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구천 이세필 선생 시장

야촌(1) 2013. 12. 18. 22:33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군보(君輔), 호(號)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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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의정부좌찬성 행 형조참판 이공 시장 - 조태억(趙泰億)

(贈 議政府左贊成 行 刑曹參判 李公 諡狀)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세필(世弼)이며, 자(字)는 군보(君輔)이고, 호(號)는 구천(龜川)이다. 선계(先系)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시조(始祖)인 급량부 대인(及梁部大人) 이알평(李謁平)은 신라(新羅)의 개국 원신(開國元臣)이 되었으며, 신라 말기에 이거명(李居明)이라는 분이 있어 소판(蘇判) 벼슬을 지냈다.

 

고려(高麗)에서는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격(李翮)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세기(李世基)가 가장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연손(李延孫)이 참판(參判)을 지냈고, 그로부터 4세(世)를 지나 이몽량(李夢亮)에 이르러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시림 부원군(始林府院君) 정헌공(定獻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분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의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훌륭한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공의 증조(曾祖)는 이항복(李恒福)인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훈적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서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원훈(元勳)으로 녹훈(錄勳)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장차 모후(母后)를 폐위(廢位)하려고 하자 헌의(獻議)하여 극간(極諫)하였다가 북청(北靑)에 유배당하여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공을 백사 선생(白沙先生)이라고 일컫고 사림(士林)이 사당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다.

 

공의 대부(大父, 할아버지)는 이정남(李井男)인데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공의 선고(先考)는 이시술(李時術)인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선비(先妣)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참판을 지낸 홍영(洪霙)의 딸인데 숭정(崇禎)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16세 때에 내우(內憂)를 당하여 예법에 어긋남이 없게 거상(居喪)하였으며,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는 참판공(參判公)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지냈는데 공은 밤낮으로 허리띠조차 풀지 않은 채로 병간호를 하였다.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자기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부친에게 들도록 올렸고, 급기야 상(喪)을 당해서는 공의 아우가 부친보다 하루 앞서서 요몰(夭歿)하였고 백씨(伯氏)인 정랑공(正郞公)도 이미 그에 앞서서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은 외롭게 한 몸으로서 슬피 호곡(號哭)하느라고 숨이 멎어 기절할 정도여서 자기 몸조차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되었으나 빈렴(殯殮)하는 일에서부터 발인(發靷)하여 장례를 치르는 등의 여러 절차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치밀하게 점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성의와 신중함을 한껏 극진하게 다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74년 숙종 즉위년) 겨울에는 당인(黨人)이 효종[孝廟]을 폄하(貶下)하고 박대(薄待)하였다는 이유로 정승 송시열(宋時烈)을 논죄(論罪)하고 장차 극률(極律)을 가하려고 하였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분개하였으나 도리어 앙화(殃禍)를 당할까 무서워하여 나서서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공은 평소에 송 정승을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도 개연(慨然)히 나서서 여러 선비들을 창도(唱導)하여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의 원통함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특명(特命)으로 공을 변방에 유배시키고 상소에 참여한 여러 유생들을 모두 정거(停擧)하도록 처분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어명을 환수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임금은 엄한 비지(批旨)로써 그들을 꾸짖었다. 이에 대신(大臣) 중에 그 일에 대하여 말을 한 자가 있어서 재차 유배지를 바꾸어 영광(靈光)에 유배되었는데 공은 대궐 아래에서 대명(待命)한 채 집안사람들과 작별조차 하지 않고서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 생활을 한 지 5년이 되도록 발걸음이 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고 군수(郡守, 영광 군수를 말함)는 상관(上官)이었는데 공이 국법(國法)에 따라 관청 문에 나아가서 매우 근신(謹愼)하는 태도로 점고(點考)에 응하였으므로 군수가 그 때문에 공을 찾아와서 사례하였다.

 

어느 날 ≪퇴계집(退溪集)≫을 열람하다가 느낌이 일어나는 바가 있어서 곧 그 서독(書牘)을 초록(抄錄)하여 ‘소주서(小朱書)’라고 책이름을 제(題)하고 또 ≪소학(小學)≫ㆍ≪심경(心經)≫ 등의 서적을 가져다가 두루 읽고서 더 나아가 사자(四子, 사서(四書)를 말함)에 이르기까지 전심(專心)으로 정밀하게 완색(玩索)하였으며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독서를 하였고 한번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공의 학문의 발인(發軔)은 대체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 군(郡)에 이름난 기생(妓生)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을 인하여 공에게 찾아와서 뵙고는 밤이 되었는데도 일부러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공은 그 기생을 꾸짖어 멀리하고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한 때의 유명한 여러 사람들 중에 공의 시를 전해듣고 화답(和答)한 자들이 많았다.

 

유배 생활을 한 지가 오래되자 살아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고 간혹 끼니거리조차 바닥나기까지 하였으나 남이 주는 것을 사양하거나 받아들이는 점에 있어서 매우 엄격하게 처신하여 털끝 하나도 구차스럽게 받지 않았다.

 

이에 남중(南中, 여기서는 호남 지역을 말함)의 선비들이 한 도(道)에 통문(通文)을 돌려 재화(財貨)와 곡식을 출연(出捐)해서 상조(相助)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무수(武帥, 무관(武官) 출신의 장수(將帥)를 말함)가 간혹 보내주는 선물이 있었으나 이 또한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공의 고모부[姑夫]인 상공(相公) 정지화(鄭知和)가 그 소문을 듣고서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자네의 사수(辭受, 남이 주는 것을 사양하거나 받아들이는 일)는 그야말로 너무 분명하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 죄를 사면(赦免)받아서 집에 돌아왔고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는 공을 벼슬에 추천한 자의 말을 채용하여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배명(拜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러 공경(公卿)들이 공을 독서를 통하여 자기 몸을 가다듬고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수양한 사람이라고 서로 번갈아가며 추천하였고,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년)에 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는데 공은 벼슬에 제수될 때마다 번번이 사직하는 것은 자중(自重)함에 있어 혐의가 있는 일이라고 여겨 마지못해 벼슬에 나아갔다.

 

얼마 안되어 다시 공을 천거한 자의 말을 채용하여 6품관(品官)에 승진하여 군직(軍職)에 부쳤으며,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년)에는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친혐(親嫌)으로 인하여 체직되어 용안 현감(龍安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에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용안현(龍安縣)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였으나 공은 지극한 정성으로 주민들을 무마하고 기민(饑民)들을 진휼하는 일에 그 방도를 다하였으므로 주민들이 서로 자기만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거나 끼니를 굶어 말라죽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학교(學校)에 신경을 써서 그 자제들 중에 준수(俊秀)한 자들을 골라서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가르치고 매달 초하루마다 시강(試講)하자 사방의 이웃 고을에서 이 일에 느낌을 받아 흥기하였으며 방백(方伯)이 공의 선정(善政)을 조정에 칭찬하여 알렸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는 진위 현령(振威縣令)으로 옮겼고,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는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승진하였으며 두 곳에서 모두 남다른 치적을 쌓았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봄에는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장차 문묘(文廟)에 제향(祭享)해 오던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성혼(成渾))를 출위(黜位)하려고 하였으므로 이에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서 진위(振威)의 향장(鄕莊)으로 돌아왔는데 나물반찬과 현미밥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할 만큼 살림이 궁색하였으나 공은 아주 편안하게 여겼으며, 날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송독(誦讀)하면서 오로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 공부에 힘을 쏟았다.

 

공이 사는 집 앞에 큰 하천이 있었는데 한가한 날이면 그 위에서 소요하였고 그로 인하여 자호(自號)를 삼고서 마치 그렇게 하면서 세상사를 망각한 사람처럼 지냈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경화(更化, 갑술환국을 말함)하자 공은 즉시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임명받았고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년)에는 등급을 뛰어넘어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으나 배명(拜命)한 뒤에 곧바로 체직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다.

