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야촌(1) 2016. 6. 19. 22:02

[Posted on 5월 22, 2016 by gominheyo]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만주, 북간도, 북만주, 서간도, 러시아, 중국, 미주, 일본)

 

1)만주지역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이 가시화되는 을사늑약 이후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경영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한인의 이주가 뒤따라야 하였고, 국내로부터 많은 자금이 공급되어야만 하였다.

 

아나가 그러한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강력한 항일단체도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외운동은 인적·물적 공급원이 국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범위가 대국적으로 보면 국내 독립운동의 연장이라 할 수 있었다.

 

2)북간도지역

 

국외독립운동기지로 가장 먼저 시도된 곳은 북간도였다. 북간도 지역은 서간도를 포함하여 한민족의 옛 땅으로서 본래 민족문화의 터전에 속했던 땅이다. 북간도에는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이 계속 몰려들어 민족주의 교육을 비롯해 종교·실업 등 각 방면에 걸쳐 민족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북간도의 한인사회는 1906년 서전서숙의 개숙으로 국외 독립운동 기지화가 추진된 이래로 일제의 간도파출소라는 침략세력의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전쟁론을 구현시킬 독립운동기지의 터전을 굳혀갔던 것이며, 이와 같은 터전을 통해 3·1운동 이후 강인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해 갈 수 있었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06년 이상설의 선도로 북간도 용정을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는 과정에서 설립된 민족주의교육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1년 미만 유지되다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항일독립운동사상에서는 큰의미를 가진다.

 

서전서숙의 설립목적이 일반적인 신교육기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907년 8~9월경에 서전서숙은 폐숙되었으나, 민족주의 교육기관은 그후 북간도에서뿐아니라 서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국내 각지에서 일제 식민지 교육과 대항하면서 크게 성장해 갔다. 이외의 학교로는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대전학교, 북일학교, 정동학교가 있다.

 

3)북만주의 민족주의 교육(봉밀산 독립운동기지와 한민학교)

 

국외독립운동기지로 착수된 지역 가운데 중요한 곳이 북만주의 봉밀산 일대였다.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에 의하여 봉밀산지역의 기지화가 추진되었다.

봉밀산 일대는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에 자리잡은 흥개호 부근에 있었다.

 

이승희(영남출신의 유학자)가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이고 100여 호를 이주시키면서 그 마을을 한흥동이라 하였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다. 또한 그곳에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

 

4)서간도의 민족주의 교육(서간도 독립운동기지와 신흥강습소)

 

망명 민족지사 선발대는 1911년 초까지는 서간도에 도착하여 한국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다.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를 중심으로 착수한 서간도의 독립운동기지화 경영은 이와 같이 경학사를 결성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경학사는 1919년 3·1운동 때까지 공리회,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한인이 거주하던 서간도 전 지역을 망라한 강력한 항일단체로 성장하였다.

 

처음 경학사 함께 신흥무관학교로 시작한 민족주의교육과 독립군 양성은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로 확충하면서 3·1운동때 까지 약 1000명의 독립군 인재를 양성하였다.

 

5)러시아 지역

 

한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최초로 이주한 시기는 1863년 무렵이다.

이주 초기단계에는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의 연세농민이 그 선두가 되었다.

 

이주한인이 시베리아 연해주 개척에 공헌하면서 그곳에 한인사회를 이룩하여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및 1910년 국치 전후부터는 조국독립운동의 해외 중요기지로 발전시켜 한국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

 

국내외 한민족의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을 고조시켜 거족운동을 일을킬 것을 기약하게 되었고, 1914년에는 독립군을 양성·지휘할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였다

 

항일민족운동자들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부터 급속히 국외 독립운동기지화가 추진되던 서북간도와 시베리아 여해주 지방을 합칭하여 ‘해도간’라 부르기도 했다. 연해주의 ‘해’와 서북간도의 ‘간’를 합쳤던 것이다.

 

‘해도간’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인연이 깊은 민족고지였다,

상고시대부터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 영역으로서 민족국가의 발달과 민족문화 형서의 중심지 였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 영토라고 생각되지 않는 애착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1910 년 전후의 민족운동자들은 그곳을 한국독립운동의 최적지로 생각하였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민족운동사에서 특기할 사실은 무엇보다 국망 직전에 연해주 지역에 집결한 국외의병의 항일기세와 나라를 건지려는 구국항일전이라 할 수 있다. 연해주 의병은 크게 보아 두 계통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하나는, 연해주에 형성된 이주 한인사회 내에서 조직된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의병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북상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참여한 계통이었다. 하지만 두 계통 모두 그곳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자가 합동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연해주 의병은 대일항전을 전개 할 수 있었다.

