함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3]成渾, 『牛溪集』, 卷3, 被論後自劾第一疏. 라 하여 선비는 청탁(淸濁)이 다른 척리와 함부로 가까이 하는 것은 수신(守身)과 가법(家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조심해야 되는 것으로, 척리는 선비 계열에서 제외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문벌가의 자제들을 사대부(士大夫 : 선비)라고 부르는 경향도 없지않으나 그것은 그릇된 말이다.

사대부는 사군자(士君子)와 같은 이름으로 외롭고 배고픈 처지에 놓였어도 마음의 생각하는 일이 얼음과 옥(玉)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수원(柳壽垣)은 마음씨가 시정배와 같고 행실이 장쾌(壯快) 같은 자가 뒤섞인 문벌자제들은 선비인 사대부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4]

 

여기에서 우리는 선비로서의 참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선비는 “몸을 닦아 행실을 깨끗이 하고 구차한 이득을 바라서는 안 되며, 정(情)을 다하고 실(實)을 다하여 남을 속이는 일을 하여서는 못쓰고, 의롭지 못한 일을 마음으로 헤아리지 아니하며, 사리에 어긋나는 이득을 집에 들여 놓지 않는 것” 5] 이 선비의 취할 바가 되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익혀 벼슬길에 나가기도 하며, 선현(先賢)의 도(道)를 터득하여 장차 벼슬길에 나가려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중종(中宗)이 “대저 재상(宰相)과 사림(士林)은 둘이 아니라 이들은 모두 사림이다” 6] 라 하여 재상과 사림을 동일하게 본 것은 선비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함을 뜻하는 것이다.

 

4]柳壽垣, 『迂書』, 卷2, 論門閥之弊.

5]『仁粹大妃內訓』(奎章閣所藏本), 卷3.

6]『中宗實錄』, 卷72, 26年 11月 乙卯.

 

Ⅱ. 선비의 조신

 

선비의 행동거지는 뭇사람들의 귀감이 되어야 하므로 예의에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거동하면 반드시 ‘예(禮)’를 생각해야 되고 일을 행하면 꼭 먼저 ‘의(義)’를 떠올려야 된다. 7] 그만큼 선비는 예와 의를 중시했다. 그러므로 선비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금물이었다.

 

선비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수는 있어도 살아서 욕되는 것을 더 꺼려하였으며, 음란하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되 기름지고 맛있는 것을 택하지 않으며, 과실이 있어도 조용히 타이르지 면전에서 꾸짖지 아니한다.8]

 

선비의 마음은 공순한 데 있으며, 9] 벼슬을 얻지 못해서 재야(在野)에서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면서 살아가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반드시 겸양의 예로서 굳건히 자신을 지켜야 하였다. 10]

또 선비가 할 일이 없어서 한가로이 지낼 때는 잡념이 생겨서 선비로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 쉬운 법이니 선비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다.11]

 

7]『春秋左氏傳』, 卷53, 昭公 31年, “君子動則思禮 行則思義 不爲利回 不爲義.”

8]『禮記集說大全』, 卷29, 儒行 第41.

9]『世宗實錄』, 卷97, 24年 8月 壬辰 “儒者其操心 固當恭順.”

10]林椿, 『西河集』, 卷6, 上吳郞中啓.

11]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0, 耳目口心書3.

 

최한기(崔漢綺)는 선비의 거처에 대하여

"선비가 거처함에는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동작과 위엄 있는 의용(儀容)이 다른 사람의 감모(感慕)를 받아야 하며, 언사와 풍채가 다른 사람을 계발시키므로 일을 행함에 그 조짐은 한가롭게 있을 때 나타나고, 도덕이 빛나는 것도 한가하게 지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12]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한 “마음은 정한 것이 있어야 하고, 꾀함은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13] 가 바로 선비가 취해야 할 태도였다. 시리(時利)를 좇아 이리 움직이고 저리 쏠리고 하는 것은 마음가짐이나 지켜야 할 자세가 아닌 것이다.

 

선비는 언행에 있어서도 말은 비록 적어도 실행하는 것은 의당 여유가 있어야 한다. 만일 말만으로 그친다면, 말은 그럴 듯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여 마치 목단牧丹이 꽃은 화려하나 열매가 없는 것과 같아서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불만으로 느끼게 된다.14]

 

12] 崔漢綺, 『人政』, 卷6, ?測人門 6, ‘相士以居’.

13]『孔子家語』, 卷1, 五儀解, “心有所定 計有所守.”

14]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 處雜稿 1歲精惜譚?.

 

이덕무(李德懋)는 선비의 조신(操身)에 대하여

 

"선비는 마음 밝히기를 거울같이 해야 되고, 몸 규제하기를 먹줄같이 해야 한다.

거울은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기 쉽고 먹줄이 바르지 않으면 재목이 굽기 쉽듯이, 마음을 밝히지 않으면 사욕이 절로 가리고 몸을 규제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절로 생기므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데도 의당 거울처럼 닦아야 하고 먹줄처럼 곧게 해야 한다." 15] 라 하여 마음을 거울에, 몸을 먹줄에 비유하여 마음을 밝히고 몸을 규제하여 심신(心身)의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이익(李瀷)도 선비의 조신에 대하여

 

"불은 본디 뜨거운 것이기 때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씨에도 뜨거운 열기가 줄어들지 않고 쇠가 녹을 듯한 무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열이 더해지지 않는다. 선비 또한 꿋꿋이 자립하기를 꼭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 “까마귀가 우는 것은 꺼억꺼억 하고 까치가 우는 것은 깍깍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들이 어찌 기후의 춥고 더움과 건조하고 습기찬 데에 따라 변하겠는가. 그러므로 선비도 일정한 의론이 있어야 하고, 여자도 변치 않는 조행(操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세상에 이익이 되는 말이다."16] 라 하여 선비의 몸가짐을 불에 비유하여 불은 추운 날씨에도 그대로 열기를 발산하고 더운 날씨에도 열이 더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비가 자립自立하는 것도 꼭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

 

15]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 處雜稿 1.戊寅篇.

16]李瀷, 『星湖僿說』, 卷23, 經史門儒行.

 

Ⅲ. 선비의 수칙

 

선비가 생명처럼 받드는 수칙은 ‘사유(四維)’이다. 사유(四維)란 『관자(管子)』 목민(牧民) 1편에 나오는 예(禮)의(義). 염(廉). 치(恥)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선비의 기본 수칙이다. 이 수칙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강조되어 왔으며, 특히 유교(儒敎)를 숭상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 더욱 그러했다.

