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쓸쓸한 ‘독립운동 성지’… 우린 언제 이 빚을 다 갚을까.

야촌(1) 2015. 7. 11. 00:30

쓸쓸한 ‘독립운동 성지’… 우린 언제 이 빚을 다 갚을까.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러시아) | 박재현 기자 parkjh@kyunghyang.com

입력 : 2015-07-10 21:48:58ㅣ수정 : 2015-07-10 22:56:17

 

●광복 70주년 독립기념관·경향신문 공동 연해주·옌볜 탐방

 

지난달 20일 탐방단을 태운 버스가 러시아 우수리스크시 라즈돌리노예 강가의 비포장 도로에 멈췄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시간30여분을 달린 뒤였다. 성벽처럼 낮은 산 앞으로 펼쳐진 초원의 한편에는 아직도 발해 성터 흔적이 남아 있다. 

 

탐방단이 찾은 곳은 보재 이상설(1870~1917)의 유허비. 인가는 물론 논밭 뙈기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묘지도, 기념비도 아닌 유허비가 세워진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서려 있다.

 

 

▲이상설선생 유허비 

 

▲러시아 우수리스크시 라즈돌리노예 강가에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 앞에서 탐방단이 묵념을 하고 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이상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특사 파견에 앞서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서전서숙을 열고 청년교육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에는 의병군을 창설하고 권업회 등 독립운동단체를 지도했다.

 

그러나 병마로 우수리스크에서 숨지기 전 그는 “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시신도 가지 않겠다”며 모든 것을 강가에 뿌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유허비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의 뜻을 기리는 유일한 표지다. 

탐방단은 먼저 횃불 문양에 이상설 선생의 약력이 새겨진 유허비 앞에 묵념했다.

 

안내와 해설을 맡은 김도형 독립기념관 해외사적지 팀장이 무선 마이크를 잡았다. “보재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의정부 참찬(장관급)까지 오른, 독립운동가 중 가장 고위직이었고 해외 독립운동의 최고 원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이그 특사단의 대표였을 뿐 아니라 만주·연해주 지역 무장독립운동의 대부이기도 했지요.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역만리를 누비며 독립에 헌신한 지도자의 자취는 유허비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했다. 비문의 첫 줄에 선생의 호 ‘보재’가 ‘보제’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유허비 주변에는 사람 키만 한 잡초들이 무성했다. 

 

그 사이에 쇠똥과 러시아 음주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즐비했다. 러시아 극동대학의 한인들이 관리를 하고 있다지만, 우리 정부의 관리와 관심이 절실해 보였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과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는 해외 탐방단을 꾸려 지난달 19~24일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요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했다. 

 

대학교수와 대학원생, 교사와 직장인 등 36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일대를 돌아본 뒤 버스로 러·중 국경을 넘어 룽징, 허룽(和龍) 등 옌볜 사적지를 찾았다. 23일에는 백두산 등정도 했다. 10대 초등생에서 70대에 이르는 탐방단은 5박6일 동안 수천㎞의 여정 속에서도 독립선열들의 뜻과 자취를 배우는 데 열정을 보였다.

 

한반도와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연해주는 ‘역사의 땅’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이자 곳곳에 민족의 유적이 퍼져 있다. 이곳은 1910년대 국내외를 통틀어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연해주는 1863년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 정착하면서 이주 역사가 본격화했다.

 

그러나 한인의 이주와 생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처음 정착했다는 두만강 건너 지신허 마을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태지가 기념비를 세울 정도로 접근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 군사보호구역으로 편입돼 도로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10년대 가장 규모가 컸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인들은 처음에 연해주 최대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지 개척리에 집단 거주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정부의 정책으로 개척리가 강제로 폐쇄되면서 신한촌으로 이주해야 했다. 개척리는 처음으로 개발해 살았다는 뜻이고, 신한촌은 한인들이 새로 세운 마을임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 초기 신한촌은 한인사회의 대표적 거점이었다. 민족운동단체인 권업회를 비롯해 한민학교, 권업신문사들이 모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2월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이곳에서 수립됐다. 대한국민의회는 그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달 21일 찾은 신한촌은 일요일이어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신한촌 전체가 주택단지로 개발되면서 한인의 자취는 사라졌다. 권업회 건물이 있던 곳은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한 건축물에 남아 있는 ‘서울 스카야 2A’ 표지가 신한촌의 역사를 떠올려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다행히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 신한촌 언덕배기에 세운 신한촌 기념비가 있어 100년 전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개척리의 한인 주거단지 역시 지금은 해양공원으로 조성돼 분수대와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최대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지에 위치한 개척리의 현재 모습. 

 

    이곳은 한인들의 첫 집단거주지였지만 1911년 러시아 정부의 정책으로 강제로 폐쇄되면서 한인들은 신한

    촌으로 이주해야 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주거지.

 

연해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우수리스크에서 그나마 한인과 독립운동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여㎞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지방기구인 솔빈부가 자리했던 유서 깊은 도시다. 이곳에 최재형 선생(1858~1920)의 집이 있었다.