 

공은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에 차서(次序)가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여겨 소(疏)를 진달하여 바로잡으려고 하였다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공이 쓴 상소문의 초고(草稿)와 선배들이 태묘의 악장에 관하여 논한 소계(疏啓) 등을 가져다가 한 편(編)으로 엮어 만들어서 이원(梨園)의 고사(故事)로 삼았다.

 

병자년(丙子年, 1696년 숙종 22년)에는 서연관(書筵官)에 선발되어 역말을 공의 집에 보내 불렀는데, 공은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해주지 않았고, 그해 가을에는 또 임금이 별유(別諭)를 내려 공을 한시바삐 불러오도록 하였으나 공은 끝까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ㆍ제용감 정(濟用監正)ㆍ양주 목사(楊州牧使)ㆍ이천 부사(利川府使)ㆍ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제수되었으나 혹은 취임하기도 하였고 혹은 취임하지 않기도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받았는데 사양을 하자 체직이 되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

 

상주는 처리해야 할 사무가 많아서 다스리기 힘든 고을이었고, 게다가 여러 번 흉년을 겪은 까닭에 여러 가지 폐단들이 숱하게 발생하였다. 이에 공은 그곳에 부임하여 한결같이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일로 급무(急務)를 삼자, 형장(刑杖)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교활한 아전들이 사사로이 서로 경계하기를, “만약 감히 명부(明府)를 속이는 자가 있으면 사벌(私罰)이 있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몸을 사렸다.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일찍이 이 고을에 재임하면서 서실(書室)을 많이 축조하여 고을 안의 배우는 사람들에게 학과(學課)를 매겼는데 그 뒤로 그 일을 이은 자가 없었다. 이에 공이 훈장(訓長)을 골라서 서실에 두고 그로 하여금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학생들의 근만(勤慢)을 기록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였으며 때때로 공이 몸소 서실에 가서 깨우치고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효제(孝悌)의 의리로써 거듭 당부하였다.

 

이에 온 고을 전체가 그에 감동되어 영향을 받았다. 당시는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의 돌림병이 발생한 뒤끝이어서 사민(士民)들 중에는 상(喪)을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병에 전염될까 두려워하고 피하여 성복(成服)을 할 수 없었는데 이에 공은 예교(禮敎)에 근거하고 인용하여 글을 지어서 주민들을 효유(曉諭)하고 아울러 절목(節目)을 구비하여 그중에 이미 뒤늦게 잘못 성복(成服)한 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주자(朱子)가 증 무의(曾無疑)에게 답(答)한 서신(書信) 내용에 따라서 성복한 날짜 수를 계산하여 그 사이를 제복(除服)하고 기일(忌日)에는 별도로 제전(祭奠)을 장만하여 이상(二祥)을 물려서 거행한다는 뜻을 고(告)하도록 하였으며, 기ㆍ대공(朞大功)의 경우에는 날짜를 계산하여 제복하고 시ㆍ소공(腮小功)의 경우에는 송장(送葬)이 우제(虞祭)를 넘긴 뒤에 제복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을 안의 인사(人士)들이 앞다투어 서로 감동하고 잘못을 깨달아서 잘못된 풍습이 일변(一變)하였으며, 다른 인근 고을에서도 찾아와서 보고 본받았다.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년)에 장령(掌令)으로서 조정에 소환(召還)되었는데 전후(前後)로 아홉 번이나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계미년(癸未年, 1703년 숙종 29년)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삼척은 동해(東海)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풍속이 박로(樸鹵)하여 문아(文雅)함이 없었으나 공은 관재(官財)를 연납(捐納)하여 서당(書堂)을 창설하고 손수 학규(學規) 21조(條)를 정한 뒤에 고을의 우수한 자제들을 가려 뽑아 날마다 친히 그들을 강수(講授)하고 과제(課題)를 매기며 공부하기를 독려하자 문풍(文風)이 그 일로 인하여 일신(一新)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705년 숙종 31년)에는 집의(執義)로서 조정에 소환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임금이 왕위(王位)를 전선(傳禪, 다음 후계자에게 지위를 선양(禪讓)함)한다는 어명이 있었으므로 공은 이에 소를 올려 어명을 다시 거두기를 요청하고 아울러서 마음을 다스리고 질병을 다스리는 설(說)을 진달하기를, “몸이 노곤(勞困)하면 질병이 생기고 몸이 권태로우면 생각이 방일(放逸)하는 것은 곧 예로부터 지금까지 보통 사람들이 으레 겪는 통환(通患)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마음을 주재(主宰)로 삼지 아니한 까닭에 그렇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성현(聖賢)들은 다만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에 있어서만 그렇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비록 질병을 다스릴 때도 수양(修養)을 급무(急務)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운용한 방법에 대하여 논해보자면, 반드시 자기의 기욕(嗜慾)을 조절하고 덜어냄으로써 혈기(血氣)를 충완(充完)시키고 이목(耳目)에 사역(使役)되지 않게 하여 심지(心志)로 하여금 허령(虛靈)하고 느긋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을 조존(操存)하고 수렴하는 공부는 또 심신(心身)을 순조롭고 알맞은 경지에 두는 일에 달려 있는데, 그러한 상태로 날이 지나고 달이 쌓이면 신묘한 공효(功效)가 암암리에 운용되어 강강(剛强)한 양기(陽氣)가 이미 우승(優勝)하고 사악(邪惡)한 음기(陰氣)가 저절로 소멸됨으로써, 진원(眞元)이 안에서 잡아당기고 외사(外邪)는 물러나서 순종하게 되니, 어찌 반드시 천위(天位)를 풀어버리고 대보(大寶)를 내버림으로써 한가하고 조용하게 살면서 사무(事務)를 줄인 뒤라야만 바야흐로 질병을 다스리는 방도가 되겠습니까?

 

옛날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하기를, ‘엄공(嚴恭)하고 인외(寅畏)하여 감히 황녕(荒寧)하지 않음으로써 기욕(嗜慾)을 억제하고 경외할 수 있었던 것이 은(殷)나라 선철왕(先哲王)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나라를 오래 누리고 수명을 오래 누린 공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몹시 걱정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질병을 초래하였다거나 경쟁하는 일에 신경을 깊이 써서 본성(本性)을 손괴(損壞)하였더라면 은나라와 주나라의 임금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장수를 누릴 수가 있었겠으며, 주공 같은 성인(聖人)이 또한 어찌 그런 말을 임금에게 권면(勸勉)하였겠습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병술년(丙戌年, 1706년 숙종 32년)에 다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이인엽(李寅燁)공이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아뢴 말로 인하여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승진하였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이직(移職)되었는데, 공은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8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고 9월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 1708년 숙종 34년)에는 또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711년 숙종 37년)에는 공의 나이가 70세이고 맏아들인 이태좌(李台佐)가 시종신(侍從臣)이 된 까닭에 추은(推恩)되어 전례에 따라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하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임진년(壬辰年, 1712년 숙종 38년)에 공조 참판(工曹參判)ㆍ한성부 우윤에 임명되고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년)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갑오년(甲午年, 1714년 숙종 40년)에 임금이 재차 군신(羣臣)의 진연(進宴)을 받으면서 별도의 유시(諭示)를 내려 공을 진참(進參)하게 하였으나 늙고 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717년 숙종 43년) 7월에 임금이 상신(相臣) 이이명(李頤命)을 불러다 독대(獨對)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내린 전교가 대단한 비밀이었기에 온 나라가 놀라고 황당해 하였다. 공은 그때 직명(職名)이 없었지만 듣고서 경악(驚愕)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라가 망할 일이니 의리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소(疏)를 구성하여 올리려고 하는데 집안사람이 (공이) 그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 더러 간(諫)하는 것을 멈추게 하자 공이 답하기를, “내 나이 또한 80세이다.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할 말을 다하고 죽은들 다시 무엇이 유감스럽겠는가?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운명이 아닌 것이 없다.” 하고, 가동(家僮)을 시켜 곧바로 승정원(承政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성궁(聖躬)이 여러 해로 화기(和氣)를 잃었기에 이런 근심은 근래에 다시 첨가되어 아뢰는 문서를 열람하는데 방해가 되므로 사지(辭旨)에 드러내는데 이르렀으니, 신민(臣民)은 마음을 졸이며 민망해하고 근심함이 여기에서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대신(大臣)을 인접(引接)하고서 그때마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특별히 왕세자(王世子)가 청정(聽政)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윽이 향려(鄕廬)에 엎드려 저보,1)(邸報)를 접하고 사사로이 자신의 마음에다 말하기를 ‘정섭(靜攝)은 지금 전심(專心)해야 하고 기무(機務)도 지체되지 않을 수 있으니 대성인(大聖人)의 뜻을 따라 변통(變通)하는 도리에 매우 적합하다.’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들으니 사대2)(賜對)할 때에 동궁(東宮)에게 책비(責備)하도록 하면서 대단히 미안한 전교를 내렸다고 하는데 도로에서 전해듣고 놀라며 의혹스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신은 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지경에 엎드려 있으면서 귀로 그 한두가지를 몰래 들었으나 감히 급하게 믿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할 말이다.

