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성씨와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

야촌(1) 2014. 10. 3. 01:05

五洲衍文長箋散稿 / 日得

 

성씨와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

 

하늘이 사람을 낸 지 이미 오래다. 만일 사람에게 성(姓)과 씨(氏)가 없다면 그 족(族)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으레 성과 씨를 정하여 그 족을 분별하였으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무릇 성은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음)에서 생기고 씨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

 

천자(天子)가 제후의 출생한 지명을 따라서 성을 주고 수봉(受封)된 지명을 따라서 씨를 명하였으니,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

 

천자는 성과 씨를 줄 수 있고 제후는 씨는 줄 수 있다. 또한 성을 씨로 호칭할 수 없고 씨를 성으로 호칭할 수 없으며, 성은 혼인(婚姻)의 관계를 분별하고 씨는 귀천(貴賤)의 등위(等位)를 분별한다.전국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씨(氏)ㆍ족(族)을 호칭하였는데, 한(漢) 나라 때 사람들은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였다. 예를 들어, 태공(太公)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한 데는 성과 씨가 매우 분명히 구별된 것이다.

 

족보(族譜)에 대하여는 진(晉)나라 지우(摯虞)가 맨 처음으로《족성소목기(族姓昭穆記)》를 지었다.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하여 본국의 토성(土姓)으로는 삼한(三韓)과 삼국시대 왕공(王公)들의 후예가 많고 그 나머지는 혹 하사된 성(姓)이거나 혹 중국에서 나온 성들인데, 제 각기 보계(譜系)가 있어서, 중국의 성씨처럼 혼란스러워 상고하기 어려운 예와는 다르다. 고증할 만한 보첩을 아래에 대충 열거하려 한다.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2권은 정시술(丁時述)이,

《성원총록(姓苑叢錄)》은 임경창(任慶昌)이,《술선록(述先錄)》에 “임경창ㆍ정시술ㆍ정서천(鄭西川)은 보학(譜學)의 대가이다.”하였다.

 

《씨족보(氏族譜)》53권은 박사정(朴思正)이,

《백가보(百家譜)》10권은 허함(許涵)이,

《씨족원류(氏族源流)》는 이경렬(李景說)이,

《씨족원류》7권은 조종운(趙從耘)이 지었고,

《벌열통고(閥閱通攷)》4권은 우리 왕고(王考)의 윤문 수보(潤文修補)를 위시하여 불초손(不肖孫)인 나도 수보하였고,

《팔팔첩(八八帖)》은 벽진(碧珍) 이모(李某)가,

《만성총보(萬姓叢譜)》는 유언선(兪彦䥧)이 지었고,

 

《동교록(東喬錄)》28권은 저자(著者)가 전해지지 않는다.

 

진신(搢紳)들의 세보(世譜)로는 8대(代), 혹은 10대의 것을 모아 만든 것으로《문보(文譜)》ㆍ《무보(武譜)》ㆍ《음보(蔭譜)》ㆍ《사마보(司馬譜)》등이 있고,《명위보(明衛譜)》는 고려 시대 사람의 편저(編著)로 송경(松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며,《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양성지(梁誠之)가 지었고,《백가보략(百家譜略)》은 저자가 전하지 않는다. 성씨에 관한 책은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백제 때에는 8족(族)의 대성(大姓)이 있었다.《북사(北史)》에는 백제의 대성인 8족이 사(沙)ㆍ연(燕)ㆍ예(刕)ㆍ진(眞)ㆍ해(解)ㆍ국(國)ㆍ목(木)ㆍ묘(苗)로 되어 있다. 백제의 8성(姓) 중에 그 하나를 든다면, 진한(眞漢)ㆍ진우(眞祐)는 태위(太尉)ㆍ장사(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고, 진현도(眞玄菟)는 산법(算法)에 능하였다.

 

신라 때에는 육부(六部)에 사성(賜姓)하였다.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사성하였다.

 

즉,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崔姓)을,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하여 손성(孫姓)을, 우진촌(于珍村)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鄭姓)을,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하여 배성(裵姓)을,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로 하여 설성(薛姓)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 6성(姓)은 신라 시대의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고려 때에 와서는 성ㆍ씨가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한 성으로서 1백여 가지의 씨망(氏望- 본)이나 되므로 쉽게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13년(1789)에 경조장적(京兆帳籍)에 기입된 성(姓)이 4백 7가지이고,《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79성과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 기재된 13성은 정조 13년 경조 장적에 누락된 것으로 도합 92성이 된다.

 

기타 기벽성(奇僻姓)도 이루 다 기재되지 못하였으니, 성이란 다 상고하기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