 

사유(四維)를 강조한 이유는

 

"나라에는 사유(四維)가 있는데, 일유(一維)가 없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이유(二維)가 없어지면 위태롭고, 삼유(三維)가 없어지면 전복되고, 사유(四維)가 없어지면 멸망하게 된다. 기울면 바르게 고칠 수 있고, 위태로우면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전복되면 일으킬 수 있으나, 멸망하면 다시 회복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유(四維)란 무엇인가. 첫째가 예(禮)요, 둘째가 의(義)요, 셋째가 염(廉)이며, 넷째가 치(恥)이다. 예는 절도를 넘어설 수 없고, 의는 스스로 나갈 수 없으며, 염은 악(惡)을 가릴 수 없으며, 치는 잘못된 것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도를 넘지 않으면 윗자리가 편안하고, 스스로 나가지 아니하면 백성들이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일이 없고, 악을 가리지 아니하면 행실이 스스로 온전하며, 잘못된 것을 따르지 아니하면 간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17] 라 한바, 사유를 국운(國運)의 진퇴(進退)와 직접 연계하였으며, 그 책무는 선비들이 짊어지고 있었다.

 

조선왕조 개창과 때를 같이하여 사유를 법제화하여 백성들의 풍습을 교화시키고 선비들의 습속을 일신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갔다. "예의.염치는 나라의 사유이다.

 

국가가 창립되면 법제(法制)를 닦고 밝혀서 백성의 풍습을 교화(敎化)함으로 선비의 습속이 환연하게 일신(一新)된다."18] 라 한 것은 유교입국(儒敎立國)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이며, 예?의?염?치의 사유를 개국과 더불어 법제화하여 백성의 풍습을 교화시키고 선비의 습속을 일신하는 데 노력했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세종 때에 우사간 박안신(朴安臣) 등이 “염과 치는 선비의 대절이므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19] 라고 하여 염과 치를 철저히 지켜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사유 중에서 염과 치가 더욱 강조된 것은 조선 전기, 특히 세종(世宗), 성종(成宗) 연간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염치는 인신(人臣)의 큰 절개라 탐묵(貪墨)은 국법으로 용서받을 수 없으며, 선비된 자가 불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죄를 범하면 죽을 때까지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 20] 하였고, 또 “염치는 선비의 큰 절개(大節)이다.

 

염치가 길에 떨어지면 탐욕스러운 풍습이 날로 번성하기 때문에 이를 범하는 자는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21] 라 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염치가 선비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염치를 저버렸을 때는 평생 사람구실을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엄히 다스려 선비의 비리를 징치하였다.

 

성종도 “선비된 자가 염치가 없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22] 하였고, 정경세(鄭經世)도 “선비가 비루한 남자와 다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염?치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23]라 하여 선비와 비루한 남자의 차이를 염치의 유무로 구별할 만큼 선비된 자는 염치를 생명과도 같이 소중히 여겼다.

 

서경(署經)이란 제도적 장치를 두어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에게 비리를 조사토록 한 것도 선비의 큰 절개인 사유를 신봉하도록 하여 선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17] 『管子』, 卷1, 牧民 第1.

18]『太宗實錄』, 卷29, 15年 4月 庚辰.

19] 『世宗實錄』, 卷32, 8年 5月 癸丑, “廉恥士之大節 不可不勵.”

20] 『世宗實錄』, 卷73, 18年 閏6月 丁亥.

21]『世宗實錄』, 卷59, 15年 2月 癸丑.

22] 『成宗實錄』, 卷166, 15年 5月 己丑.

23]鄭經世, 『愚伏集』, 卷6, 乞行遺箚再箚.

 

중종(中宗)이 선비에게 교유문(敎諭文)을 내리기를

 

"학문하는 도리는 몸을 닦음에 있고, 몸을 닦는 방법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는 데 있다. 선비가 도(道)에 뜻을 두면서 좋지 않은 의복,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족히 더불어 의논할 것이 없다. 이러므로 옛날의 선비들은 학문을 몸 닦는 것으로 하고 검소하기는 행실을 가다듬는 것으로 하여,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을 먹고 포의에다 갈대 띠를 둘러매도 처신하기를 편안히 하였다.

 

부귀로서도 능히 미혹하게 못하고 빈천으로서도 뜻을 바꾸게 못하는 것이니, 곤궁해서 낮은 지위에 있으면 홀로 자기 몸을 선(善)하게 하고 현달하여 높은 지위에 있게 되면 천하를 모두 선하게 하는 것이다. 그 지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른 데 미칠 수 있겠는가." 24]

 

라 하여 선비가 학문하는 도리는 검소한 것을 숭상하는 것으로 몸을 닦는(修己) 방법을 삼아야 한다.

따라서 선비라면 맛이 없는 음식이나, 포의布衣를 입고 갈대 띠를 매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처신을 편안히 했음을 상기시켰다. 중종이 선비에게 이러한 교유를 내리게 된 것은 연산군燕山君 이후 선비들이 호의호식을 일삼고 학문의 본뜻을 그르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젊어서 좋은 의복과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성장해서 거마(車馬)나 치장하고 재물이나 축적하는 데 열을 올리는 자는 매일 경전(經傳)이나 외우고 날마다 성명(性命)이나 논한다고 해도 거짓된 것으로 이미 선비 대열에서 이탈한 자로 선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거짓 선비(假儒)로 전락한 것이다. 25] 그만큼 선비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기대승(奇大升)은 “선비의 평생의 업은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데 있지 않는 것” 26]이라 하였고, 김집(金集)은 “염치는 세교(世敎)를 깨끗이 하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것” 27]이라 하여 선비의 염?치를 중시하였다.

 

24] 『中宗實錄』, 卷8, 4年 3月 甲辰.

25] 申欽, 『象村集』, 卷53, 求正錄中, “少而欲好衣服美飮食 長而欲治車馬盛畜積者 皆非士也 有一於是 雖日誦經傳 日談性命 僞而已 人生有定分 周公之富貴 子之貧賤 皆其分也.”

26] 奇大升, 『高峰全書』 續集, 卷2, 上從兄書.

27]金集, 『愼獨齋全書』, 卷3, 辭吏曹判書疏.

 

정약용(丁若鏞)도 선비의 염치에 대하여

 

"예전부터 지혜가 깊은 선비는 염결(廉潔)로서 교훈을 삼았으며, 가난으로서 경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배협(裵俠)이 말하기를 “맑은 것은 벼슬하는 이의 근본이며, 검소한 것은 몸을 유지하는 터전이라” 하였고, 율기잠(律己箴)에는 “선비의 청렴은 여인의 정결(貞潔)과 같은 것이니 진실로 일호(一毫)의 오점이라도 있으면 죽을 때까지 흠이 된다” 하였다." 28]

 

라 하여 선비의 청렴을 여인의 정결에 비유하였으며, 배협(裵俠)의 말과 율기잠(律己箴)을 인용하여 청렴은 벼슬하는 선비의 근본이며 몸을 보존하는 터전이 된다 하고, 선비가 일호(一毫)의 오점이라도 있으면 종신토록 흠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실록이나 문집에 기록된 제가(諸家)의 사유관(四維觀)은 모두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선비가 지켜야 할 필수적 수칙임을 확신하였다.