 

우리 전하(殿下)의 지혜와 성스러움이 전대(前代)의 으뜸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는 틀림없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고 하였는데, 잇달아 옥당(玉堂)과 사헌부(司憲府)의 신하가 상소하여 논열(論列)하는 바가 있다고 들었으니 앞서 들은 것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 듯합니다.

 

아!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왕세자는 인애와 효성이 아울러 극진하며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고 덕성(德性)을 기른 지 30년에 어질다는 명성과 소문이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스며들어 온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왕세자를) 위하여 목을 빼어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날 인현 성후(仁顯聖后)가 세상을 떠난 뒤에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신에게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빈사(殯肂)에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즈음에 눈물이 비 오듯하여 슬퍼함이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다.’고 하면서, 인하여 감탄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슬퍼 오열하였으며 이어서 기쁘고 다행스러워 말하기를, ‘효도란 모든 행동의 근본이니 성덕(聖德)이 어찌 효도보다 뛰어나겠습니까? 저군(儲君)의 성효(誠孝)가 이와 같으니 실로 만년토록 종묘사직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년) 이후로는 동궁(東宮)이 처한 바가 그야말로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경지(境地)와 지극히 처리하기 어려운 처지(處地)에 처했으면서도 궁정(宮庭)이 화합하고 융화하여 기쁨이 흘러 넘치고 여항(閭巷)에는 기미(幾微)의 말이 끊겼으니, 이는 그의 지덕(至德)과 순행(純行)이 반드시 일반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들이 한없이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에 있었는데, 오늘 ‘운운(云云)’이라는 말씀을 갑자기 내리신 것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천만 뜻밖의 일이었으니, 뭇 신하들이 깜짝 놀라고 인심이 심하게 동요하는 정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 동궁은 인효(仁孝)가 하늘로부터 타고났고 행의(行誼)가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이와 같고, 우리 전하는 지극한 인애(仁愛)로써 모든 백성들을 감싸 덮어주고 지극한 명찰(明察)로써 정사에 임하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실올처럼 가늘어도 한 번 입밖에 그 나오면 동아줄같이 굵어지므로 말을 전하다보면 곧잘 잘못 전해지곤 합니다. 전하는 이 점에 있어서 실언(失言)을 하신 셈이라고 봅니다.

 

옛날에 이필(李泌)이 당(唐)나라 덕종(德宗)에게 고하기를,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사나흘 동안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러한 뜻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반드시 태자(太子)에게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매양 이 글을 읽게 될 때마다 일찍이 보던 책을 덮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저황(儲皇, 태자를 말함)이 급박한 처지에 놓인 것을 슬퍼하고 어진 재상이 충심으로 정성을 다한 것에 감격하였습니다.

 

아! 부자(父子)는 천성(天性)이고 태자(太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비록 한때 희노(喜怒)가 발(發)한 것으로 인하여 미처 재량(裁量)하지 못하고 미처 서찰(恕察)하지 못하여 꾸지람이나 책망을 한 바가 있을지라도 마침내는 능히 평정한 마음과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세하게 생각하고 세세하게 고구(考究)하면 안으로는 자애(慈愛)의 천성이 무럭무럭 저절로 우러나오고 밖으로는 화란(禍亂)의 우려가 걱정스럽게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까닭에 비록 덕종(德宗)처럼 하등(下等)의 인주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뉘우치고 깨달음으로써 부자(父子)가 모두 온전하게 되었고 군신(君臣)이 모두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백왕(百王)보다도 한결 더 고명(高明)하시거늘, 이러한 일을 처리하심에 있어서 어찌 느긋하고 여유롭게 대처하지 않으시고 일반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은 비록 이 일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만일 전하께서 다시 당사(唐史)를 가져다가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열람하면 반드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측은한 생각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이제 바라건대 여러 대신(大臣)들이 한 말을 받아들이고 채용하되, 이미 비망기(備忘記)로 내리신 성명(成命)이 있으니 전례를 살펴 거행하는 일이 마땅히 며칠 안에 곧 있게 될 것입니다.

 

참여하여 결정하고 왕명을 받들어 품지(稟旨)하는 즈음에 오직 바라건대 점잖고 느긋하신 태도로 너그럽게 대처하여 지성(至誠)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바람직한 계획을 계우(啓佑)하되 그 극도(極度)의 한계까지 적용하시지 않음이 없도록 함으로써 억만년 오래도록 무강(無疆)한 도모(圖謀)에 대하여 기반을 잡고, 또 대소 범백(大小凡百)에 있어서 온 마음을 다하여 세자를 부호(扶護)함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불안하게 생각할 단서가 있지 않도록 해주시고 자식에 대한 자애로운 인심(仁心)을 더욱 빛내어 명확한 비지(批旨)를 후련하게 내리되 잘못을 뉘우치고 진실을 깨달았다는 뜻을 깊이 진술함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의혹을 풀어주고 중외 사람들의 동요하는 심정을 진정시키면, 어찌 수많은 생령(生靈)들만이 감탄(感歎)하고 흠복(欽服)하겠습니까?

 

종묘(宗廟)에 오르내리는 정령(精靈)께서도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너그럽고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 당시에 공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전해들은 자들은 다들 혀를 내두르며 놀라고 감탄하면서, “반드시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의 비답이 내리자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고 또 다들 서로 경하(慶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신하의 충간(忠諫)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성군(聖君)의 덕을 우러러 칭송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718년 숙종 44년)에는 혜릉(惠陵)이 승하(昇遐)하자 복제(服制)와 복색(服色)에 관한 일로써 예관(禮官)이 재차 왕명을 받들어 공의 집에 찾아와서 문의(問議)하였으나 모두 사사(辭謝)하고 감히 대답하지 않았으며, 공의 나이가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때였는데도 신기(神氣)가 건강하고 왕성하였는데, 12월 5일에 이르러 우연히 피로한 기색을 보이더니 밤중이 되자 숨이 점점 희미해졌다.

 

이에 급히 서둘러 약물을 드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하더니, 6일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7세였다. 숨이 멎을 무렵에 ≪소학(小學)≫을 재차 일컬었을 뿐이고 다른 말은 없었다.

 

이날 밤에 하얀 기(氣)가 침실(寢室)에서 일어나 하늘에까지 뻗쳤는데 마치 불빛처럼 환하게 밝았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으며, 기해년(己亥年, 1719년 숙종 45년) 2월에 진위현(振威縣) 북쪽의 미향(未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資稟)이 온화하고 순수하였고 덕용(德容)이 단중(端重)하였으며, 겉으로는 너그럽고 부드럽게 보였으나 내심은 실로 강직하고 공정하였다. 견식(見識)이 투철하고 명오(明悟)하였고 시조(施措)가 정심(精審)하였으며, 젊은 시절부터 이미 의리(義理)의 변별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유배당한 뒤로부터는 특히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심하였는데 ≪대학(大學)≫ 한 책에 공을 들인 것이 가장 많았다.

