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암서원(遯巖書院)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이 타계 한지 3년 후인 인조 12년(1634)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4-4(지번>論山市 連山面 林里 74番地)에 창건되었고, 효종 10년(1659)에 사액(賜額)되었다.
창건 당시엔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였으며, 효종 9년(1658) 그의 아들 신독재 집(愼獨齋 集,1574~1656)을 추배하였고, 이어 숙종 14년(1688)에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년~1672)을 숙종 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을 각각 추배하였다.
이 서원은 김장생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연산면 임리[숲말]에 소재하였는데, 서원서북쪽에 돈암이란 큰 바위가 있어 이름을 돈암이라 하였다 한다.
고종 8년(1871)의 전국적 서원철폐령에서도 홰철 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고종 8년(1881)에 이르러 숲 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올라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돈암서원이 있는 연산은 조선시대 공주목에 속하며 동으로는 진잠과 회덕, 옥천, 금산 등이 있고, 서로는 은진, 석성, 이산, 한산 등이 있고, 남으로는 호남의 여산, 고산 등이, 북으로는 노성, 공주가 있는 호서사림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산의 지리적 조건과 거유 김장생의 등장으로 17세기가 들어서면서 조선 정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으며, 호서는 물론 전체 기호사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처음 서원의 창건 발의가 나온 것은 김장생 타계 직후였는데, 인조 10년(1632) 여러 유사가 주도하고 20여 충청지방의 각지역 사족들이 이에 호응하여 창건을 정식으로 발의 하였다.
발의에 참여한 유사들의 면면을 보면 현직관료 6인, 전직관료 9인, 유학 4인, 생원 4인으로 이들이 서원창건의 실무진이었다. 그리고 여러 읍의 유사들은 재원을 조달하였고, 그 밖애 공주목, 청주목, 홍주목 산하의 20여 지방 유림들이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논산 돈암서원 전경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의 응도당(凝道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