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정만록(征蠻錄)

야촌(1) 2016. 5. 30. 18:45

 

 

 

 

↑사진출처>인터넷/2권 2책(완결본)

 

■ 정만록(征蠻錄)

 

정만록의 저자 이탁영(李擢英)은 경상순찰사였던 김수(金睟의 수하(手下)에 있다가 임진왜란 당시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1538~1593)의 막하(幕下) 진중(陣中)에서 영리(營吏)로 있었고, 또한 유성룡(柳成龍)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 때 진중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목(題目)의 일기형식으로 초(草)하여 두었던것을 선조 34년(1601)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시발(李時發)이 도내(道內)의 사적을 채집하게 하였을 때 이 일록을 재정리하여 제출하게 되었고, 이를 선조(宣祖)가 어람(御覽)한 후 정만록(征蠻錄)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 일록(日錄)은 이와 같이 선조가 명명한 어정(御定)이란 점에서 그 가치(價値)를 크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고, 벼슬자리도 버리고 고향 의성으로 내려가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일생을 보냈는데 그런 그를 당시 의성사람들은 '효사재(孝思齋)'라 불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贈職)되어 정조 때 충효사(忠孝祠)에 배향되었다.

 

정만록에는 임란(壬亂) 당시의 개황(槪況)과 이 일록(日錄) 및 연혁(沿革) ·통문 (通文)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謄書)하게 된 연유를 자세히 적은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敎書) ·장계(狀啓) ·통문(通文) ·첩보(牒報) ·치보(馳報) ·격문(檄文) 등이 전재(轉載)되어 당시 조야(朝野)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資料)다.

 

권말(卷末)에 일본(日本)에 피로(被虜)된 명인(明人) 허의후(許儀後)가 자국(自國)에 진달(陣達)한 기밀봉사(機密封事)를 전재하고 있는데 즉 진일본지상(陣日本之詳) ·진일본입구지유(陣日本入寇之由), 진어구지책(陣禦寇之策), 진일본관백지유(陣日本關白之由), 진일본육십육국지명(陣日本六十六國之名) 등 당시 일본(日本)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임란(壬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는《선묘보감(宣廟寶鑑)》을 비롯하여 이순신(李舜臣)의《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柳成龍)의《징비록(懲비錄)》, 조경남(趙慶男)의《난중잡록(亂中雜錄)》, 신경(申炅)의《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노(李魯)의《용사사적(龍蛇事蹟)》등 수십 종(種)이 있으나 자필본(自筆本)으로서는《난중일기(亂中日記)》와《징비록(懲비錄)》그리고 《정만록(征蠻錄)》이 유일하다.

 

영리(營吏)의 낮은 신분으로 순찰사(巡察使)의 막하(幕下)에서 적은 일기(日記)라는 점에서 기사(記事)의 제약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임란발발일(壬亂勃發日)로부터 기필(起筆)하여 그해 연말(年末)까지 약 10일간(日間)의 기록이 누락된 것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기록하고 있어 어느 임진란일기(壬辰亂日記)보다도 충실하고 자세하다.

 

특히 순찰사(巡察使)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함양(咸陽)에서 출발(出發),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했다가 다시 영(還營)한 저간(這間)의 역로(歷路)가 주목되는 기록이다. 특히 이탁영은 고위 관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정한 파벌에 속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자신의 직분을 의식하지 않고 보고 들은 사실 그대로 가감 없이 역사의 사실성에 더욱 충실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만록의 기록은 근세조선의 비운과 혼돈의 역사에 가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식민지시대에는 일제에 압수되는 수난을 당했고 6·25 때에는 후손 이우영(李宇營)의 품에 안겨 울산까지 피난을 겪어야 했는데 고향 의성의 후손인 이종주(李鍾周)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무려 400년이 지난 1986년 10월 15일 마침내 국가 보물 제880호로 지정을 받게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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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정만록

 

‘정만록’(征蠻錄·사진)은 경상도 관찰사의 영리(營吏)였던 이탁영(1541∼1610)이 쓴 일기다. 1592년에 시작, 1598년까지 기록하고 있으므로 임진왜란의 전 기간을 망라한 일기인 셈이다.

 

영리는 쉽게 말해 이방·형방과 같은 부류의 아전이다. 아전은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 신분이므로 저자의 무게감으로만 보자면 ‘정만록’은 ‘징비록’ ‘난중일기’와 비할 바 못된다. ‘징비록’의 저자인 영의정 유성룡, ‘난중일기’의 저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에 비한다면 일개 영리의 존재는 작기만 하다. 한마디로 ‘정만록’은 임진왜란 당시 평범한 삶을 살다 간 한 인물의 일기다.

 

‘징비록’ ‘난중일기’ 외에 임진왜란 당시 각종 체험기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런 무수한 전쟁 체험 기록들을 제쳐 두고 일개 아전이 쓴 일기인 ‘정만록’이 1986년 보물 제880호로 지정됐다. ‘정만록’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는 솔직하다. 당파적 이해 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도 없고 양반 특유의 체면을 따질 계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최악의 패전이었던 1592년 6월 용인 전투 당시 그의 경험담은 적나라하다. 진흙탕에 빠지고 말에서 떨어지면서 정신없이 도망가는 자신과 일행의 모습을 독자들을 착잡하게 만들 만큼 솔직하게 묘사한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끝이 없다. ‘고향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자식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술에 취한 듯 미칠 것만 같다.’(1592년 6월28일), ‘적은 날뛰고 고향에는 갈 수도 없는데 어머니와 자식을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집힌다.’(1592년 8월5일)

 

왜군의 행패에 대해서도 그 어떤 기록보다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상도 상주의 명성 높은 양반가의 며느리가 왜군 10명에게 윤간당했다거나(1592년 7월2일) 왜군이 여자 하나를 잡아 30~40명이 윤간했다(1592년 7월7일)는 등의 기록은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겪은 참담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양반들의 기록은 감정의 절제를 통해 어느 정도 표현이 완화되지만 중인이었던 이탁영은 듣고 보고 느낀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다. 한마디로 ‘정만록’은 전쟁의 비극적 실상을 여과 없이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일기는 양반들의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중인 특유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묘사가 강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각종 수기를 연구한 이채연 교수는 ‘정만록’에 대해 “저자의 정서적 충격과 정신적 갈등, 참담한 현실에 대한 인간적 비애 등이 주로 서술돼 인간적 체취가 강렬한 것이 특징”이라고 평한다.

 

‘정만록’의 또 다른 가치는 풍부한 참고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만록’은 일기에 해당하는 건권(乾卷·상권)과 자료집에 해당하는 곤권(坤卷·하권)으로 구성돼 있다. 곤권에는 저자가 경상도 관찰사영에서 근무하면서 접한 교서(敎書)·장계(狀啓)·통문(通文)·첩보(牒報)·치보(馳報)·격문(檄文)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들 각종 공문서는 실록이나 다른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임진왜란의 중요 자료라는 점에서 ‘정만록’의 가치를 더욱 높여 준다.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1. 2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