 

이를테면 정심장(正心章)의 전문(傳文)에 체용(體用)을 겸(兼)해야 한다는 등의 설(說)에 있어서는 실로 선유(先儒)들이 발명(發明)하지 못한 바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공의 학문적 경향은 오로지 정밀하게 사색함을 우선으로 여겼고 실천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여겼으며 무릇 궁구(窮究)해야 하는 의리(義理)를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의 정조(精粗) 본말(本末)과 거세(巨細) 곡절(曲折)을 머리로부터 이해하여 사색하고 또 사색함으로써 껍데기를 철저하게 벗겨낸 뒤에라야 그만두었다.

 

또 반드시 느긋하고 차분한 태도로 함영(涵泳)하고 조용하게 몸소 체험함으로써 공을 들인 것이 이미 익숙해지자 문로(門路)가 단적(端的)하여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였으니, 대체로 이미 혼자서만 알아차린 오묘(奧妙)한 경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말하기를, “나는 궁리(窮理)하고 격치(格致)하는 일에 대하여 늘 피를 흘리며 싸우는 듯한 공부를 한다.

 

배움이라는 것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고서 단지 옛사람의 이야기에만 의존하면 끝내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년(晩年) 이후로는 더욱 예학(禮學)에 공력을 들여 무릇 경전(經典)에 있어서는 정문(情文,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말함)에 대하여 강관(講貫)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위로는 ≪의례(儀禮)≫와 ≪대대례기(戴大禮記)≫로부터 송(宋)나라와 명(明)나라 및 우리나라 여러 선유(先儒)들의 예설(禮說)을 잠심(潛心) 완역(玩繹)하여 서로 참고하고 대조하여 감정(勘定)하느라고 잠자고 먹는 일조차 잊을 정도로 깊이 연구한 기간이 석 달이나 되어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되기까지 하였다.

 

경사 대부(卿士大夫) 중에 길흉사(吉凶事)에 의문스러운 점이나 변례(變禮)를 당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공에게 찾아가 질문하곤 하였는데 공은 그에 대하여 원류(源流)를 추구하여 상세하게 증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적확한 논의에 승복하였다.

 

일찍이 참최복(斬衰服)에 연제(練祭)가 지난 뒤에 질대(絰帶)를 포(布)로 하느냐 갈(葛)로 하느냐의 변례(變禮)에 대해서 곧 참최복과 자최복(齊衰服)의 큰 분한(分限)인데도 ≪상례비요(喪禮備要)≫의 도식(圖式)에 모두 포(布)를 착용하는 것은 예(禮)의 뜻에 어긋난다고 한 것에 대해서 명재(明齋) 윤공(尹公, 윤증(尹拯)을 말함)과 더불어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증(講證)하여 정론(定論)을 저술하였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우애와 화목(和睦)에 독실하였으며 상중(喪中)에 거상(居喪)할 때에는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흙바닥에서 자면서 채소만 먹으며 줄곧 고례(古禮)를 준행하였으며, 선친(先親)의 기일(忌日)을 당할 때마다 마치 초상 때처럼 슬프게 통곡하였다.

 

간혹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신위(神位)를 마련하여 호곡(號哭)하면서 앉은 채로 날을 새우다시피 하였으며 나이가 매우 늙어진 뒤에도 오히려 그 일을 폐하지 않았다. 친진(親盡)한 선대의 묘소에는 별도로 재물과 곡식을 저축하여 봄과 가을의 향사(享祀)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두 형수(兄嫂)와 두 누님이 모두 나이가 늙어서도 곤궁하게 살아가자 그들을 지성으로 받들어 모시고 봉양하였다.

 

생질녀(甥姪女)가 혼인을 하게 되자 공은 자기가 살던 집을 팔아서 혼수(婚需)를 보태주었고 고을 사람들과 친척 중에 살림이 빈궁한 자들은 모두 공에게 의지하여 끼니를 해결하였기에 달려가기를 자기 집에 가듯하였으며, 집안 여자들은 규문(閨門) 안에서의 몸가짐이 매우 엄숙하였다.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거처와 음식은 겨우 모자란 점이 없게 하는 정도로 그쳤으며, 비록 나이가 젊은 부녀일지라도 감히 화려하게 눈부신 옷을 입고 공을 뵙지 못하였다. 항상 추서(推恕)하는 일을 위주로 여겨 남을 상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 ‘용서[恕]’라는 한 글자로서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은 주도면밀하게 하면서도 남에 대한 책망은 너그럽게 하였다.

 

남의 착한 점은 곧잘 드러내어 주위에 알리고 남의 단점은 드러내어 알리기를 싫어하였으며, 만일 남이 심각하고 모질게 하는 말을 들으면 문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특히 명예를 가까이하는 행태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의 선비들이 너무 높게 표방(標榜)을 세우고 성예(聲譽)가 너무 지나친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평상시에 기거(起居)할 때에는 점잖고 차분하여 스스로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였고, 과격하고 모난 행동을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겸양하고 공순하여 성의(誠意)가 모든 몸짓에 은근히 드러났으며 행동거지가 느긋하고 점잖아서 표리(表裏)가 똑같았다.

 

항상 말하기를, “나이가 늙으니까 천기(天機)가 깊어지고 기욕(嗜慾)이 얕아지는 것을 자각(自覺)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는 내직(內職)을 사양하고 존위(尊位)를 사양하여 진취(進取)에 담담하였는데,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물어보면 문득 말하기를, “나는 곧 일개 음관(蔭官)일 뿐이다.

 

내 분수가 아닌 관질(官秩)은 외람되게 받들 수 없다. 다만, 대대로 나라의 국록(國祿)을 받아온 신하로서 의리상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벼슬에 나서는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낸다고 해서 차이를 두지 않았고, 매양 당사(黨私)를 없애고 붕비(朋比)를 제거하는 일에 깊이 마음을 쏟으며 말하기를, “붕당(朋黨)을 없애지 않으면 풍속이 좋아질 수가 없고 기강을 세울 수가 없고 인심이 바루어질 수가 없고 사로(仕路)가 맑아질 수가 없고 사부(士夫)들의 염치(廉恥)를 배양할 수가 없고 민생(民生)의 곤췌(困悴)함을 구제할 수가 없으며, 오직 날마다 위망(危亡)의 길로 나아갈 뿐이다.

 

만약 그 근원을 궁구해 본다면 명리(名利)를 경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단지 마땅히 그 자잘한 과실(過失)을 없애주고 다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감으로써 피차간을 잊고 작록(爵祿)을 공정하게 하며, 남을 시기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릇 오늘날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이 비록 좋은 계책이나 사려(思慮)를 내어 임금을 존귀하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차마 파란(波瀾)을 조장하여 집안을 망하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단서와 좌우 사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시비를 분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되, 남을 상대해서는 절대로 그 일에 대하여 논설(論說)을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일은 학자(學者) 개인에 있어서도 애당초 심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아니고, 국가 전체에 있어서도 실로 난망(亂亡)의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차라리 그냥 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남들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정의(情誼)를 모두 다하였으되 한결같이 성의(誠意)를 미루어 깐깐하게 충고(忠告)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748년 영조 24년)에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朴世采)를 말함)이 이조 판서로서 임금의 부르심에 나아가자 공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극력 만류(挽留)하기를, “예로부터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방도가 비록 한 가지는 아니었으되 그 대요(大要)를 들어서 말하자면 시기(時機)를 헤아리고 역량을 가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당국(當局)함은 방관(傍觀)하는 것과 다르고 시기를 만드는 것은 시기를 말하는 것만 못하오.

