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경주이씨 실전세계고찰(慶州李氏失傳世系考察)

야촌(1) 2010. 11. 12. 02:00

■ 경주이씨(慶州李氏)「실전세계(失傳世系)」고찰(考察)

 

☆1987년 중앙화수회 간행「경주이씨 대종보(慶州李氏大宗譜)」총편(總編) 293페이지에 실려 있는 전문이다.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계전(繼傳)한다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것은 주지(周知)하는 바이며, 모든 민족사나 국가의 변천 역시 사실 그대로 전해지지 않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논쟁(論爭)의 원인이 되고, 때로는 고증(考證)에 의거하여 바르게 수정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그 이유를 문자(文字)가 있기 이전과 이후로 대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문자(文字)를 사용하기 이전은 구전(口傳)과 유적(遺跡) 등으로 유전(流傳)되는 것을 후세에 성문화(成文化)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만 하더라도 신라 천년의 역사를 필자 김부식(金富軾)과 일연(一然) 승려가 중국 문헌도 참작하여 기록 정리했으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 일례로서 6촌장(六村長)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북에서 내려온 유민(流民)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천강설(天降設)로 되어 있다.

 

둘째로 문자를 사용한 후에는 거의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기록 당시 필자의 편견이나 집권자의 압력 등 물리적 작용에 의하여 그릇 기술(記述)할 수도 있고 정권의 교체 또는 국가의 변혁으로 인하여 기록 당시의 현실과 정권을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歪曲) 기술함으로서 와전(訛傳)되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경이(慶李)의 실전 상계(失傳上系)는 신라시대 천년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 되고 있으니 시조(始祖)가 양산촌장(陽山村長)이고 휘는 알평(謁平)이요, 신라 건국 당시 6촌장회의(六村長會議)를 주재(主宰)하셨고 유리왕 9년(서기32년) 이(李)로 사성(賜姓-임금이 내린 성)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또한 기타 여러 문헌(文獻)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알평(謁平-瓢巖公) 시조 이후 원대손(遠代孫)인 소판공(蘇判公) 휘(諱) 거명(居明)까지 대수(代數)는 물론이고, 선대조(先代祖)의 휘자(諱字)까지도 알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하고 있다.

 

이조 중엽(李朝中葉)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族譜)를 간행하였는데, 우리 경이(慶李)도 1613년경 광양현감(光陽縣監)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으니, 백사 항복(白沙恒福)선생께서 쓰신 서문(序文)만 전해올뿐이며, 다음해 1614년에 서계(西溪) 득윤(得胤)선생이 수초(手抄-손으로 쓰다)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가 청주(淸州) 거주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알 길이 없다.

 

그 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 1684)와 무진보(戊辰譜. 1748) 그리고 갑술보(甲戌譜. 1814)를 갑무갑 삼대보(甲戊甲三大譜)라 하고 우리 경이(慶李)의 근간보(根幹譜)가 되고 있다. 그 후 19세기말까지 어느 족보에도 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던 중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刊)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乾). 곤(坤) 2권 중, 곤(坤)권 말(末)에 귤산공(橘山公) 유원(裕元)선생이 쓰신 발문(跋文)에 “삼가 안찰하건대 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謄抄)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三韓)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蹟)이 아님이 틀림없다.

 