 

28]丁若鏞, 『與猶堂全書』 第5集『牧民心書』, 卷2, 律己六條 第2, ‘淸心’.

 

Ⅳ. 선비의 직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비는 벼슬하는 것을 피하고 재야에 묻혀서 책이나 읽으면서 은일독거(隱逸獨居)하는 것이 선비의 직분(職分)으로 잘못 알고 있다.

 

고려 말기의 학자 이곡(李穀)은 선비는 “어려서 공부하고, 장년이 되어 배우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옳은 길” 29] 임을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선비의 직분은 행도(行道)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뜻있는 선비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올바른 도를 행하는 것” 30] 이다.

 

송시열(宋時烈)도 신명(身命)을 바쳐 도를 행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크게 바른 것이며 은거독선(隱居獨善)하는 것은 선비의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31]

선비가 세상을 피하여 사는 것은 현실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숨어 지내는 것이지 선비의 본분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명을 다하여 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도리이며, 선비의 직분이었다.

 

선비들의 행도(行道)는 조선왕조 전시대를 통하여 선비들이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허균(許筠)은 선비가 벼슬을 구하는 것은 그 도를 행하기 위함이며, 도를 행하지 않고 한갓 영리(榮利)만을 탐하는 것은 선비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32]

 

조선 말기에 큰 선비라고 하는 이건창(李建昌)도 “선비가 글을 읽고 몸을 닦아 행법(行法/行道)하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誼)” 33] 라 하여 선비가 벼슬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선비가 행도를 못하고 들어앉아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선비의 직분을 지키는 도리일까. 권근(權近)은 이에 대해 “현달하면 벼슬에 나가 그 도를 행할 것이며, 벼슬을 못하면 농사라도 짓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길” 34] 이라 하였다.

 

선비는 덕이 닦아지지 않음을 걱정해야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으며, 학업이 넓지 못함을 염려해야 할 뿐 맡은 일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았다.35]

 

29] 『東文選』 第46, 上政堂啓(李穀 撰), “幼而學 壯而行 斯乃業儒之義.”

30] 『東文選』 第2, 志士口與心誓守死無二賦(無名氏 撰), “志士所貴 直道而行.”

31]宋時烈, 『宋子大全』, 卷143, 梅隱堂記.

32]許筠, 『許筠全書』 『惺所覆藁』, 卷11, 文部 8, 南孝溫論, “士之求用於君者 乃欲行其道也 道不行而徒耽其榮利 則非士也.”

33]李建昌, 『明美堂集』 內集, 卷10, 文化集序?, “士之讀聖賢書 修身而行法 天下之公誼也.”

34] 『東文選』, 卷79, 農隱記(權近 撰), “達則行其道 窮則力於農 士之常也.”

35]李瀷, 『星湖僿說』, 卷17, 人事門, 士風自重.

 

선비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그 뜻을 굽혀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다. 그런 까닭에 선비가 일단 옳다고 주장하면 죽음을 택할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이(李珥)가 “선비의 도를 구함은 그 뜻을 구함에 있다” 36] 라고 한 말은 선비의 뜻이 소중함을 언급한 것이다.

 

선비의 마음은 순수하고 정직해서 꾸밈을 일삼지 않는다. 선비에게 가식이란 용납되지 않고 위선이란 있을 수 없다. 본받을 사람을 만나면 좇아서 배우는 것이 선비이다. 37] 선비는 자신의 몸을 잊고 충성을 다하여 말이 귀에 거슬려도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다.38]

 

선비는 벼슬을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義)를 저버리지 않고 때를 만나서 출세해도 백성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선비의 도를 이탈하지 않는다.39] 즉 선비는 그 본성을 잃지 않고 지조를 삼가 지킨다. 선비는 시세(時勢)의 이불리(利不利)를 좇아 가볍게 옮겨 다니지 않는다.40]

 

선비는 벼슬을 못해서 극도로 궁핍해도 그 뜻은 더욱 엄격하며 그 절개 또한 더욱 뛰어나게 된다.

일시에 가난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그 지킴을 손상시켜서는 선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41]

 

선비의 뜻은 홍대강의(弘大剛毅)해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선비는 포부가 크고 강인해야 큰 뜻을 이룰 수 있다.42]

 

36]李珥, 『栗谷全書』 拾遺, 卷3, 送李春卿序, “求士之道 在於求其志而已.”

37] 成俔, 『虛白堂集』, 卷11, 浮休子談論 2, 雅言, “大抵君子 其心純正 不事矯飾 當仁而仁 當義而義 當廉而廉 當恥而恥 隨其

所遇 善端發見人 則從而學之.”

38] 『成宗實錄』, 卷112, 10年 12月 丙寅, “司憲府大司憲金良璥等……上疏曰 臣等竊聞 士不忘身不爲忠 言不逆耳不爲諫.”

39]『孟子集註大全』, 卷13, 盡心章句上.

40]李珥, 『栗谷全書』, 卷18, 嵩善副正墓誌銘, “志士有守 居不能移.”

41]李滉, 『退溪全書』, 卷33, 答金應順, “觀古之士 其窮愈甚 其志益 其節益奇 若因一困拂 而遽喪其所守 則不可謂之士矣.”

42]『論語注疏』, 卷8, 泰伯?,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Ⅴ. 선비의 출처거취와 대사待士의 도

 

1. 선비의 출처거취

 

선비는 벼슬에 나가든 재야에서 은일독거를 하든 명분과 목표는 뚜렷해야 한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임금에 신명(身命)을 바쳐 백성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벼슬자리에 앉아 자기의 뜻을 간언하되 말이 쓰이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옳지 못하며 물러나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한 결단은 어디까지나 본인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이며, 남을 따라 물러나서는 안 된다.43]

 

송시열은 선비의 출처(出處)에 대하여

 

"선비가 벼슬에 나가는 것과 들어앉아 있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역량을 헤아린다든가, 아니면 세상 형편이 좋고 나쁜데 달려 있는 것이니 나쁘다고 판단될 때는 들어앉고 좋다고 판단되면 나가서 도를 행하면 된다." 44]

 

라 하여 자기의 역량이나 세상 형편에 따라 스스로 출처를 결정지을 문제라고 하였다.

