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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수) 12:57]
중추가절(仲秋佳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모곡(思母曲)
경인년 추석인 중추가절(仲秋佳節)이 문 앞에 와 있다. 효사상(孝思想)이 깊은 우리민족은 국내는 물론이려니와 국외, 어느 곳에 있던 중추가절이면 돌아가신 조상과 부모님은 물론 생존해 있는 조부모와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며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차려 예를 갖추어 절하여 대접한다.
그 가운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돌아가신 어머니 김점문(金点文) 여사(1898년 1월9일∼1978년 4월 10일=壽81歲)에 대해서 남다른 사모(思母)의 변(辯)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해인사가 가까운 지금의 합천군 가야면에서 당시로서는 부농인 불심 돈독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훈육으로 역시 불심이 깊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출할 때면 말을 타고 다녔다 한다.
그는 당시 해인사 주지스님과 의형제를 맺어 상호 왕래를 했고, 그는 해인사에 시주를 많이 했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처녀시절 두 번 해인사를 찾아 큰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부처님께 전생에 인연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가면 그 집안이 흥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불교는 이 세상의 인간사가 모두 인연법으로 만나고 헤어진다고 가르친다.
인연의 때가 되었다. 김씨 처녀는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마을’의 (완산전씨(完山全氏) 전상우(全相禹:일명 相祐. 1898년1월 8일∼1966년3월 2일=享年69歲)의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시집을 가서 그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
내동마을의 완산 전씨의 먼 조상은 합천 출신이 아니었다.
전 대통령의 먼 조상은 지금의 전북 전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며, 전주성을 위시하여 그 지역을 관장하던 고려말엽의 무장(武將)이었다.
고려왕실에 충의를 바치던 그 무장은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집권하여 이조(李朝)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으로 사흘간 통곡을 한 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가산을 정리하여 조상이 대대로 뼈가 묻혀있는 전주를 떠나 지금의 경북 고령 쪽으로 가족과 함께 은신하듯 떠나왔다.
고령 금산 쪽에 은거해 있던 전 대통령의 선조에게 이조의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나타나 출사(出仕)하여 새로운 임금인 이성계를 섬겨 충성을 바칠 것을 강권해왔다. 만약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이조에 충성하는 무장들이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어 모살(謀殺)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일이었다.
오직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의정신인 전 대통령의 선조는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夜半逃走) 하듯 지금의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마을에 숨어 은거했다. 내동마을은 조정의 관리가 찾아올 수 없는 천혜의 요새 같은 곳이었다. 앞에는 황강이 거세게 흘러 건널 수 없고, 뒤에는 용덕산(龍德山)이 높고 숲이 우거져 길 찾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 선조는 화전을 일구면서 대대로 후손들에게 충의정신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게 훈육했다.
내동리 완산전씨 집안은 충의정신을 잊지 않는 충의지가(忠義之家)였다.
전 대통령도 소년시절 조부와 부모로부터 사나이는 충의지사(忠義之士)가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훈계를 들으며 자라왔다. 충(忠)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요, 의(義)는 신의(信義)였다. 그는 평생에 충과 의를 생명으로 알고 인생을 살았다.
그 무렵, 전 대통령의 어머니에게 두 아들을 연거푸 잃는 불행이 닥쳐왔다.
첫 번째, 큰아들인 전모(全某) 소년이 서당으로 글공부 하러 가서 어이없게 시체로 돌아왔다.
서당에서 전 소년이 높은 지대에서 소변을 보는 중에 친척이요, 글공부 학우가 장난삼아 소변보는 전 소년의 등을 등 뒤에서 왈칵 떠밀었다. 등 떠미는 소년은 등을 떠밀어 놀래 키고, 곧바로 등을 붙잡을 심산이었으나, 앞으로 떨어지는 전 소년을 미처 잡지 못했다. 전 소년은 졸지에 추락하여 땅에 큰 통나무 소변 통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켜 즉사 하고 말았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장남을 안고 대성통곡 했다. 전 소년을 등 떠민 소년의 부모가 달려와 울며 사죄를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어린 소년의 장난을 탓하지 않고 “내가 자식 덕이 없는 탓”이라며 죽어버린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자책하며 통곡할 뿐이었다.
