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세계의 고증-이계필
경주이씨의 족보는 1684년(甲子譜), 1748년(戊辰譜), 1814년(甲戌譜)에 각각 간행한 삼대보가 근간(根幹)을 이루고 있는데 실전세계의 기록은 없고 원대손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868년(戊辰譜) 백사공파보의 곤권(坤卷) 말미에 귤산(橘山) 李裕元 공이 지은 발문(跋文)에 실전 28대를 언급한 것이 시초이나 28대의 등초본(謄抄本)은 관제가 삼한(三韓)과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蹟)이 아님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합천이씨의 족보는 1529년(己丑譜 1책) 1754년(甲戌譜 5책) 1801년(辛酉譜 11책) 1876년(丙子譜 18책) 1907년(丁未譜 13책)까지 등재된 적이 없었으나 1932년(壬申大譜)에 시조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원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에 처음으로 게재되어 있다..
그후 1968년의 합천이씨족보에 35대 실전세계를 경주이씨 익재공파보와 평창이씨족보에 의거하여 실었다고 하였으며, 경주이씨족보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약 150년전 陜川李氏家譜에서 발견된 실전상계는 진천에 살던 慶州后 李學榮씨가 을유 7월에 奏文使로 북경에 가다가 노변에서 동종인을 만나 족보를 확인하여 5일간 머물면서 先祖의 失傳系를 찾아 唐紙板刻으로된 譜牒 一卷을 받들고 本國에 돌아왔다. 그후 弘文館都承旨인 全州后 李仁明이 撰하여 進啓하니 王이 允許하였기를...」
그러나 1904년에 경산군수 이계필(李啓弼)공이 경주이씨파보에 서술(敍述)한 내용은 "후손 계필이 임인(1902년) 여름에 고을군수로 왔는데 일가 사람 모모가 옛날 간행한 것을 받들고 와서........ 후일 고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필자가 이에 그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신라시대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며 시조의 18世(필자는 위작이라 생각하고 휘(諱)자를 모두 생략함)에 족보와 문집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족보의 역사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다. 안동권씨 성화보나 문화유씨 가정보를 살펴보아도 선조의 휘자와 관직명만 기록된 것이 조선초기까지의 간행된 족보의 양상인데, 자(字), 호(號), 시호(諡號) 및 행적이 상세히 기록된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또 150년전의 합천이씨 가보는 찾아 볼 수 없는 족보이며 연대별로 고찰하여도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고 특히 李學榮과 도승지 李仁明이란 분의 기록은 왕조실록과 사마방목 등에서 조차 고증하기가 어려웠으며 도승지는 홍문관의 관원이 아니다. 그런데 위작(僞作)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시조 알평공의 손자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되었다.
표암공의 손자 기록에 호를 표공(瓢公)이라 하였고 마한에 사신으로 간 내용 중 마한왕이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라고 꾸짖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天時)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내용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혁거세왕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을 예방한 내용의 일부와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한 부분이다.
그리고 저자 김부식은 호공에 대하여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이라 부언했으니 즉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는데 처음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공은 삼국사기에 계속 언급되는 인물이며 탈해왕때 재상(宰相) 급인 대보(大輔)에 임명되고 삼국유사에서는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이야기가 있으며 또 탈해왕때 호공이 숲속에서 황금궤를 발견하여 탈해왕이 가서 궤을 열어 보도록 하였더니 궤속에서 나온 아이가 후에 김씨의 시조 알지(閼知)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같이 신라초기의 호공(瓠公)을 표공(瓢公)으로 둔갑시켜 표암공의 손자 기록으로 위작한 내용이 거의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또 표공의 따님이 남해왕의 비(妃) 운제부인(雲梯夫人)이라고 했으나 이것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박씨의 족보 등 여러 문헌에 왕비는 김씨로 되어 있다.
이러한 35대 실전세계를 게재한 족보는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반론이 없고 시조로부터 대(代)를 빠짐없이 나열한 족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현재 우리 나라의 많은 성씨에서 신라와 고려시대의 계대가 실전된 족보는 흔히 볼 수 있으며, 우리 재령이씨도 분관시조로부터 고려말까지의 기록이 미비한 것은 당연한 역사의 결과이다.
표암공의 후예중 고려초-중기 고려사(高麗史)에 유일하게 관직과 졸년도(卒年度, 1040년)가 기록된 분은 아산(牙山) 이씨의 분관시조 이주좌(李周佐)공인데 이분의 후손도 고려 중기에 일부가 실전되어 고려말의 선조 옹(邕:기호파)과 용(聳:관서파)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다행히 1987년 경주이씨에서는 대종보에 실전세계의 허실을 논하고 중시조 소판공으로부터 계대를 하여 중시조의 몇세손[몇대손]이라 해야 할것이며 시조의 몇대[세]손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 바 있으니 필자가 이번에 발견한 위작부분은 역사학자들이 한번 더 고증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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