역량이 부족한데도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자리에 나가서는 안 되며, 반대로 역량이 넘치는데도 낮은 벼슬자리를 무턱대고 받고 보자는 식의 태도를 취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또 척리나 간신배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전권을 장악하고 있어 정론(正論)이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곧은 선비가 정사에 참여해 봤자 경륜을 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는 벼슬하는 선비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으며, 벼슬길에 들어서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선비는 출처거취가 분명해야 된다.

출처거취가 불분명하면 선비로서의 신의(信義)를 잃게 되고 뭇사람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

 

조식(曺植)은 일찍이 문인(門人)인 김우옹(金宇顒)에게 " 내가 평생 잘하는 일이 한 가지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차하게 추종하지 않는 것인데, 그대는 그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지 않은가." 45] 라고 하였고, 또 문인 김우옹과 정구(鄭逑)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출처에 있어서 다소 보는 점이 있어 내가 마음을 놓는 것이다.

 

사군자(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46] 라고 한 것을 보면 선비가 출처거취를 옳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43]李珥, 『栗谷全書』, 卷29, 經筵日記 2, 宣祖 9年 8月.

44]宋時烈, 『宋子大全』 附錄, 卷15, 語錄 2(李錄).

45]金宇顒, 『東岡集』, 卷17, 南冥先生言行錄, “謂宇曰 吾平生有一長處 抵死不肯苟從 汝尙識之.”

46]金宇顒,『東岡集』, 卷17, 南冥先生言行錄, “又語宇ㆍ逑曰 汝等於出處 粗有見處 吾心許也 士君子大節 唯在出處一事而已.”

 

김장생(金長生)이 “선비의 출처는 사람의 큰 절개이다” 47] 라고 한 것도 조식이 말한 “사군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라 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으로 보아 선비의 출처관은 선비들의 공통된 견해임이 확인된다.

 

선비 출처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선비가 벼슬에 나가고 안 나가는 문제는 경솔하게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다. 48] 벼슬에 나가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국가에 대해서 ‘이(利)’가 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정치 상황으로 보아 자기가 내세우는 뜻이 조정에 수용될 수 있는 지의 여부도 판단해야 될 것이다.

 

선비는 때를 못 만나면 은거하는 길밖에 없다.49]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두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자신이 벼슬에 나갈만한 학덕(學德)을 쌓았음에도 과거에 낙방을 했거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타의적인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자격 요건은 갖추고 있으나 시세(時勢)의 돌아가는 상황이 벼슬에 나가기에는 온당치 못하다는 자의적인 판단에서이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이(李珥)에게 묻기를 "선비가 물러나서 쉬고 있으면서 시세가 결코 나갈 수 없음을 알고 있는데, 만약 왕의 소명이 있다면 부득불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소." 50] 라고 하자, 이에 이이가 대답하기를

 

"나갈 수 없다고 생각이 굳다면 어찌 허겁지겁 나갈 것이겠소.

혹 나가는 자도 까닭이 있어 만에 하나 바라는 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소." 51] 라고 하였다.

 

선비가 벼슬살이 하려면 조정에 나가는 것이며, 벼슬이 싫거나 벼슬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고 은퇴하는 것은 때를 만나고 못 만나는 데 달려 있다. 벼슬에 나갈 만한 때를 만났는데도 은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벼슬에 나갈 만한 때가 아닌데도 벼슬하는 것 또한 선비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52]

 

47]金長生, 『沙溪全書』, 卷4, 答金問目, “士之出處 人之大節.”

48]『明宗實錄』, 卷11, 6年 2月 辛未, “史臣曰 去就士之大節 其去也不可輕 其就也亦不可輕也 旣不能善其去 則無怪乎就之輕

也.”

49]洪大容, 『湛軒書』 內篇, 卷3, 石居小記, “士大夫不遇於時 則隱而已.”

50] 李珥, 『栗谷全書』, 卷29, 經筵日記 2, 宣祖 6年 12月, “鄭仁弘謂李珥曰 士在退休之地 雖決知時勢之不可有爲 若被召命 則不得不來乎.”

51]李珥, 『栗谷全書』, 卷29, 經筵日記 2, 宣祖 6年 12月, “珥曰 決知不能有爲 則豈可往來屑屑乎 所以或來者 以其有萬一之望

也.”

52] 尹善道, 『孤山遺稿』, 卷5 下, 送張翰歸江東序, “士君子生斯世 出與處而已矣 出處之道 時而已矣 時可出而處 則非道也 時可處而出則亦非道也.”

그렇다면 때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윤선도(尹善道)는 위로는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는 명철함’(知人之哲)과 ‘다른 사람을 쓸 수 있는 성의’(用賢之誠)가 있어서 뚜렷이 큰 마음을 보여 주어, 비(卑=낮은 벼슬아치)와 존(尊=왕이나 고관)을 넘을 수 있게 하고, 소(疏)가 척(戚=戚里)을 넘을 수 있으며, 매양 어진 이의 재능을 생각하며, 넓은 도량으로 자기의 주장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도량을 따라야 한다.

 

한편 아래로는 ‘선(善)을 좋아하는 덕’(好善之德)을 갖고 다른 사람의 기능을 본받아 그를 시기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을 섬기는 도리’(事君之道)를 다할 수 있게 하여 ‘벼슬아치들끼리 협심하여 공손히 하는’(同寅協恭) 미덕을 기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벼슬에 나갈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이며, 반면에 이와 반대인 경우에는 선비가 벼슬에 나갈 시기가 아니어서 은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였다.53]

 

선비가 집에서 몸을 닦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홀로 몸을 선하게 하려는’(獨善其身) 것이 아니며,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예전부터 선비가 강호에 묻혀서 농사나 짓고 살려 한 것은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라, 벼슬을 하면서 진언을 해서 옳은 정치로 이끌어 가려 해도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54]

 

선비의 출처에는 반드시 목표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벼슬길로 들어설 때는 목표가 뚜렷해야 되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는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이는 선비의 출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대저 참된 선비는 벼슬에 나가면 일시에 도를 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화락하게 지내는 즐거움(熙之樂)을 갖도록 할 것이며, 벼슬에서 물러나면 만대(萬代)에 가르침을 남겨 배우는 자로 하여금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벼슬에 나가서 행할 만한 도가 없고 물러나서 수범이 될 만한 가르침이 없다면 비록 참 선비라고 자처할지는 몰라도 나는 그런 것을 믿을 수 없다." 55]

 

우리는 위의 선비의 도리를 밝힌 글에서 보듯이 참 선비라면 벼슬에 나가 백성들을 화락하게 하여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오래 오래 수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남길 수 있어야만 선비다운 선비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윤선도는 선비의 출처에 대하여

 

"선비의 처세는 진실로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가서도 안 되며, 또한 구차한 변명으로 물러나서도 안 된다.