 

이것은 문하(門下, 박세채를 말함)에게 있어서 마땅히 미리 강구하고 깊이 생각해야 되는 일이오.”라고 하였으며, 이어 반복해서 그것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자 박공은 과연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성문(城門)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명곡(明谷) 최공(崔公, 최석정(崔錫鼎)을 말함)이 ≪예기유편(禮記類編)≫으로 변론(辯論)할 때에도 공은 또 장문(長文)의 서독(書牘)을 그에게 보내어 그가 인복(引服)하기를 권유하였는데 최공 또한 공의 말을 쓰지 않더니 뒤에 과연 원수(怨讐) 관계에 있던 자의 말 때문에 호되게 곤욕을 당하였다. 이에 식자(識者)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인정하였다.

 

공이 학문에 대하여 논한 것을 말하자면,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는 마음을 성실하게 지니고 지향(志向)을 독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향이 독실하지 않으면 그 학문이 태만하게 되고 마음이 성실하지 않으면 그 선행이 위선(僞善)이 된다.

 

그러나 처음 학문을 배우는 선비에게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성실하고 독실하기를 책난(責難)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생각건대 나날이 분발하고 면려하여 망각하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서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게 되면 저절로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예학(禮學)은 진실로 힘써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는 하되 단지 일개 유사(有司)의 직분(職分)일 따름이다.

 

그것을 성리(性理)의 학문에 비교해 보건대 진실로 완급(緩急)과 선후(先後)의 차서(次序)가 있다. 모름지기 먼저 ≪소학(小學)≫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들을 읽어서 근본을 배양하고 그 길목을 찾아낸 뒤에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및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 등의 서적을 두루 읽어야 하며 만일 그러고도 여력(餘力)이 있거든 비로소 예학(禮學)에 대하여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

 

또 공이 도덕(道德)의 연원(淵源)과 선철(先哲)의 본말(本末)에 대하여 논한 것을 말하자면, 매양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李滉))을 추앙(推仰)하여 해동(海東)의 주자(朱子)라고 하였다. 또 현석(玄石, 박세채)이 편찬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대해서도 고증하여 정정(訂定)한 바가 많았으며, 무릇 여러 선현(先賢)들의 출처와 논의의 고하(高下)와 수박(粹駁, 순수함과 조박함)에 대해서도 고증하여 논한 바가 정밀하였고 품제(品題)하여 평론한 바가 명확하였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감정(勘定)한 바가 더욱 명석하였는데 남에게 꺼내 보여준 적이 없었다. 평생동안 저술(著述)에는 일삼지 않았고 특히 시문(詩文)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경설(經說)에 대하여 논변(論辯)한 것과 의례(疑禮)에 대하여 문답한 것이 20여 권(卷) 되는데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부인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찬성(贊成)에 추증된 박세모(朴世模)의 딸이며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인 이태좌(李台佐)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공조 판서(工曹判書)이고, 차남인 이정좌(李鼎佐)는 부사(府使)이고, 셋째 아들인 이형좌(李衡佐)는 감사(監司)이고, 막내아들인 이경좌(李景佐)는 일찍 요절하였다.

 

장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박항한(朴恒漢)에게, 차녀는 권섭(權燮)에게, 막내딸은 부사(府使) 원명귀(元命龜)에게 각각 시집갔다. 판서(判書)는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홍득우(洪得禹)의 딸을 아내로 맞아 수찬(修撰) 이종성(李宗城)과 진사(進士) 이종항(李宗恒)을 낳았고 딸은 판관(判官) 윤희계(尹熙啓)와 진사 신호(申濩)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부사(府使)의 초취(初娶)는 장령(掌令) 유연(柳)의 딸이고 재취(再娶)는 박신부(朴信阜)의 딸인데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이종주(李宗周)는 일찍 요절하였고, 차남은 이종철(李宗喆)이고, 셋째 아들은 이종적(李宗迪)이고, 막내아들은 이종엽(李宗燁)이며, 딸들은 군수(郡守) 권성중(權聖重)과 홍계성(洪啓成)과 송정경(宋廷璟)에게 각각 시집갔다.

 

감사의 초취는 목사(牧使) 윤지경(尹趾慶)의 딸이고 재취는 심수익(沈壽益)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이종백(李宗白)은 봉교(奉敎)이고 차남은 이종덕(李宗德)이고 막내아들은 이종익(李宗翼)이며 딸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공의 맏사위인 박항한이 낳은 아들 박민수(朴民秀)는 군수이고, 박문수(朴文秀)는 감사이며, 딸은 이광운(李匡運)에게 시집갔다. 공의 막내 사위인 원명귀가 낳은 맏아들 원경하(元景夏)는 진사이고, 작은 아들은 원경유(元景游)이며, 딸은 조재호(趙載浩)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아! 문충공(文忠公)의 가법(家法)이 정대(正大)하여 자손들이 대부분 숙철(淑哲)하였는데, 공은 이미 일찌감치 선대의 아름다움을 승습(承襲)하였으니 구릉(丘陵)을 인하여 높아진 셈이고, 그 학문에 있어서도 밑천이 된 바가 깊었던 것이다.

 

또 공은 해처럼 덕이 환하게 드러나서 문식(文飾)에 물들지 않았고 오로지 내면 수양에 힘을 썼다. 이윽고 뜻이 성실해지고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서는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에 능력을 시행할 만하였으며,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밀부(密符)로 말하자면, 저 실상보다 이름이 사치스럽고 쓰임새에는 부족한 세상의 선비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은 임번(林樊)으로 여겨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았고 선대(先代)의 음공(蔭功)으로써 스스로 벼슬길에 나섰으니 이야말로 진짜 은자(隱者)였던 셈이다. 소자(小子)는 비록 공에게 사은(私恩)을 얻어 외람되게 공에게 폐루(弊陋)를 입었으나 어찌 족히 공의 깊은 부분을 살펴 발휘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선배들에게 들어보니, 추곡(楸谷) 정공(鄭公)이 “공은 학문이 바르고 공부가 순박하여 높은 산처럼 도(道)가 존숭되었다.”고 칭찬한 말과, 만정(晩靜) 서공(徐公, 서종태(徐宗泰)를 말함)이 “공은 몸가짐과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매양 사표(師表)라고 일컬어진 사람이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에 대하여 견해가 다른 품평(品評)이 없었다.”고 칭찬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살펴보면 공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처음에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고(故) 정승 조태억(趙泰億)공이 지은 공의 시장(諡狀)을 채용하여 ‘충경(忠敬)’이라는 시호(諡號)를 얻었는데 공의(公議)가 자못 그 시호가 공의 덕에 어울리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금상(今上) 4년에 경연(經筵)의 신하가 건언(建言)하기를, “공의 시호를 개정하여 한결같은 은혜를 드러내도록 청합니다.”고 하자,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삼가 예전의 시장(諡狀)에 약간 존삭(存削)을 가하여 태상씨(太常氏)에게 이첩(移牒)함으로써 새 시호를 논의하게 하는 바이다.

 

각주

1) 저보(邸報) : 중국 최고(最古)의 보장(報章). 한(漢)나라의 군국(郡國)과 당(唐)나라의 번진(藩鎭)에서 모두 경사(京師)에 저택(邸宅)을 두고 내조(來朝)할 때 머물며 쉬는 곳으로 삼았는데, 저(邸) 안에서 조령(詔令)ㆍ장주(章奏) 따위를 베껴서 제후(諸侯)에게 보고하던 것을 말함. 우리나라는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에 기록하여 반포하던 조보(朝報)가 있었음.

