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신채호선생 묘/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야촌(1) 2014. 10. 9. 11:20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

 

↑신채호선생 생가

 

●신채호(申采浩)

 

1880(고종 17)∼1936.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등이다.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 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신채호선생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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