벼슬에 나가면 의당 이욕을 탐내는 것을 조심해야 되고, 물러가서는 마땅히 세상일을 잊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

 

이 마음은 늙기까지 경경(耿耿)하여 그 형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56]라 한바,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가거나 구차한 변명을 들어 물러나서도 안 된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이욕(利慾)을 탐내지 말 것이며,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세상일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53]尹善道, 『孤山遺稿』, 卷5 下, 送張翰歸江東序.

54]成渾, 『牛溪集』, 卷2, 辭召命疏.

55]李珥, 『栗谷全書』, 卷15, 雜著 2, 東湖問答, ‘論東方道學不行’.

56]尹善道, 『孤山遺稿』, 卷4, 上白軒相公書.

 

그러나 선비의 거취는 선비라고 해서 모두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다. 선비에게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있게 마련이어서 군자와 소인의 거취가 일치할 수 없다. 그러면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살펴보자.

 

군자는 벼슬에 나가는 시기는 같지 않지만, 벼슬에서 물러갈 때는 행동을 함께한다. 이에 반해서 소인은 벼슬에 나갈 때는 행동을 함께하지만 물러나는 시기는 각기 다르다.

 

그 이유는 군자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서로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벼슬에 나가는 때가 다른 것이며, 정치 판세가 잘못 돌아가면 의義로 보아 벼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옳지 못한 까닭으로 일시에 함께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소인은 뜻을 얻으면 이(利)를 먼저 생각해서 함께 벼슬에 몰려 나가게 되고, 비록 벼슬살이가 양심상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어도 구차하게 계속 벼슬자리를 지키며 물러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군자와 소인이 벼슬에서 물러가는 시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57]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예를 오건(吳健)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오건은 조식의 문인으로 늦게 문과에 급제하여 발신의 기회를 얻고 하기 어려운 이조정랑에 올랐다.

그는 공도公道의 회복을 위해 이조정랑으로서 거리낌 없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으며, 이를 보다 못한 노진(盧 禛)이 그에게 마음을 너그러이 하여 인심에 부응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아 사람들의 원망은 더욱 커졌고, 왕으로부터 다른 선비들까지 좋아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58]

 

오건은 초모(草茅)에서 발신하여 청현직(淸顯職)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조정랑에 이르렀다면 앞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 높은 벼슬까지 길이 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관(史官)되기도 거절하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할 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면 도를 현실 정치에 반영할 명분을 잃게 된다. 그래서 선비는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며 선비가 취할 정도인 것이다. 따라서 오건은 선비의 바른 길을 지킨 인물로 후대까지 칭송을 받는 것이다.

 

김창협(金昌協)이 “사사로이 보건대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조정의 선비가 벼슬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작록(爵祿)을 품고 왕의 고임을 탐하여 정치를 그르친 자는 많았으나 결연히 용퇴하여 부귀를 저버린 자는 손가락으로 헤일 정도” 59] 라고 한 것을 보면 오건과 같이 곧은 말을 하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선비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57]時烈, 『宋子大全』 附錄, 卷18, 語錄下(崔愼錄).

58]李珥, 『栗谷全書』, 卷29, 經筵日記?2, 宣祖 5年 閏2月.

59]金昌協, 『農巖集』, 卷7,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2. 대사(待士)의 도

 

어진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정사에 참여하는 데는 왕이 선비를 아끼고 신뢰하는 바탕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비들의 간언(諫言)을 들어주어 정책에 반영시키고 정당한 진언(陳言)을 가납한다면 재야에 숨어 있던 선비들도 자청하여 조정에 나가기를 즐겨할 것이며, 반대로 왕이 선비를 싫어하고 그들의 정당한 간언을 기피한다면 조정에 벼슬하는 선비들도 물러나 임하(林下)에 묻혀 지낼 것이다.

 

따라서 조정에서 현인군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선비 행세를 하는 가짜 선비(假儒)들만의 득세로 정국은 혼미가 거듭될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어진 선비가 가장 많이 배출된 것은 세종?문종 양대와, 성종?중종 대가 꼽힐 것이다.

 

그런데 성종 때 양성된 선비는 연산조 무오戊午). 갑자(甲子) 두 사화(士禍)에서 많은 선비가 희생됨으로써 빛을 보지 못했고, 중종 시기는 반정反正 후 어진 선비를 우대하여 기용함으로써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싶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직 세종, 문종 연간에 배양된 선비들은 당대뿐 아니라 수대에 걸쳐서 문치(文治)의 기틀을 튼튼히 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여 어느 시대보다도 선비의 배출이 제일로 꼽힌다.

김창협이

 

"본조(本朝)의 치화治化는 세종, 문종 양대만큼 번창한 때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준재(俊才)들이 호응하여 모여드는 것이 구름 일어나듯 하였고,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을 하는 선비들이 뛰어나고 커서 어깨를 견주어 조정을 세우며 공명을 스스로 분발하여 이루었으니, 천 년에 걸쳐서 한 때 있는 일이다." 60] 라 한 것이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는 세종과 문종이 선비를 우대하는 극진한 정성으로 얻은 결실이었다.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이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그러한 큰일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문종 양조의 선비 양성에서 절의사상(節義思想)이 고조되지 않았던들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비를 아낄 줄 아는 왕은 총명이 없이는 안 된다. 왕이 아둔하면 조정에는 아첨하는 무리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조식은 명종(明宗)의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대저 임금이 총명하면 신하도 충직하기 마련이며, 임금이 아둔하면 아첨을 하게 됨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옵니다. 예전의 임금은 친히 신료를 만나되 친구 같은 느낌을 주어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익히고 밝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정의(情意)만은 서로 통해서 위아래가 서로 사귀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61]

 

라고 하였다. 조식은 이렇게 직언한 뒤 벼슬을 물리치고 향제로 돌아갔지만, 그의 간언 중에는 받아들일 것이 많다. 임금이 총명해야 아첨하는 신하가 나오지 못하며, 왕과 신료가 서로 정의를 나누는 데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누가 왕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조식과 같은 고매한 산림처사가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다.