2) 사대(賜對) :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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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議政府左贊成行刑曹參判李公諡狀

 

謙齋 趙泰億

 

公姓李氏。諱世弼。字君輔。號龜川。其先慶州人。始祖及梁部大人諱謁平。爲新羅開國元臣。羅末有諱居明。官蘇判。高麗左僕射諱翮,大提學諱世基。最著名。入我朝。有諱延孫。工曹參判。四世至諱夢亮。議政府右參贊贈領議政。始林府院君定獻公。歷事中,仁,明三朝。蔚爲名臣。寔公高祖。曾祖諱恒福。領議政鰲城府院君文忠公。壬辰倭亂勳勞著茂。策扈聖元 功。光海將廢母后。獻議極諫。謫北靑以卒。世稱白沙先生。士林俎豆之。大父諱井男。禮賓寺正贈吏曹參判。考諱時術。吏曹參判。妣豊山洪氏。參判諱霙之女。以崇禎壬午生公。幼而有美質。十六。丁內憂。執禮無愆。服闋。治擧子業。前後發解十餘度。輒不利於會圍。庚戌庭對策。危得高第。考官誤批黜之。衆皆歎惜焉。辛亥。參判公寢疾久。公晝夜不解帶。疾革。斫指進血。及遭喪。公弟先一日夭歿。伯氏正郞公已先卒矣。公㷀然一身。哀號隕絶。若不可保。而自殯殮至靷葬諸節。無不密察細檢。克盡誠愼。旣闋服。廢擧業。惟以 書籍自娛。甲寅冬。黨人以貶簿孝庙。罪宋相時烈。將加以極律。國人齊憤。顧怵禍無能言者。公素不識宋相。而慨然倡多士上䟽。白其寃。上震怒。特命邊遠定配。參䟽諸生。並命停擧。政院請還收。嚴敎斥之。大臣有爲之言者。始除邊遠。而猶再易配所。終配靈光。公待命闕下。不與家人別。恬然就道。在謫五載。足不出門外。郡守上官。公依國法。詣官門。趍應點考。惟謹守。爲之來謝。一日閱退溪集。有所感發。乃抄其書牘。題以小朱書。又取小學心經等書。遍讀之。以及四子。專精玩索。每日晨興危坐。未甞跛倚倦惰。學文之 發軔。盖始於此。郡有名妓。因人來謁。至夜故不去。公斥遠之。作詩以見志。一時諸名勝。多聞而和之者。居謫旣久。生事益艱。或至屢空。辭受甚嚴。一毫不苟。南中士子通文一道。出財穀相助。皆謝不受。武帥或有所饋。亦却之。公姑夫鄭相公知和。聞而貽書曰。君之辭受。可謂太分明云。戊午。恩宥歸家。庚申。用薦除昌陵參奉。不拜。自是諸公卿。以公讀書勑躬經明行修。交口尉薦。辛酉。又除童蒙敎官。公以有除輒辭。嫌於自重。黽勉就職。俄又用薦。陞六品。付軍銜。甲子。拜刑曹佐郞。又因親嫌遞。除龍安縣監。時適湖南大侵。 縣爲尤甚。公至誠撫摩賙賑。盡其方。民無捐瘠者。尤留意於學校。擇其子弟之秀。敎以小大學。逐朔試講。四隣爲之興起。方伯褒其績。丙寅。移拜振威縣令。丁卯。陞朔寧郡守。皆有異績。己巳春。時事大變。將黜栗谷牛溪文庙享。棄官㱕振威鄕庄。蔬糲不繼。處之晏如。日誦大學中庸。專用力於窮格工夫。宅前有大川。暇日逍遙於其上。仍以自號。若將忘世者。甲戌更化。卽拜金堤郡守。乙亥。又被抄於通用淸職之撰。超拜司僕寺正。拜命卽遆。冬。又拜掌樂院正。以太庙樂章多失序。擬陳䟽是正之。不果上。取䟽藁及先輩 論庙樂䟽啓。彙成一編。爲梨園故事。丙子。又被選書筵官。有旨令乘馹上來。公陳䟽力辭曰。臣少試科塲。才鈍不售。中年蔭路。損失志業。擧平生而斷之。不過常調一蔭官。不知何故。姓名屢登於薦章。掄選又參於通用。向日太僕樂院之除。亦非臣之本分。况此講院新創之任。有異恒選。上累爲官擇人之政。下速竊位僥冒之罪。國軆私分。豈宜如是。王世子天資淑異。睿質夙成。遐鄕疎遠之類。亦有延頸願死之心。况臣以世家承蔭。爲世子效忠。豈後於人。魯莽無聞。實無穪塞之望。不敢冒昧承命。上優批不許。秋又 別諭促召。而終不應命。其後除翊衛司翊贊,濟用監正,楊州牧使,利川府使,延安府使。或就或不就。己卯夏。拜司憲府掌令。辭遆。冬。拜尙州牧使。尙之煩劇。甲於一道。屢經飢荒。衆弊如蝟。公至則一以革弊安民爲務。不煩刑章。而猾吏斂戢。私自戒曰。敢有欺明府者。其有私罰。申靈川潛。曾莅是州。每面各等書室。以課邑中學子。厥後無繼之者。公爲選置訓長。使之敎誨。記其勤慢。施以賞罰。時又親往警敎。申以孝悌之義。一境風動。時當戊寅癘疫之後。士民之遭親喪者多畏避。不得成服。公爲文曉諭之。其文曰。禮曰。喪祭 之禮。所以明父子之恩也。喪祭之禮廢。則父子之恩薄。而倍死忘生者衆矣。可不惧哉。是以。三年之哀。達于上下。送死之節。皆有制限。賢者。不敢過。不肖者。不敢不及。禮防之嚴。有如是夫。牧使莅任以來。聞此中士民。以癘疫痘疹。喪其親者。間有不能趁限成服者。或在數月之後。或在半年之內。漸染成俗。弊痼已深。視同成法。恬不爲異。及問其委折。則或曰忌諱也。或曰事勢也。噫。此言奚爲而至也。禮喪服必製衰麻。何以副意也。服以飭情。情貌相配。中外相應。故吉凶不同服。所以表中誠也。人之喪親者。若果念及乎此。則 其可以忌諱事勢。而一日不爲之成服乎。若使數月不得成服。則喪中數月之衣服。其將與平時無異。半年不得成服。則半年之衣服。亦將與常人無別。其可忍乎。噫。禮不云乎。二十五月之限。若駟之過隙。則雖使盡禮於三年之限。尙抱隙駟之痛。况我士民。怵怯於死生之說。纏縛於愚陋之惑。不盡於莫重之喪制。而自於人子之道理。乃使禮俗漸至於痼廢。風敎漸至於頹弛。豈不可惜可憂之甚者乎。惟我鄕中識理之父老。講禮之君子。體此至意。另加戒責。嚴行禁斷。其於弊習。一切擺脫。俾此數百年儒化之地。不至 泯泯貿貿之域。則不但不佞之幸。實是一邦之慶也。兼具節目。其已往誤爲追成服者。則使之一依朱子答曾無疑書。計成服日數除服。其間忌日。別設祭奠。告以退行二祥之意。朞大功則計日除服。緦小功則送葬過虞而後除之。州中人士。爭相感悟。大羞前爲。丕變謬習。他旁邑來取法焉。辛巳。以掌令召還。前後凡九拜是職。皆不就。癸未。拜三陟府使。陟在東海之濱。俗樸鹵無文。公捐官財。創書堂。手定學規二十一條。擇邑子之良。日親講授而課督之。文風爲之日新。乙酉。以執義召還。冬。有傳禪之命。公䟽請反汗。兼陳 治心治病之說曰。勞瘁則生病。倦怠則思逸。自是古今恒情之通患。亦不過不以心爲主宰之致也。是以。古之聖賢。不但治心之方焉然。