 

시내 큰길인 보르다르스코로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최재형 거주지는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곳으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 정부에서 이 집을 사들여 조만간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함경도 출신인 최재형은 어렸을 때 연해주로 이주했다. 상업활동으로 돈을 벌어 한인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08년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과 함께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장으로 추대됐고, 권업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군에 체포, 총살당해 순국했다.

 김도형 팀장은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거부이자 독립운동의 후견인이었다”며 “그의 후원이 없었다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도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형 거주지에서 200여m 떨어진 ‘전로한족중앙총회 2차 회의 장소’도 보존돼 있는 몇 안되는 유적지 가운데 하나다. 1918년 러시아 한인사회가 중앙총회를 열고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한 역사적인 장소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이듬해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지금은 실업학교로 이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출입이 제한돼 철망 사이로 바라봐야만 했다. 출입문 한쪽에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나부끼고 그 아래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를 알리는 동판이 걸려 있었다.

 

연해주의 마지막 일정은 러시아와 중국 국경 근처의 크라스키노였다. 연추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취가 서린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다. 2001년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세워졌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최근 (주)유니베라농장 입구로 옮겼다. 탐방단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러시아 답사 일정을 마무리했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 근처의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의 자취가 서린 ‘단지동맹 기념비’ 모습.

     2001년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세워졌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곳으로 옮겼다.

 

일제 침략기에 20여만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던 연해주는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홍범도, 신채호, 이상설, 장지연, 안중근, 최재형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한 해외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정책으로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연해주는 러시아인의 생활무대로 변했다. 

 

현재 연해주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재이주한 동포를 비롯해 5만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장석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국민대 교수)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가 해외 독립운동의 성지가 된 것은 두터운 한인사회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언어적·외교적 장애로 이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번 답사에 부인과 함께 참여한 김영주 회계사(50)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그분들께 빚졌던 마음을 조금 덜 수 있었다”면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많이 발굴하고 유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한국사회, 분단논리로 독립운동 바라보면 안돼… 제대로 된 평가 아쉽다”<김춘선 옌볜대 교수>

 

 

▲지난달 23일 중국 옌볜대 역사학과 회의실에서 열린 김춘선 옌볜대 교수(오른쪽)의 특강내용을 한 초등학생이

     받아 적고 있다.

 

답사 후반부는 중국 동북지방 옌볜조선족자치주였다. ‘북간도’로 불렸던 이곳에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적지, 대성중학교, 일송정,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 등 사적지가 즐비하다. 버스를 타고 러·중 국경을 넘은 탐방단은 이들 유적을 돌아본 뒤 귀국을 하루 앞둔 지난달 23일 백두산에 올랐다.

 

백두산에서 옌볜으로 이동 중에도 탐방단은 온통 독립운동 이야기뿐이었다. 버스 안에서는 장석흥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강의가 이어졌고, 중간에 사적지가 있으면 반드시 들렀다. 허룽(和龍)에서는 140여 계단을 올라 청산리 승전기념비를 둘러보고 이어 대종교3종사 묘역을 참배했다.

 

5박6일 마지막 공식일정은 김춘선 옌볜대 교수의 ‘북간도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특강이었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곳곳의 사적지를 답사하느라 일정이 지체된 탓이다. 오후 6시에 예정된 강의는 두 시간 늦은 8시에야 열렸다. 저녁식사는 더 늦춰져야 했다.

 

김 교수는 중국 북동지역의 한인이주사와 독립운동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갔다. 그는 옌볜 한인 이주의 뿌리는 한말이 아닌 병자호란 시기 청나라에 의한 민족의 강제 이주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발해사는 중국과 한국 역사에 모두 포함될 수 있다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입장을 보였다.

 

김 교수의 강의 주제가 1920년대 청산리 전투로 넘어가자 참가자들은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김좌진 장군은 후퇴하다 전투를 치릅니다. 주력부대인 홍범도 장군의 부대 쪽이 안전할 거라 생각해 밤새 600리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일본군 주력부대가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적진에 들어간 셈이 된 거죠. 김 장군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려고 선제공격을 합니다. 이게 어랑촌 전투입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멸위기에 빠집니다. 그때 홍범도 부대가 이를 알고 뛰어들어 대승을 거둡니다.”

 

김 교수는 분단 논리로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청산리대첩의 주역은 홍범도 장군인데 한국에선 사회주의자로 취급해 평가에 인색하다”며 “똑같은 이유로 1930년대는 사회주의 계열 무장투쟁이 주류를 이뤘는데도 한국 사회는 이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옌볜 일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면서 “옌볜을 중심으로 한 만주 지역은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은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의 이념은 달랐지만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데는 한마음이었다”며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공정하게 평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립기념관과 경향신문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 사적지 탐방 행사를 연중으로 벌이고 있다. 지난 4월부터 경기, 강원, 충청도 일대의 국내 사적지를 탐방하고 있으며 하반기(10~11월)에는 전라도, 경상도, 지리산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

 

<옌지(중국) | 박재현 기자 parkj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