 

송시열도 “임금과 신료의 관계는 비록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같음이 있으나 그 정의만은 서로 꼭 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왕과 신료가 정의를 털어놓고 말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깊이 간직한 충언도 서슴없이 진언하여 왕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특별히 어진 선비를 대접하는 것은 어진 이를 천지를 운행하는 원리로 생각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뛰어난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은 작록(爵祿)으로 그 마음을 달랠 수도 없고 명위(名位)를 가지고도 그 지조를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선비의 은현출처(隱現出處)는 오직 의(義)에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임금은 경의를 표하고 예의를 극진히 한 다음에 나오도록 하여 등용하는 것이 어진 선비를 대하는 예우이다. 62]

 

조선왕조가 국초 이래 과거급제자가 아닌 사람으로 산림(山林)에 있는 어진 선비를 불러 특별한 예우를 해 주었고, 한직을 주어 경연관을 겸임시킨 것도 그런데서 출발한 것이며, 그들로부터 치국(治國)의 원리를 얻고자 한 것이다.63]

 

나라에서 선비를 우대한다 해서 그들을 함부로 쓰는 것은 아니었다. 재능을 헤아려서 직임을 맡기되 큰 인재는 대임(大任)을, 작은 인물은 소임小任을 맡기며, 대임?소임이 합당치 못한 자는 물러가게 하는 것이다. 왕이 인물을 잘못 판단하여 채용했을 때는 그 선비는 자신의 재주를 헤아려 감당하기 어려우면 사직을 청하여 물러갈 것을 빌며, 왕은 그 요청을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64]

 

이것이 국가가 선비를 대접하는 예우이며, 선비로서 자기의 본분을 지켜나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선비를 대접하는 도’(待士之道)는 나라의 일방적인 선비 우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 부응해서 선비들도 각자 본분을 지키는 데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60]金昌協, 『農巖集』, 卷7,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61]『明宗實錄』, 卷33, 21年 10月 甲子.

62] 『明宗實錄』, 卷33, 21年 8月 丙戌, “史臣曰 賢者天地之紀 而國家之器也 不以爵祿?其心 不以名位易其操 故其隱現出處 唯義所在 必人君致敬盡禮 然後起而爲之用.”

63]李珥, 『栗谷全書』, 卷29, 經筵日記 2, 宣祖 7年 2月.

64]李滉, 『退溪全書』, 卷6, 戊午辭職疏, “臣(李滉)聞昔先王之用人也 量才而授任 大以任大 小以任小 大小俱不合者 則退之 一有不幸 上之人不知 而誤用之 爲士者 又必自量其才之不堪 辭而乞退則聽之.”

 

Ⅵ. 선비와 언로 ― 언론통색(言論通塞)과 사기(士氣)

 

언론이 통하는 세상이냐, 아니면 막혀 있는 세상이냐 하는 것은 옛날과 지금이 다를 것이 없이 국운(國運)의 진퇴와 직결된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표면상으로는 어수선하여 무엇인가 세상사가 잘못 돌아가는 듯싶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공론(士論)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갈 길이 트일 수 있는 것이지만, 언로가 막혀 있고 보면 외형상으로는 조용히 무엇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조야(朝野)가 경직되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조선왕조 5백여 년간을 놓고 볼 때 언로의 통색(通塞)이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치세(治世)에는 언로가 개방되어 있어서 시비是非의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공론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난세(亂世)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우리가 치세라고 하는 세종이나 성종 연간에 있어서 언로가 얼마나 개방되었었나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세종실록이나 성종실록을 보면 시비에 관한 논쟁이 다른 실록에 비하여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비논쟁에서 공론이 형성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공론이 수용되어 정책에 반영되었을 때 나라는 융성하고 백성은 편안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일찍이 언로를 중시하여 언관(言官)을 둔 것도 언론의 폐색을 막기 위함이었다.

 

“나라에서 언관을 설치한 것은 본디 바른 말을 듣고자 하기 위함” 65] 이었으며, 언로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중심인물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이었다. 특히 사헌부의 대사헌과 사간원의 대사간은 조정에서 언론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핵심 관원이었다.66]

 

조광조는 언로의 중요성과, 간관(諫官)으로 하여금 언론의 책임을 주관하게 한 이유를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언로의 통색(通塞)은 국운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사옵니다.

언로가 통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막히면 어지럽고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옵니다. 위로는 공경백관(公卿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여항시정(閭巷市井)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옵니다.

 

그러나 언론의 책임자가 없으면 전부 들을 수 없는 까닭에 간관(諫官)을 설設하여 그것을 주관토록 한 것이옵니다." 67] 위의 조광조의 말에 의하면 언론의 통색은 국운의 진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공경백관으로부터 시정 백성에 이르기까지 말을 청취하게 하려면 왕이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개진하고 간관에게 그 책임을 맡기게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간관이 언론을 이끌어 가는 책임은 막중한 것이었다.

 

65]『端宗實錄』, 卷12, 2年 10月 乙未, “國家設言官 本欲聞正言.”

66]『中宗實錄』, 卷23, 10년 9월 丙戌.

67]『中宗實錄』, 卷23, 10년 11월 甲辰.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 신숙주(申叔舟) 등은 왕에게 선치(善治)를 바라는 뜻에서 언로를 인체의 혈기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세상에 있어서 언로가 하는 것은 사람의 몸에 있어서 혈기(血氣)와 같사옵니다.

혈기가 한 번 정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면 몸 전체가 병이 들어 편안할 수 없으며, 언로가 하루라도 통하지 않는다면 사방이 병들어 임금이 편안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나라를 위하는 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썼겠지만, 반드시 직언(直言), 극간(極諫)을 구하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았사옵니다. 비록 귀에 거슬려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도 반드시 은인(隱忍)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즐거워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포장(褒奬)하였습니다.

 

직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여 사방에서 그러한 말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자손 천대만대(千代萬代)를 위하여 스스로 편안케 하는 길이옵니다. 그러므로 들어줄 수 없는 일이라도 그 쓸만한 것인가를 구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라 하더라도 상을 내려야 할 것인지 노해야 할 것인지, 또는 기뻐하며 사랑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배척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친하고 화목해야 될 것인지를 구함이 어찌 쓸데없는 일이라 할 수 있사오리까." 68]

 

위에서 보듯이 언로(言路)와 혈기(血氣)를 동일시하였다. 그 이유는 혈기가 한 번 정지하면 몸이 병들듯이, 언로가 하루라도 통하지 않으면 사방이 병들어 임금이 편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들은 직언, 극간을 선무先務로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 그러했던 것이다.

 

지금의 임금도 그러한 선례를 본받아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참고 받아들여야 하며 직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사방에서 직언?직간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전달된 직언?직간은 수납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배척해야 될 것인지 숙고하여,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는 것이 자손들을 오래오래 편안케 하는 길이라 하였다.

 

선비들이 직언?직간을 하는 이면에는 강력한 왕권을 견제하려는 일면이 없지 않으나 언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왕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언로는 시정(時政)의 득실과 민생의 이병(利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언로를 널리 개방한다고 해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진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왕의 귀에 거슬리는 문구나 내용이 담겼다고 죄를 준다면 아무리 언로를 열어 놓았다고 해서 그대로 실행될 수 없으며, 할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되니 자연히 언로는 막히게 마련이다.69]

 

왕이 구언(求言)을 하고 이를 가납(嘉納)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준다면, 그것은 구언을 위장해서 거간(拒諫)을 표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70] 왕이 구언을 청하는 것은 민정의 휴척(休戚)을 알기 위함이다. 궁궐에 깊이 들어앉아 있으면서 세상 물정을 알려면 그 방법은 구언밖에 없다.