유원(裕元)은 기록한다.”라고 되어 있다.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28대의 실전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알 수 없었던 것이 최근에 발견되어 상찰(詳察-자세히 살핌)한바 신라 관직이 아닌 고려 또는 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서문(序文) 4면(面)에 동익이 소판공(蘇判公) 30세손(世孫)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凡例)에는 열헌공(悅軒公) 22세손 동익이라 하였으니 7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범례 처음에 “1814년 족보가 나온 후, 67년이 되었는데 각파(各派)의 자손이 번창(繁昌) 하였으므로 이제 파보(派譜)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록(追錄)한다.”라고 하였으니, 1881년에 발간했다고 보는데 서문에는 “숭정기원후5 정축 3월 하한 운잉 상동-전명대근 근추서(崇禎紀元後五丁丑三月下澣雲仍相東- 全名大根謹追序)”라고 하였으니 1877년이 되고, “무인추팡월풍덕동강진(戊寅秋八月豊德東江津- 현 개풍군 동남단)에서 건곤보 2권(乾坤譜二券)을 얻었다”하였으니 1878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5면에 기록되기를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라 하였고, 본인은 시영(時榮)이라 하였으니 대동항렬(大同行列)로 볼 때 아버지의 손자가 우행(雨行)이면 본인(本人)은 규행(圭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 열기(列記)한 바로 볼 때, 전연 전후연대(前後年代)가 상반될 뿐 아니라 행자(行字) 조차 부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1877년 정축년(丁丑年) 서문(序文)에 1870년 경오파보(庚午派譜)에 기록했다고 하였으니, 실전세계가 발견되기 8년 전에 파보(派譜)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다음 35세 실전세계(三十五世失傳世系)라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있는 것을 세밀히 탐찰(探察)한바, 그 시발(始發)을 광무 8년(1904) 갑진(甲辰)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35세로된 실전세계가 19세기 말까지 전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경산군수(慶山郡守) 재직 중에 계필(啓弼)씨가 쓴 서술(敍述)을 보면[광무 8년 갑진(甲辰) 발간] 후손 계필이 임인(壬寅. 1902년)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相駿), 춘우(春雨)가 옛날 간행본 한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우리 시조 표암(瓢巖)이하 소판공(蘇判公) 이상 35대의 대계가 쓰여 있는데, 책이 헐고 좀 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추모(追慕) 함에 있어 어찌 성력(성력)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아 갑술보(甲戌譜. 1814)도 이 고을에서 간행하고, 이 족보도 또한 이 고을에서 간행하였으니 한 고을에서 두 번 발간함이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삼가 서술한다.”라고 했다.

 

※ 1902년부터 1906년까지 4년간 경산군수 재직다음으로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발행한 경주이씨무오보(戊午譜. 1978) 본문 5면(面)을 보면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分籍宗)인 합천이씨(陜川李氏) 가보(家譜)에서 소판공(蘇判公)의 상계(上系)에 관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시조 휘 알평에서 중시조 소판공까지의 세계(世系)가 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5세손이 된다고 하였고 혹 경주이씨의 소극적인 파보(派譜)나 지역적인 편보(偏譜)에도 성씨대관(姓氏大觀)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 바 있다. 그리고 분적종 합천이씨 세보(世譜)에는 진천(鎭川)에 살던 경주이씨 후(后) 이학영(李學榮)씨가 을유(乙酉) 1765년(영조 41) 7월에 주문사(奏文使)로 북경에 가다가 노변에서 경주 이씨의 비갈(碑碣)이 산방(山榜)에 서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동종인(同宗人)을 찾아가 물어 본즉, 대답하기를“본인도 조선국(朝鮮國) 익재공(益齋公)의 혈손(血孫)으로 귀국(貴國) 왕말(王末)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하기에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하였더니 “있다”하여 5일간을 더 머무르며 조선(祖先)의 실계(失系)를 찾아 당지 판각(唐紙板刻)으로 된 보첩(譜牒) 1권을 받들고 본국에 돌아와 홍문관(弘文館) 도승지(都承旨)인 전주 후(全州 后) 이인명(李仁明)에게 말하였더니 이인명이 찬(撰)하여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允許)하기를 "실전(失傳)이 만성(萬姓)중에 혹 많이 있으되 다행히 실계(失系)를 찾았으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다시 보(譜)에 계승(繼承)할 것이며 입북(入北)한 이학영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에 학행(學行)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事)케 하라"하시었다.

 

합천이씨 임신대보(壬申大譜 1932년)시에 나열하여 편차(編次)한 고로 “기록을 전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살피건데 성씨대관(姓氏大觀)의 내용과 경주이씨 소극적인 파보 및 지역 편보의 내용이 상좌(相左)될 뿐 아니라, 경주이씨에 진천(鎭川)에 사는 이학영이란 사람과 전주인 이인명이란 사람이 이조사중(李朝史中).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실록(國朝實錄) 등 여러 자료에도 고증(考證)이 없으므로 불가신(不可信) 불가의(不可疑)라 별기(別記)하여 후일에 밝혀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합천이씨 족보를 탐지한 결과 다음과 같이 발간되었다.