두 번째 불행이 또 닥쳐왔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논 밭일을 하러 나가고 간난 아기를 전 대통령의 누님인 전모(全某) 소녀가 등에 없고 마루에 서있을 때였다. 등에 업힌 아기는 젖 달라고 칭얼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 때 순식간에 아기가 몸부림을 쳐서 둘러 싼 아기보자기에서 빠져 추락했다.
아기는 툇마루 밑 섬돌에 머리가 부딪쳐 즉사하고 말았다. 일터에서 달려온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아기를 안고 아기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통곡했다.
전생에 내가 오죽 업장이 두터우면 두 아들을 똑같이 추락하여 머리를 다쳐 즉사할 수 가 있겠는가, 자책하여 울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을 저승에서라도 돌봐야 한다며 목을 메어 자결을 시도했다.
때마다 주위 친척들이 지켰다.
남편은 나라가 하루속히 독립을 해야 한다며, 비밀결사에 가입, 소리 소문도 없이 홀연히 중국의 독립지사들을 찾아 왕래했다. 따라서 집안 살림은 언제나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두 아들을 잃은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두 자식 생각에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방안에서 울고 있는데,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사에서 왔다는 탁발 노승이었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해인사’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고 반색을 했다.
그 옛날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기도하던 때가 회상된 것이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아껴둔 쌀을 시주했다. 그 때, 노승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보살님의 앞 이빨 두 개가 자식 덕을 없게 합니다. 그 이빨만 없다면, 장차 나라의 큰 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앞 웃니 이빨이 날카로운 뻐등 이가 두 개가 자식에게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자책하였다.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수화(水火)를 가리지 않고 지옥고(地獄苦)라도 회피하지 않을 각오였다. 그 다음날 자식들을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각오로 문제의 생 이빨을 뽑아 버렸다.
입안에서 흐르는 피로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은 퉁퉁 붓고 통증은 형언할 수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 후, 전 대통령의 형제들은 요절(夭折) 하지 않고, 건강히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슴에는 두 아들의 주검을 보았기에 자나 깨나 자녀들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했다.
김일성의 남침이 일어나고 합천군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인민군은 군대를 보충하기 위해 청소년들을 마구 징발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 때, 전 대통령의 막내 숙부께서 전 대통령을 마을 뒤 주산(主山)인 용덕산에 토굴을 파서 숨게 하여 인민군의 징발을 막았다. 막내 숙부님의 기지(機智)로 전두환 대통령은 인민군의 강제 징발을 피할 수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또 위기가 닥쳤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기지(機智)로 아들을 살렸다.
대구 시내 주변에 인민군들의 박격 포탄이 간간히 떨어져 작렬하는 것을 보고 전 대통령은,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군문에 투신할 것을 각오했다.
공고의 친구들 5명과 같이 장교가 되어 전선에 나갈 뜻을 함께했다.
장교 시험을 보아 합격통지문이 도착했다. 어머니에게 통지문을 보여 드렸다.
어머니는 심사(深思) 하시더니 전 대통령이 잠든 밤사이에 통지문을 불에 태워 버렸다.
따라서 전 대통령은 장교 양성 학교에 입대하지 못하고 말았다. 뜻을 함께한 친구 5명은 부산 동래 보병학교에서 짧은 기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 포항 전투에 소대장으로 모두 동원되었다.
어머니 때문에 군인이 되어 전선에 나가지 못한 것을 통탄하는 즈음에 어느 날, 입대한 친구 강세향군의 어머님이 오셔서 자신의 아들 전사통지문을 들고 전 대통령의 집을 찾아와 아들의 친구인 전두환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그날 저녁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침통히 말했다.
"네 친구들이 모두 포항 전투에서 전사 했구나, 부모들이 얼마나 애통하겠느냐.