 

구언의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다. 중신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도 있고, 경연석상을 통해서 들을 수도 있으며, 재야 선비의 상소를 통해서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정의 중신들은 자기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직언을 꺼려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널리 살피려면 물들지 않은 재야 선비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시국을 간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왕이 널리 구언을 청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왕이 구언을 한다고 해서 언로를 개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왕이 조야에 구언을 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구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자세이다. 사관(史官)이 “구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구언에서 얻은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어렵다. 구언하여 얻은 말을 들어 주는 것은 성의껏 그것을 구하는 데 불과한 것” 71] 이라 하였다.

 

구언의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언로의 개방은 구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언을 성의껏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언로를 널리 열어서 취할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직언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 72]

 

사기士氣를 배양하여 언로를 개통하는 것이야말로 소인들의 진출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설사 조정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술수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73]

 

언로의 개색(開塞)과 선비의 기풍(氣風)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기의 성쇠가 치란(治亂)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고 보면 74] 언로의 기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68]『文宗實錄』, 卷3, 卽位年 9月 癸亥.

69]『世祖實錄』, 卷3, 2年 2月 己未.

70]『明宗實錄』, 卷34, 22年 5月 丙辰, “史臣曰 旣求其言 而又欲罪之 則是假求言之名 而示拒諫之實也.”

71]『明宗實錄』, 卷27, 16年 4月 己亥, “求言非難 聽言爲難 聽言之道 不過以誠求之.”

72]『中宗實錄』, 卷54, 20年 5月 己卯, “特進官許?曰 不廣言路 則有事之時 誰復言之.”

73]『中宗實錄』, 卷86, 32年 11月 辛丑, “用人之際 尤當辨君子小人 培養士氣 開通言路 則小人不得行其術矣.”

74] 『中宗實錄』, 卷59, 22年 8月 丙寅, “臺諫上箚曰 言路開塞 關於士氣 士氣盛衰 治亂所係.”

 

언로통색(言路通塞)과 국가치란(國家治亂)이 직결된다는 주장은 선비된 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중종 때 홍문관 부제학 상진(尙震) 등이 차(箚)를 올려 “국가의 치란이 언로의 통색에 기인함” 75] 을 들어 언로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상진의 독자적인 주장이 아니며 선비의 공통된 견해인 것이다.

 

언론의 개방은 조야(朝野)뿐 아니라, 같은 조정 안에서도 시비가 엇갈리기 일쑤였고, 특히 재상과 반대 입장에 서 있던 대간(臺諫) 사이가 더욱 그러했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재상(宰相)은 옳다 하고 대간(臺諫)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재상은 실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대간은 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가부(可否)가 서로 건너진 다음에 일이 바르게 돌아가며 조정이 화합한 뒤에 지치至治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임금과 대신이 그 뜻이 다르고, 대신과 백료百僚가 그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기상氣象이 어그러지고 격리되어 어찌 선치(善治)를 이룰 수 있겠는가." 76] 라 한 것은, 재상과 대간 간에 의견이 맞서는 것은 그 가부可否가 토론 과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게 되고, 사론(士論)이 정해짐으로 바른 정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언로의 개방은 자유로운 토론을 전개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정론(正論)이 모여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정론을 집행하는 것이 치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로가 이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조야를 막론하고 뜻있는 선비들은 틈만 있으면 언로의 개방을 외쳐 왔던 것이다.

 

75]『中宗實錄』, 卷76, 28年 12月 丙戌, “國家之治亂, 由於言路之通塞.”

76]趙光祖, 『靜菴文集』, 卷3, 侍讀官時啓 13.

 

Ⅶ. 선비정신

 

선비의 정신은 입지(立志)에서 출발한다. 선비가 입지가 확고하면 정의(正義)를 위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공론(公論)을 그르칠 염려가 없다. 여기에서 선비정신은 발휘될 수 있으며, 의리(義理)의 명분은 생명보다 중시된다. 국가가 위급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고 득(得)을 보면 의(義)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비의 정신인 것이다.

 

선비가 뜻을 세우지 못하면 올바른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공자가 “불항기지(不降其志) 불욕기신(不辱其身)”이라 하여 선비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은 선비가 지켜야 할 철칙이며, 뜻을 굽히는 것은 그 몸을 욕되게 하는 것 77] 이어서 뭇사람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황(李滉)은 선비의 입지에 대하여

 

"선비가 병폐로 여기는 것은 입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로 뜻이 정성스럽고 돈독하다면 어찌 배움에 이르지 않고 도에 드러나기 어렵다고 근심할 것인가." 78] 라 하였다. 선비의 정신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입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비가 입지가 확고하면 정의를 위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공론을 그르칠 염려가 없다. 여기에서 선비정신은 발휘될 수 있으며, 의리의 명분은 생명보다 중시된다. “사견위치명士見危致命 견득사의(見得思義)” 79] 라 한바, 선비는 위급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며 득을 보면 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선비의 정신인 것이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면 그 몸을 버릴 수도 있다. 『사기』에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80] 라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죽음을 당할지언정 몸을 욕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의관(衣冠=선비, 벼슬아치)을 욕되게 하는 것은 그 아픔이 나라에 있는 것이다.81]

 

77]李建昌, 『明美堂集』, 卷16, 淸隱傳.

78]李滉, 『退溪全書』, 卷24, 答鄭子中惟一, “夫士之所病 無立志耳 苟志之誠篤 何患於學之不至 而道之難聞耶.”

79]『論語集註大全』, 卷19, 子張?.

80]司馬遷, 『史記』, 卷86, 刺客列傳第26.

81]『東文選』, 卷1, 東方辭 送鄭達可奉使日本國(李穡 撰), “士可殺不可辱兮 辱衣冠痛在國也.”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개국원훈(開國元勳) 정도전(鄭道傳)은 선비정신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 알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자가 있는데 이는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위해서이다.

 

저 자중하는 선비들은 그 의리가 죽을 만한 것을 당하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이 앞에 있고 칼과 톱이 뒤에 설치되었으며, 화살과 돌이 위에서 쏟아지고 예리한 칼날이 아래에 서리고 있을지라도 거기에 부딪치기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어찌 의를 중히 여기고 죽음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겠는가.

