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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꽃반지 끼고[1971] - 은희

야촌(1) 2014. 4. 29. 03:26

■꽃반지 끼고 - 은희(본명 김은희)

 

   1951년 5월 13일제주 출신

   뉴욕 주립대학교 졸업

 

 

은희(김은희) : 1951년 제주도 모슬포 출생이며, 대표곡으로 꽃반지 끼고(1971) 등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제주 방송국의 어린이 합창단원과 어린이 성우로 활약했고, 제주여고 때는 민속 예술단의 일원으로 전국 민속 경연 대회에 참가했다.

1968년 월, 갑자기 어머니에게만 귀 뜸을 하고는 가족들 몰래 여군에 지원했다.

뒤늦게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에서 여군 훈련을 거친 후, 대구에서 육군 제2군 사령부 소속 여군 타자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여군에 입대했을 만큼 그녀는 당돌하고 자유분방한 소녀였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 여군 생활에 싫증이 났던 그녀는 1968년 06월 15일 보름간의 정기 휴가를 얻고서 귀대하지 않았다. 탈영을 한 것이었다.

 

가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서울 예고 2학년에 전학해 학업을 마쳤다.

1970년 0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은희는 서울의 '살롱'가에서 무명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08월부터 한민 가수와 함께 이탈리아어로 개구리와 두꺼비라는 뜻의 '라나에로스포'란 이름으로 혼성 듀엣을 결성한 후, 사랑해(1970) 노래를 발표했다. 1971년 01월, 돌연 솔로 가수로 독립했다. 

 

당시는 남녀 혼성 듀엣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시기였다. 그 후,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1971년 03월 독집 음반 ‘꽃반지 끼고’(1971)를 발표했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1960년대 말 마닐라 아시아 잼 보리 대회에 참가한 재일 교포이다.

 

그리고, 이 곡은 은희 이전에 이미 김세환이 방송과 밤무대에서 부르곤 했다. 

김세환은 “종로의 출연 업소에 은희가 찾아와 이 노래를 취입하고 싶다고 했지만, 취입을 앞두고 있는지라 거절했었다.

 

그 후, 원제목인 '오솔길'을 '꽃반지 끼고'로 바꾸고, 가사도 수정하고, 편곡해서 은희가 먼저 음반을 발표했다.”라고 했다. 그녀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에 여성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노래들로 인기를 누렸었다. 

 

한창 잘 나가던 그녀는 1974년 결혼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뉴욕 주립대 패션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의상 디자인과 메이크업 등 이른바 토털 패션 디자인을 배웠다.

 

1985년 귀국한 그녀는 서울 압구정동에 '코디네이션 센터'를 열었고, 국내 공연·예술계에 '코디'란 개념을 전파했다. 

갤러리도 개설했다. 사업가로 대변신을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문화계 인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2003년, 서해 바다가 지척인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교촌 마을에서 감물 염색을 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제주와 함평을 오가며 작업을 하다가 2003년 아예 폐교를 사서 둥지를 옮겼다.

 

남편과 함께 폐교가 된 손불 남초등학교 운동장에 잔디와 들꽃 씨를 뿌렸고, 연못도 팠다. 

본관 건물을 고쳐 염색 연구소, 디자인 작업실, 작품실 등으로 꾸몄다. 

 

패션쇼, 콘서트, 연주회, 난장 파티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다목적 공연장도 갖췄다.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황토방도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민중 예술을 추구하며 간판을 '민예 학당'이라 내걸었다.

 

"가수였던 제가 어떻게 천연 염색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아요. 

출발은 뉴욕에서 공부할 때였어요. 유현목 감독의 영화 '장마'를 본 적이 있어요. 

 

장독대에 소나기가 내리는 장면을 보았어요. 

한국적인 것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2003년 전남 함평으로 둥지를 옮긴 이후, 감물 염색과 갈옷의 대중화에 힘썼다. 

함평은 물론 서울 인사동과 경남 진주에 매장도 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유통망 확보를 위한 고민도 하고 있다.

 

일본 도쿄,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를 순회하며 전시회와 발표회도 이어갔다. 고향 제주의 한 재래 시장을 지나다가 좌판에 깔린 갈옷을 본 순간, 필(Feel)이 꽂혔다. 갈옷은 예부터 땡감으로 염색해 제주 사람들이 작업할 때 즐겨 입던 옷이다.

 

땀 흡수력이 뛰어나고 습기와 냄새 제거 효과도 뛰어나다. 

푸른색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블루진에 맞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한국적인 감색 바지(코리아 브라운 진)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민예 학당을 천연 염색 보급과 우리 옷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는 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라남도는 모든 것이 자산 이예요. 유형. 무형의 자산을 개발하고 여기에 마케팅 감각만 더해진다면, 문화 산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어요.

 

민예 학당이 그 일을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가장 전라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