雖於治病之際。罔不以守養爲急務。論其用工之法。必也節損其嗜欲。而使氣血充完。不役於耳目。而使心志虛閉。操存收斂之功。又在身心順適之境。調攝以此。節宣以此。則日往月來。神功嘿運。陽剛旣勝。陰沴自消。眞元內壯。外邪退聽。愆和致病之患。自可以永絶矣。何必釋天位捨大寶。就閑靜省事務。然後方可爲治病之良方耶。臣聞程子之言曰。吾受氣甚薄。三十而浸盛。四十五 十而後完。今生七十三年矣。較其筋力於盛年無損也。盖程子平日用工。惟在於本源。故小時之稟賦雖薄。暮年之收效益厚。其收攝身心而爲保嗇天和之力。於此尤可驗矣。在昔周公之告成王。以嚴恭寅畏。不敢荒寧。克自抑畏。爲殷先哲王曁周文王享國永年之效。如使憂勤足以召疾。兢業足以損性。則殷周之君。何以享耆耄之年。周公之聖。亦何以勸勉於其君哉。夫憂勤兢業。旣不足以召疾而損性。則况可以輕議傳禪之擧乎。誠使殿下加意於本源之地。持循於膠擾之際。物各付物。無所碍滯。則雖庶務煩委。 而自可以靜而制動。雖六氣不調。而亦當主心而施工矣。奈何棄此明白正當之理。欲行千古廣絶之擧。任情直斷。無所疑難乎。上優批答之。始傳禪命下之日。公卽欲䟽論。以所帶憲職。旣不得承命。則義不可以是職進言。及聞耆老軍民。皆各陳䟽。始乃封章而䟽到政院。而備忘已還收矣。承旨任埅䟽訐之。至謂後時語多侵軼。筵臣有白其狀者。上亦以埅言爲不是矣。丙戌。復拜掌樂院正。六月吏曹判書。李公寅燁筵白公可擢用。遂擢拜長湍府使。陞通政階。移拜忠淸道觀察使。皆不赴。八月。拜工曹參議。九月。拜 同副承旨。戊子。復拜承旨。辛卯。公年七十。以長子台佐侍從恩。例陞嘉善階。卽拜漢城府右尹。壬辰。拜工曹參判,右尹。又拜工曹參判。癸巳。拜刑曹參判。俱不拜。甲午。上再受羣臣進宴。下別諭使公進參。上章辭以老病。丁酉七月。上召相臣頤命。使之獨對。筵敎甚秘。擧國驚遑。公時無職名。而聞而驚愕曰。此亡國之擧也。義不可不言。遂搆䟽將上之。家人以不在其位。或有諫止者。公答曰。吾年且八十。受國厚恩。盡言而死。復何憾也。禍福在天。莫非命也。乃令家僮直呈政院。其䟽曰。聖躬閱歲愆和。阿睹之患。近復添 加。啓牘之妨覽。至形於辭旨。臣民之焦慮悶憂。於是益切。乃於日昨。引接大臣。隨下備忘。特令王世子聽政。臣窃伏鄕廬。得接邸報。私語於心曰。靜攝。今可專精。機務。亦得無滯。深合於大聖人隨意變通之道矣。旣又聞賜對之時。責備東宮。至有大段未安之敎。道路流聞。莫不驚惑。臣於病伏垂死中。耳剽其一二。不敢遽信曰。此亡國之言。我殿下睿聖冠古。夫豈有此。此必訛傳也。繼聞玉堂憲府之臣。相繼陳章。有所論列。則前之所聞。若非虗傳。噫。殿下何爲而有此言也。伏念王世子仁孝並至。問學夙茂。養德 三十年。仁聲仁聞。淪浹人肌髓。一國含生之類。莫不爲之延頸願死。昔在仁顯聖后賓天之後。海昌尉吳泰周爲臣言曰。世子於殯肂攀擗之際。泣涕如雨。哀動傍人。仍爲之感歎不已。臣聞此愴咽。繼之以喜幸曰。孝者百行之源。聖德何加於孝。我儲君之誠孝如此。實宗社万年之福。且念辛巳以後。東宮所處。可謂極難言之境。至難處之地。而宮庭洽融洩之歡。閭巷絶幾微之言。此其至德純行。必有大過人者。中外臣庶之感悅無極者。尤在於斯。今日云云之敎。忽下万万意象夢寐之外。羣下之震驚。人心之 波蕩。當如何哉。夫以我東宮仁孝之出天。行誼之絶人如彼。而我殿下至仁以覆之。至明以臨之。寧有他慮於其間哉。然王言如綸。其出如綍。言語之傳。易致翻誤。殿下於是乎盖失言矣。孟子曰。中也養不中。才也養不才。故人樂有賢父兄。如中也棄不中。才也棄不才。相去其間不能以寸。此言父子之間。貴在敎育而成就之也。其於不中不才。猶尙如此。况於我東宮至德純行。爲一國所愛戴者乎。雖在家人父子。尙宜若是。况於祖宗神靈之所眷祐。庙社臣民之所托重乎。設令庭闈侍御之間。動靜云爲之 節。或有一二未當於聖心者。正好諄諄訓誨。隨事指導。務盡敎率之方而已。其可以或輕於言動。以貽日後無窮之悔乎。昔李泌之告唐宗曰。願陛下從容數日。勿露此意。必知太子之無他也。臣每覽及此。未甞不掩卷流涕。悲儲皇之怵廹。感賢相之忠懇也。嗚呼。父子。天性也。太子。天下之本也。雖因一時喜怒之發。未暇裁量。不及恕察。有所咎責。終能平心夷氣。審思徐究。則內而慈愛之天。藹然自形。外而禍亂之慮。怵然驚心。夫是之故。雖以德宗之下等人。不一日而回悟。父子俱全。君臣並休。照映簡冊。爲天下美談。况 以殿下之高出百王。其於處此也。豈不綽有餘裕出尋常万万哉。今日之事。雖與彼差殊。倘殿下復取唐史。虛心細閱。則必有惻感於淵衷者矣。今幸納用諸大臣之言。已有備忘之成命。考例擧行。當在不日。其於參决承稟之際。雖願從容寬暇。至誠啓佑。貽燕之謨。靡不用極。以基億万年無疆之啚。且於大小凡百。盡意扶護。毋使有分毫不安之端。益光止慈之仁。夬降明旨。深陳悔悟之意。以解臣民之惑。以鎭中外之情。則豈惟億兆生靈之所感歎欽服。宗庙陟降之靈。亦必悅豫於冥冥之中矣。臣以碌碌常調。濫 躋宰列匪分之秩。不敢自居。犬馬之齒。又廹八耋。前後候班。一未趍造。凜凜床席之喘。万念俱灰。顧念此事。實是安危存亡之所判。宗國之憂。耿耿于中。旣不敢膠守賤分。又不敢顧惜殘年。披瀝肝血。輒此罄陳。唯殿下哀其志而察其忠焉。臣於䟽末。餘懷惓惓。終欲爲明主流涕而畢陳之。傳曰。三綱絶則國未有不亡者。噫。壼位之光復。實爲千古所無之盛節。而追念己巳之事。臣民之餘恫在心。伏况臨御以來。名臣碩輔之不得保全者匪一二。已極不幸。而及今春秋婉晩。疾痾淹延之日。獨幸一人元良。付托得 所。萬姓之仰戴在是。神人之祈嚮在是。倘於此而萬有一分復有嗟跌。則其於三綱何如也。天下後世。謂殿下亦復何如也。更願超然遠覽。却顧長慮。以光聖德。以幸宗社。老臣愚戇昏耄。過慮及此。死罪死罪。䟽到政院。寢不卽上。經宿而始入徹上。優批答之。時聞公之䟽辭者。莫不吐舌驚歎。謂必有大何。批下。人心始定。又莫不相賀。仰頌容受之聖德。而有一臺官。乃以三綱之說。請加責罰。人莫不駭惋。戊戌。惠陵昇遐。以服制服色事。禮官再承命來問。皆辭謝不敢對。公年已望八。而神氣康旺。至十二月五日。 偶示憊。至夜氣息漸微。急進藥物則曰無益。至六日曉。翛然而逝。享年七十七。臨絶。穪小學者再。無他語矣。是夜。白氣起於寢室。彌亘于天。晃明如火光。一村皆驚。己亥二月。權窆于振威縣北數里未向之原。