 

과연 글 잘하는 사람이 이것을 서술하여 서책에 나타난다면 그 영웅스런 정성과 의열(義烈)이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비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니, 그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죽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을 달게 여기고 후회하지 않는다." 82]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의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선비들의 의연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으며, 불의에 항거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은 후세 역사에 전해져서 그 이름이 남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는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된 죽음을 희망했으며, 선비들이 그 길을 택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따라서 국난을 당하여 망신순국(忘身殉國)하는 것은 의로 보아 바람직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들의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檄文)이나 서찰을 보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기 몸을 저버리는 데 대한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어려운 때 선비가 의를 지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모든 선비가 의를 지켜 목숨을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이정암(李廷馣)은 임진왜란 때의 실례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선비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옛 사람들의 책을 읽고 고인의 절개를 흠모하며 큰소리로 “의로운 일로 죽으면 죽었지 구차한 삶을 바라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전쟁이 일어나서 어수선할 때 목숨을 버릴 의를 취한 자가 백 명 가운데 한두 사람도 없었으며 부녀들이 더 많았다." 83] 라고 한 기록과, 이수광(李睟光)이

 

"임진왜란 때 부녀로서 절개를 지킨 사람은 모두 헤아릴 수 없으며,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이 그 다음이나 뚜렷이 칭찬할 만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아! 선비가 평화로운 날에 책을 읽고 의를 강론하며, 그 누가 내가 장부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런데 막상 위급에 처하여 목숨을 바친 것이 부녀만도 못하니, 낯짝이 두꺼운 것이 아닌가." 84] 라고 한 기록이 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 보듯이 어려운 때에 선비가 의를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모든 선비가 죽기로 의를 지켜 목숨을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

 

『사기』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柏)이 늦게 마르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이 혼탁해야 맑은 선비를 볼 수 있다” 85] 라 한 말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몸을 닦고 정제함이 군자와 같아서 잘 구별이 안 되나 세상이 혼탁하면 구별이 잘 된다는 말이다.

 

먼 옛날부터 이러한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은 것을 보면 선비라 해서 모두 고상한 선비정신을 실천에 옮겼던 것은 아닌 것 같다.

 

82]鄭道傳, 『三峰集』, 卷4, 鄭沈傳.

83]李廷馣, 『四留齋集』, 卷7, 雜著, 三節婦傳?.

84]李睟光, 『芝峰類說』, 卷15, 人物部, 烈女.

85]司馬遷, 『史記』, 卷61, ?伯夷列傳第1,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擧世混濁 淸士乃見.”

 

Ⅷ. 여언 ― 선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조선조의 선비도 사회의 가치 인식이 크게 바뀐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시대에는 긍정적으로 비쳐졌던 선비의 도(道)가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측면도 있을 것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선비의 부정적인 측면 중에는 선비 전형에 대한 모순도 있겠고, 선비의 탈을 쓴 저속한 선비(俗儒), 가짜 선비(假儒), 썩은 선비(腐儒) 등의 비리, 비행과 함께 사람들이 조선조의 선비를 혹평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일 게다.

 

먼저 선비의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자.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선비의 조신(操身), 즉 선비의 몸가짐이라 하겠다. 선비가 거동하면 반드시 예(禮)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행하면 먼저 의(義)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태도라고 사료된다.

 

선비는 의롭지 못한 짓을 하면서까지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선비는 차라리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죽음을 택할지언정 살아서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선비는 벼슬이 없어 빈궁해도 선비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 없고, 겸양의 예로써 자신을 지키며 글 읽는 데 전념하여 잡념을 잊는 것이 선비의 도리였다.

 

시리時利에 좇아 이리 옮기고 저리 쏠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사유四維, 즉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숭상한 것은 공도(公道)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의 공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언론의 역할이 크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언론은 공론(公論, 士論)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했고, 이것을 주도한 것이 선비들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선비의 학문면려(學問勉勵)와 행도行道 역시 오늘에 있어서도 식자인(識字人)이 본받을 점이다.

 

선비가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국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선비에게 특권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비 대접을 받는 이상 주어진 임무도 컸다. 국난을 당하면 선비들은 솔선하여 구국(救國)에 앞장선다. 이것은 선비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선비가 뜻을 세운 것이 확고하면 정의를 위하여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 선비정신은 발휘될 수 있으며, 의리의 명분은 생명보다 중시된다. 선비하면 선비정신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숭고한 정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다음은 부정적인 면으로, 선비 전형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를 언급하겠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선비들의 신분차대(身分差待)에 대한 당위론이다.

조선조의 신분제도는 전래의 전통적 사회 기반과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유교사상에 의하면 치자와 피치자의 구별이 엄존하여 그러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믿었다.

 

이러한 관념은 혈통이나 직업에 의하여 양인(良人)과 천인(賤人), 사(士)와 서(庶),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각기 구별되는데, 지금은 이미 혁파되어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부정적인 면이라 하겠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선비들이 학문에만 종사하고 농공상(農工商)을 천하게 본 것은 결과적으로 산업 능력의 저하를 가져왔고, 문약(文弱)의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점 또한 부정적인 면이 된다.

 

셋째로 들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은 복고풍의 숭상과 진취성의 결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고풍을 숭상한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지난 일을 이어받아 앞날을 연다’(繼往開來)는 취지에도 부합된다.

 

또한 삼대의 성군시대를 강조함으로써 절대왕권을 견제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보아도 선비들의 복고풍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는 복고풍의 학문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 부정적인 요소라 하겠다. 결국 선비들이 복고풍의 학문에만 전념하다 보니 상명(尙名)과 복고(復古)의 사상이 강하여 진취성을 결하게 되었다.

 

끝으로 저속한 선비(俗儒), 가짜 선비(假儒), 썩은 선비(腐儒)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다.

 

예,의,염,치를 숭상하는 것이 선비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식생활은 할 수 있어야 계속 선비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벼슬하는 선비는 녹봉(祿俸)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재야의 선비에게는 우선 생계 문제가 큰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나 공상(工商)에 종사하면 영구히 폐고되어 선비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자기 자신의 체면을 손상하면서까지 비행을 저질러 선비 자리를 계속 지탱하려는 자도 있었다. 속유 가유 부유라 하는 등속이 그러한 유(類)이다.

 

이미 이들은 선비로서의 체통을 잃었으므로 선비의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대로 선비 행세를 하여 참된 선비(眞儒)의 상을 흐리게 하였다.

 

끝으로 조선조의 선비를 혹평하여 부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대개 선비의 긍정적인 면은 제쳐놓고 속유, 가유, 부유 등의 비리, 비행만을 들추어 선비가 조선왕조를 몰락의 길로 치닫게 한 장본인이라고 퍼붓는다.

 

서양의 기사도(騎士道)나 일본의 무사도(武士道)라고 해서 다 좋은 면만 지녔고, 그 도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을 리는 만무하다. 선비의 부정적 면과 비행(非行)이 있듯이, 그들에게도 그러한 면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의 긍정, 부정을 논하자면 의당 선비의 전형을 따져야 할 것이며, 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의 긍정적인 면은 앞으로도 계승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