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사숙재 강희맹의 <독작도>
*사숙재 강희맹이 아들에게 쓴 편지.
나는 목욕재계하여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고, 손수 훈자오설(訓子五說) 한 질을 썼으며 아울러 아들 구손(龜孫) 용휴(用休)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는 바이다.
부귀한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자란 자제들은 부형(父兄)들이 날마다 부귀를 누리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하니 저들이 오늘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바로 선대에 거친 옷을 입은 덕택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으며, 오늘날 고량진미를 먹는 것이 전일에 푸성귀와 거친 밥을 먹은 결과라는 것을 어찌 알겠으며, 오늘날 앞뒤에서 호위하여 영화롭게 출입하는 것이 전일에 발이 부르트도록 도보로 걸어다닌 나머지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나는 비록 크게 성공한 부류는 아니지만 선조(先祖)의 교훈을 잘 받들어 선조의 뜻을 실추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부지런히 힘쓰고 고생하며 일찍이 학문에 뜻한 일과 부모와 스승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 일들을 대략 기록하여 너를 권면하는 바이니, 너는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겨우 두 살 때에 양모(養母)에게 의탁하여 자랐는데, 한없이 놀고 장난하여 나이 이미 12세가 되었으나 학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때 선친인 대민공(戴敏公)이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나가셨는데, 와서 나의 양모를 찾아보고 나를 군학(郡學 : 향교)에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양모는 눈물을 흘리시며 “저는 이 아이 때문에 마음이 위안이 되니, 학문이 성취되고 안 되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찌 굳이 슬하(膝下)를 멀리 떠나야만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선친도 눈물을 흘리며 나의 등을 어루만지고 말씀하기를 “네 스스로 학문을 할 줄 알아 성립하는 것도 천명이요,
네가 스스로 허튼 짓을 하여 끝내 떨치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스스로 분발하여 남보다 몇십 배, 몇백 배의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시골의 빈한한 선비는 아니었지만 학문에 뜻을 둔 자가 의복에 관심을 쓰면서 도리어 큰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바지 몇 벌과 여름에는 거친 갈옷 몇 벌로 추위와 더위를 대략 대비할 뿐이었다.
병인년(1446) 겨울에 관찰사(觀察使) 김겸광(金謙光) 등 여러 분들과 함께 광교산(光敎山)의 창성사(昌盛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집의 심부름꾼이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이와 서캐가 속곳에 들끓어 가려움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을 펴놓고 이것을 태웠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심부름꾼이 왔기에 새 속곳으로 갈아입고 손수 옷을 개어서 봉하여 보냈는데, 모친께서는 이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모친께서는 이것을 간직해 두었다가 내가 급제하기를 기다려 보여주었으며 또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였으니, 이는 너희들이 직접 목격한 바이다. 지금은 비록 비단옷을 몸에 두르고 있으나 내 일찍이 그 때의 고초를 잊은 적이 없다.
갑자년(1444) 여름에는 관찰사 이윤인(李尹仁) 등과 금주산(衿州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식구는 많고 양식은 부족하였으니, 그 사이에 어찌 굶주려 허기진 괴로움이 없었겠는가.
그리고 이해 겨울에는 황산(黃山)의 사나사(舍那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이때 눈이 쌓이고 날씨가 몹시 추우므로 가끔 승려들에게 채소를 얻어먹어 굶주림을 해소하였다.
지금은 비록 궁중의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즐비하여 배불리 먹고 누웠으나 내 일찍이 그 때의 괴로움을 잊은 적이 없다.
정묘년(1447) 가을에 과거에 급제하여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는데, 의정(議政) 남지(南智)를 사저(私邸)에서 뵙자, 남의정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험악하여 남의 악행을 들으면 행여 들추어내지 못할까 염려하고, 남의 선행을 들으면 행여 엄폐하지 못할까 염려하네. 처음 벼슬할 때에 처신하기가 가장 어려우며 특히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더욱 어렵네.
지금 그대는 양반가의 자제로 젊은 나이에 높은 등급으로 급제하였으니, 조금이라도 근신하지 않으면 잘못에 따라 사람들이 혹은 술주정을 한다고 비난할 것이요, 혹은 여색을 탐한다고 비난할 것이요, 혹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이네.”
나는 이 가르침을 듣고 물러 나와 그 말씀을 외우며 종신의 경계로 삼았다. 이제 비록 뜻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나 내 일찍이 이 훈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네가 이미 벼슬을 버리고 학문의 길로 돌아왔으니,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 사사로운 주장이 있으면 선(善)을 보고도 따르지 않으니, 이는 비유하면 마치 바위에 말뚝을 박는 것과 같아 들어가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마음속에 사사로운 주장이 없으면 의로운 말을 들을 경우 즉시 옮겨가니, 이는 물 속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잘 들어간다.
[참조]
조선조 초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강희맹(姜希孟)은 아들을 훈계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훈자오설:訓子五說)을 쓰고, 글을 쓰게 된 동기의 서문과 더불어 말미에 또 이와 함께 당부하는 위 내용의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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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姜希孟)
1424(세종 6)∼1483(성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회백(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석덕(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희안(希顔)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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