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광평대군 묘(廣平大君墓域) - 세종대왕의 5자

야촌(1) 2007. 1. 14. 16:23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장의공(章懿公) 이여(李璵)의 묘(墓)이다.

    광평대군은 세종7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5남으로 태어나 8세 때에 광평 대군의 봉작되었다.

 

   배위는 여가부부인 평산신씨이며 증 좌의정 신자수의 따님이다. 묘지명은 대제학 이계전이 신도비명은

   청양군 심의겸 이 찬하였다.

 

↑좌측이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이고 우측이 배위 부부인 평산신씨(申氏)의 묘로 쌍분(雙墳)이다. 

 

↑광평대군의 묘표

 

↑봉분(封墳)의 정면중앙에 묘표(墓表)을 세우고 그 앞에는 상석(床石)을 놓았다. 상석(床石)의 고임돌

   은 능의 고석(鼓石)과는 달리 방형의 돌을 4개 사용하였다.   

 

↑묘의 전면과 좌우 앞쪽으로 석축을 쌓았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석의 정면에 약간 거리를 두고 장명등(長明燈)을 세우고, 장명등의 좌측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비수(碑首)의 모양이 단순한 방형으로 되어 있어 좀 특이하다. 

 

↑단아한 장명등의 모습이다.

 

↑대군의 묘 '장명등' 지붕돌에만 사방으로 구멍이 나있다. 무슨 의미가 있는 진 모르겠다. 

 

↑배위 신씨묘 장명등 지붕에는 구멍이 없다.

 

↑묘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전경

 

↑우측의 비가 숙종 때 분묘의 소재 위치를 기록한 '세장비(世葬碑))'이고, 좌측건물이 '도청(都廳)'이다.

    왕(王)의 능(陵)과 대군(大君)의 묘(墓) 구조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수서동 산 10-1)

 

●광평대군(廣平大君)

 

1981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 413,300㎡(125,242평)인 산에 광평대군 내외의 묘와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의 묘를 비롯해 광평대군의 양아버지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의 묘 등 700여 기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1425(세종 7)∼1444(세종 26). 조선 전기의 왕자. 광평대군 장의공(章懿公) 이여(李璵)는 1425년(세종 7)에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432년에 광평대군에 봉해졌다. 1437년에는 조선 태조의 일곱째 왕자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희생된 방번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되었다. 

 

광평대군은 활을 잘 쏘았으며 문장(文章)에 밝고 음률과 수학에도 뛰어나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壽)의 딸과 결혼하여 영순군을 두었으나 생선을 먹다가 걸린 가시 때문에1444년에 죽었다.

 

광평대군의 묘는 원래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부근인 광주(廣州) 학당리(學堂里)에 있었는데, 이곳에 조선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자 1495년(연산군 1)에 수서동 대모산 기슭으로 옮겼다. 이 묘역에는 오래된 종가재실과 신도비를 비롯해 숙종 때 조사한 분묘의 소재 위치를 기록한 세장비(世葬碑)가 있다. 이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가운데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