너도 함께 갔다면 내게 전사통지문이 왔겠지" 짧은 교육만으로 소대장으로 임용, 전선의 맨 앞에서 전투지휘를 하다가 전원 전사했던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장선조의 핏줄을 이어 받아서인지, 기어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육사생도 모집이 공고되었고, 전 대통령은 육사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육사합격통지문을 어머니에게 숨겼다.
대구 경북중학교 옆 큰 공장 마당에서 집결하는 날에야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머니는 섭섭하게 생각했다. 집을 나서는 아들 뒤를 따라 하얀 고무신을 신은 어머니가 “하루 전에만 알려주었어도 병아리라도 잡아 보신을 시키는 건데......” 염불 외듯 아들의 불효를 탓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작별하는 순간에는 애써 눈물을 감추면서 “부디, 선조의 충의정신을 잊지 않는 군인이 되거라. 부처님께 가호를 기도 하겠다” 어머니는 군문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어머니는 아들이 국내에 군문에 있을 때나,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도 언제나 부처님께 기도한다고 말했다. “귀한 내 아들과 귀한 국군들이 모두 조국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 한다”고 했다.
불교의 회자정리(會者定離)하듯 어머니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
전두환 장군이 1사단장으로 재직할 때, 어머니가 사단을 방문했다.
많은 장병들을 보고, “친자식같이 친동기간 같이 잘 돌봐 주라" 말씀했다.
그 때 어머니는 헤어지면서, “충의를 지키던 선조를 항상 잊지 말아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어머니는 선조의 충의정신을 강조하며 잠자듯이 세연(世緣)을 달리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그 충의정신은 때가 되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중정부장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한 ‘10, 26’사건에 충의정신은 순발력 있게 실천되었다.
박대통령은 김재규를 같은 마을 출신이라서 친동생같이 돌봐주었다.
따라서 김재규의 배신은 충의정신의 무장인 당시 전두환 장군에게는 상상으로라도 용납할 수 없는 최악의 불충이요, 반역이요, 패륜이었다.
박대통령의 시해사건에 격분한 충의장군, 장병들이 전두환 장군에게 모여들었다.
마침내 충의장군들이 박대통령을 시해한 범인과 동조자들을 법정에 세운 것이 ‘12,12 사건’이다.
박대통을 시해한 자들이 권력을 잡았으면 한국사회는 어떠한 사변(事變)이 일어났을까?
박대통령이 수도서울과 청와대를 경호하라고 임명한 당시 수경사령관 장모(張某)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데는 뜻이 없고, 시해장소 인근에 있었고, 김재규의 반역계획을 철저히 실천한 당시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보호하기 위해 광분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야 할까?
장모의 충의정신은 박대통령이 아닌 정승화였던가?
전두환 장군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보겠다는 것은 꿈에서 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직 대한민국에 충성, 당시 국가원수인 박정희 대통령에게게 충성하는 무장일 뿐이었다.
국가원수 시해 자들을 법정에 세웠을 때, 정치인들은 어떤 처신을 했나?
국가원수 유고(有故)의 틈을 노려 대통령이 되어보겠다는 자들의 선동으로 사회는 무정부상태의 시위소요가 벌어지고, 일부 도시에서는 무장폭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혼란을 틈타 북한 김일성은 불난 집에 기름 끼얹듯 군사공작을 했다.
그 때, 위기의 대한민국 안정을 위해 충의장병들이 그를 등 떠밀어 국가원수가 되게 한 것이다.
이 모두 全대통령의 운명이요, 국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소년시절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피죽조차 자식들에게 먹이고 자신은 굶어서 얼굴이 부황이 나서 퉁퉁 부운 모습을 상기하며 기억한다고 했다. 중추가절이면 퉁퉁 부운 어머니, 자식을 위해 생 이빨을 뽑은 그날의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상기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훌륭한 국가 인재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일제 시,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을 때,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히 키운 어머니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부지런히 공부시켜 세계의 일등 인재를 만들고, 그 인재들의 두뇌로 국부(國富)를 이루는 작금의 어머니들, 희망을 잃은 자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중추가절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장한 어머니가 있어 이 땅에 살다 가셨다는 것을 세상에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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