 

◇중묘 기축보(中廟己丑譜. 1529). 1책 후학 초계군수 복로서(後學草溪郡守福老序)

◇영묘 갑술보(英廟甲戌譜. 1754). 5책 외예 정언 함평 이봉수서(外裔正言咸平李鳳壽序)

◇순묘 신유보(純廟辛酉譜. 1801). 11책 후손치검서(後孫致儉序)

◇고종 병자보(高宗丙子譜. 1876). 18책 이조판서 광릉 이선익서(吏曹判書廣陵李宣翼序)

 

1. 고종 정미보(高宗丁未譜. 1907). 13책 후손 돈령부도정 채수서(後孫敦寧府都正埰壽序) 이조 말(李朝末)까지 이상 5회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실전선계(失傳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고, 1932년 임신대보(壬申大譜)시에 시조 알평(謁平)이하 세계원류원도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七月日以奏文司入北京路邊見慶州李氏山榜碑碣疑惑滋甚往訪同宗使通譯人問來歷則曰玆土居人本以朝鮮國益齋公諱齊賢之血孫貴國王末入北云更問有譜乎曰有也留連五日言其祖先之失傳得唐紙板刻譜牒一卷奉還本國其言于弘文館都承旨全州人李仁明矣仁明撰進 啓答 允曰失傳萬姓中或多有之幸得失世尤極爲幸更譜繼承而入北李學榮別副直營擧行泰陵卽赴向事今修大同譜時(目+盧)列編次李有末(손톱변爪밑女)故別式圓圖付于編首비竣後巧」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세계(世系)가 1968년 무신(戊申)에 간행(刊行) 되었는데, 강양 합천이씨계보(江陽陜川李氏系譜) 전(全)에 '시조 표암공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보(始祖瓢巖公諱謁平以下世系源流譜)'라 하여 원편(元編) 14에 실리고 상계(上系)는 지금 대동보(大同譜. 1968년)시 대전 출판소에서 경주이씨 익재공파보(益齋公派譜)와 평창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의거(依據)함이라 라고 되어 있다.

 

이상 내용을 상고(詳考)한 즉, 려조(麗朝)와 이조(李朝)시에 원(元). 명(明). 청(淸)나라 사신으로는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正朝使- 正朔使. 賀正使)를 보냈고, 정조사는 동지사가 겸하였는데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조선 시대, 삼정승과 육조판서를 아울러 이르던 말)이 되었으며,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수행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청사(奏請使). 주문사(奏聞使)가 있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을 보면 주문사(奏聞使)가 10회를 갔던 사실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주문사(奏文使)는 실록에 기록이 없고, 또한 홍문관(弘文館)에는 승지(承旨)나 도승지(都承旨)가 없고, 승정원(承政院)에만 있다.

 

그리고 전기(前記) 이인명(李仁明)은 이조실록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회 나타나기는 하나 홍문관에 있지 않았고, 이학영(李學榮) 역시 진천(鎭川)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신역직(使臣歷職)을 하였다면 마땅히 입보(入譜) 하였을 것이거늘 보첩에 기록이 없고 실전계(失傳系)에 나열(羅列)된 관직이 신라시대 관직과 상이(相異)하니, 믿을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실전세계가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 임신 대보(壬申大譜. 1932)였으니 대전서 간행된 경주이씨 무오보(戊午譜)에 150여 년 전 합천이씨(陜川李氏) 가보(家譜)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120년 전에 유원(裕元-橘山公)선생께서 28대 실계(失系)를 명시(明示) 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려조말(麗朝末-고려 말)에 요동반도로 이거(移居)한 익재(益齋) 혈손(血孫)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본국 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거늘 갑술갑(甲戌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각 파보에 조차 19세기말 까지 한곳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 1904년 경산군수(慶山郡守) 계필(啓弼)선생이 편간(編刊)한 것이 아닌가?

 

의혹도 되는 바이며, 현재까지 나타난 기록을 추상(推想)할 때 결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으나 양 실전세계(兩失傳世系)를 그대로 등재(登載)하여 참고에 공(供- 이바지)하는 바이며, 다행히 후일에 고증(考證)이 발견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이로써 28대 실전세계와 35대 실전세계는 여러 가지 모순되고 사실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세계(世系)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참고로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