公天資溫粹。德容端重。外則寬和。中實剛正。見識透悟。施措精審。一見可知其爲君子人也。自在少日。致嚴於義理之分。及南遷之後。始專意於性理之學。於大學一書。用工最多。如正心章傳文兼軆用等說。實發先儒之所未發。其爲學專以專思爲先。實踐爲務。凡遇義理之可窮者。精粗本末。巨細曲折。從頭理會。思 之又思。直窮到底。無復餘蘊。又必優游涵泳。從容軆驗。工夫旣熟。徑路甚正。躬行心得。盖有己所獨知之妙。常曰。學者貴於自得。不能自得。而只依古人說話。則終非己有。吾於窮格之事。常用血戰工夫。晩年以來。尤用力於禮學。凡於經曲吉凶之儀。靡不講究。上自儀禮,戴記。至宋明我東諸儒禮說。潛心披閱。參互考證。至忘寢食者三月。而鬚髮盡白。人或以疑禮來問。輒必推究源流。細卞而明曉之。使聽之者。豁然開悟。受用而無疑。甞以己亥服制。實是國家大議論。而彼此聚訟。尙爲未了之案。遍考䟽註往復質問於明 齋尹公拯。明齋始或疑難。終乃推服。又以斬衰練後經帶布葛之變。卽是齊斬之大分。而備要圖式。皆著用布。爲失禮意。又與明齋講訂。著爲定論。世人多遵用。居家篤于孝友。居憂不脫衰經。寢處飮食。一遵古禮。每當先諱。號痛若初喪。或不與祭。設位號哭。坐而達曙。篤老猶不廢。親盡先墓。別置財穀。用備春秋享祀。闕碑表者。敎諸子皆刻石竪之。二嫂二姊。皆年老窮居。奉承護養。出於至誠。甥女當婚。鬻宅助需。鄕族之窮貧者。仰其哺恤。赴之如家。閨門之內。肅雍以睦。禮防自嚴。雅尙儉素。痛戒侈靡。居處飮食。苟完則止。 平生不御毛裘。年少婦女。亦不敢以袨服進見。常以推恕爲主。待人接物。措處事爲。莫不以一恕字行之。責己厚而責人薄。善善長而惡惡短。如聞人深苛之論刻覈之說。則輒爲之愀然不樂。尤以近名爲恥。常病近世儒者標置太高。聲譽太過。平居恂恂。自視歉然。不爲矯激厓異之行以警俗。不作矜持莊嚴之容以衒高。謙恭退讓。溢於言辭。和順誠欵。著於面貌。罵詈不加於奴僕。仁愛至及於畜獸。擧止徐泰。表裏誠一。常曰。老來自覺天機深而嗜欲淺。其於出處也。辭內辭尊。恬於進取。每以州郡米墨。妨奪志業爲歎。聽 斷之暇。溫理經籍。操存省察。未或間斷。爲治孶良。專以利民澤物爲心。尤眷眷於興學之政。是以。旣去之後。人皆追思。龍安,三陟之士。皆立祠奉像。以寓其慕。壬午。始定居於桐湖。有終焉之志。屢蒙恩擢。連承除命。而皆固辭不就。人有問者。輒曰。吾於講院辭䟽。畢陳本末。匪分職秩。不可冒承。惟當以蔭官自處。常以世祿之臣。義同休戚。其愛君憂國之忱。不以退處有間。尤以打破朋黨爲先務曰。朋黨不破。則風俗無由得好。紀綱無由得立。人心無由正。仕路無由淸。士夫之廉恥無以養。民生之困瘁無以救。唯有日就危 亡耳。若究其源。不過曰爭名利一分。救正之道。只宜棄去細過。偕之大道。忘彼此分爵祿。毋使有忮恚怨恨之心。凡今之仕於朝者。雖不能出謀發慮。尊主而庇民。亦豈忍推波助瀾。禍家而亡國也。至於士林之爭端。左右是非。未甞不明白劈開。而對人絶不論說曰。此事。在學者。元非身心之工夫。在國家。實爲亂亡之根柢。寧欲置而不論也。與人交。恩誼兩盡。窮寒困乏。患亂喪病。盡心力而賙救。接引賓客。一以誠意。人無卑賤。必假以色辭。欵曲勤厚。人無不慕悅而心服矣。戊辰。朴玄石公世采。以吏判赴召也。貽書力挽之 曰。自古儒者。進退雖非一道。擧其大要而言之。不過曰度時量力。而當局異於傍觀。做時不如說時。此在門下正宜預講而深思之。仍反覆其所以然。朴公甫入卽逬出職者。服公先見。其論學也。甞曰。學者貴於心誠而志篤。志不篤則其學也慢。心不誠則其善也僞。然初學之士。亦難一朝責其誠篤。惟日日奮勵。勿忘勿助。積之之久。自有所得。又曰。禮學固不可不勉。其視性理工夫。實有緩急先後之序。須先讀小學,心經,近思錄諸書。培其根本。開其門路。然後遍及四書,五經,程朱等書。如有餘力。始及於禮學可也。其論道 德之淵源。先哲之本末。每推退陶李文純公。爲海東朱子。又論玄石所撰東儒師友錄。凡於諸賢之出處言議。高下粹駁。考論精密。評品適當。逮至晩年。勘定愈晣。而未甞出示於人。平生不事著述。尤不喜爲詩。文有論卞經說。答問疑禮。二十餘卷。藏于家。夫人潘南朴氏。禮曹參判贈贊成世模女。生四男三女。男長台佐。文科戶曹判書。次鼎佐。府使。次衡佐。牧使。次景佐。早歿。女長適朴恒漢。次適權爕。次適牧使元命龜。判書娶監司贈判書洪得禹女。生宗城,宗垣。並進士。女適監役尹煕啓,申濩。府使初娶掌令柳㝚女。再娶 朴信阜女。生宗周。早圽。宗喆,宗廸,宗曄。女適郡守權聖重,洪啓成,宋廷璟。牧使初娶牧使尹趾慶。再娶沈壽益女。生宗白。文科。宗德,宗翼。女幼。朴出男民秀。敎官。文秀。文科。女適李匡運。元出男景夏,進士景游。女適趙載浩。內外孫曾多不能盡記。公自在韋布。抱負甚大。樹立甚高。已負儒林之望。顧以蔭仕自居。浮湛州縣。間廊庙之需。抑而不揚。雖晩膺招延。進躋顯秩。而一切辭遜。終不膺命。致澤之學。百不一施。寔世道之不幸也。晩年杜門江介。不迹都下者。逾十五年。沉潛義理。究極禮疑。信順成德。卒與道殉。其所論述。積 有篇秩。皆可爲後世法程。若其言人所不敢言。力扶倫綱。眞不愧於白沙風烈。萬代瞻仰。允在於此。而聖考優容。國本底安。臣主並榮。身名俱泰。此又白沙公所未能得者。吁其盛矣。公甞愛養盆菊。有時獨酌微醺。諷詠老圃寒花之句。盖其砥勵晩節之意。未甞須臾忘也。故其所成就如彼卓爾。完名大節。世無與伍。豈弟神勞。百祿是荷。三子顯榮。迭致官養。諸孫服訓。孝謹成風。夫人偕老。白首相莊。遐齡厚福。今古所罕。公歿數年。內外諸孫連占科名。可見公積德遺祉。方衮衮未已也。壬寅。因戶判公推恩。贈公資憲大夫 吏曹判書。兼帶如例。癸卯春。筵臣白于上謂公學問忠節。宜別加褒美。遂贈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弟貳師,成均館祭酒,五衛都揔府都揔管。又以湖儒䟽請命醊食于靈光之祠院。又命太常議諡。戶判公以泰億曾忝太史。又夙知慕公者。屬令爲狀。泰億屢拜公床下。飽德久矣。且與戶判公有莫逆之誼。義不敢辭。遂最公行業之大關於世敎者。錄爲是狀。以俟太常氏財擇焉。

 

謙齋集卷之三十八>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