 

연해주 의병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러시아 군인들도 일정한 후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던 러시아 군인들은 패전 후 상당 수 현직에서 면직되거나 혹은 해산되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던 이들은 자기들의 입지를 회복하는 방편으로 한인들의 항일의병 편성을 촉구하거나 후원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연해주 의병은 러시아 패전군인들로부터 상당수의 무기를 구입하거나 혹은 지원받을 수 있었다.

연해주 의병의 특징으로는 기본적으로 단일부대로 편성되어있지 않았다.

 

여러 의병장들의 휘하에 편성된 대소 단위부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있는 형태였다.

즉 연해주 의병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조직과 편제를 달리하였다.

 

한인이 밀집된 지역 도처에 의병이 분산 편제되어 있었던 점과 한인이 연해주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6)중국지역

 

중국은 한국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대부터 다양한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어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며 강력한 투쟁의 산실이었다.

 

1911년 말 부터 독립 운동가들은 북경·상해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은 한인들의 활동기반 조성을 최우선으로 여겨 당시 혁명운동의 중심축인 중국지사들과 적극적인 유대형성과 한국독립지사들의 상해 망명유도를 급선무로 여겼다.

 

중국 관내지역은 만주·연해주·미주지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곳이다.

관내 지역 중 관동성의 상해·남경·그리고 북경지역이 1910년대와 1920~30년대의 주심 활동지역이었다고 한다면 중경·광주·무한·천진 등은 1930년대 후반 이후의 활동무대였다.

 

중국에서 특히 상해지역은 한국독립운동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 이유로는

 

[배경]

첫째. 미주나 유럽 및 국내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

둘째, 우리에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서구열강의 조계지와 외교기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

셋째, 중국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상해였다는 점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을 기회로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국외 각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조직기반과 무장력을 통합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이러한 신한혁명당의 활동에 힘입어 국외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적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국내의 민중적 기반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결실이 바로 1919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하겠다.

이처럼 1910년대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세력과 국제적 연대 구축을 토대로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의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관내 지역에 해외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7)미주지역

 

◾하와이지역

 

하와이지역 민족운동단체 설립은 1903년 창립된 신민회가 시초였다.

이후 1907년 9월까지 14개의 민족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많은 한인단체 결성은 하와이 군도가 8개의 섬으로 구성된 지리적 여건과 당시의 교통상황 등으로 인해 대규모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자, 각 지방별, 농장별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하와이 한인들은 대한제국정부를 대신하여 스스로 한인들을 보호하고 일제의 지배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결성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렇기에 하와이 한인단체의 목적은 크게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로 나타난다.

 

◾북미지역

 

초기의 한인단체의 성격은 한인들 간의 침목도모와 상호 간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침략이 노골화 되자, 미주한인들은 한인보호와 일제에 대항할 강력한 정치단체의 결성을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인자치기구를 창설하여 민족운동은 전개하고자 하였고,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표방한 공립협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이후 미주한인사회를 선도한 단체는 공립협회였다.

 

8)일본지역

 

일본의 한인들은 친목도모와 일자리 알선, 생활거점확보를 위해 한인끼리 결속하였다.

이들은 고국을 떠나 문화와 생활관습이 다른 타향에서 자신들을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려면 힘을 모아야했다.

 

한인노동자의 결속은 노동자들끼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낸 사례도 있었지만 유학생을 비롯한 지식층, 알선업자나 하숙업에 종사하는 한인의 도움에 힘입은 경우도 있었다.

 

유학생들이 노동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이유는 대부분 한인들의 권익옹호로 볼 수 있다.

알선업자나 하숙업종사자들은 침목도모나 상호부조가 큰 이유 였다.

 

노동력 확보나 노동자의 통제의 목적도 이유에 포함되어있었다.

시기별로 보면 토쿄가 가장 이르고 오사카와 쿄토는 같은시기 이며, 효고와 고베는 가장 늦게 결성되었다.

 

가장 먼저 동경은 결성시기도 이르지만 단체의 성격도 대부분 학술·종교·유학생 친목단체이다.

교토도 유학생이 밀집한 지역으로 1915년에는 유학생 단체만 2개 단체가 결성되었다.

 

오사카는 교토와 같은 시기에 단체가 결성되었으나 노동자 비율이 높은 지역이라는 특성에 맞게 노동자를 결속하기 위한 단체였다. 고베는 비록 결성시기는 늦었지만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곳이라는 특성과 관련된 단체성격을 보인다.

 

-Author: gominhe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