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개천에서 용 나는' 역동적인 시대"
'과거, 출세의 사다리'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만 4천 615명 전원 출신 조사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조선시대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평생 조선사(朝鮮史)를 연구해온 한영우(74)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조선시대 사회경제사, 신분사, 사상사, 문화사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룬 원로 국사학자다.
서울대 인문대학장, 규장각 관장, 한국사연구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지금까지 펴낸 학술 서적만 30여 권에 이른다.
신간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는 그간 펴낸 학술 서적 중에서도 한 교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양반 신분이 세습됐다는 기존 학계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했던 한 교수는 이번 책에서 조선 500년에 걸쳐 배출된 문과급제자 1만 4천 615명 전원의 신분을 조사해 왕대(王代)별 급제자 수와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 등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제시했다. 자료 조사와 집필에 5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5년 동안 연구에 몰두하면서 중도에 접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꼭 한번은 해야 할 작업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 교수는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조선을 이끌어 간 정치엘리트는 문과급제자들"이라면서 하지만 그동안 이들에 대한 연구는 구체적인 통계 수치가 없거나 근거가 빈약한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어서 조선사회가 지닌 신분적 개방성을 크게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합격자 명단인 방목(榜目)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 방목에 벼슬, 내외 4대조(직계 3대조와 외조)의 이름, 성관(성씨와 본관)이 기록돼 있지 않은 급제자는 급제자 집안의 족보, 실록에 기록된 급제자의 벼슬과 신분에 관한 자료 등을 일일이 찾아내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전원의 신분을 확인했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조선 시대 양반의 신분과 특권이 세습됐다는 기존 학계의 통념과는 달리 '한미한' 집안 출신도 대거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한미하다는 것은 '쓸쓸하고 보잘것없다'는 뜻인데 평민을 가리킨다"면서 "벼슬아치는 양반 집안에서도 나오고 평민 집안에서도 나왔다"고 말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조선 초기와 중기의 경우 평민 등 신분이 낮은 급제자가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태조-정종(40.40%), 태종(50%), 세종(33.47%), 문종-단종(34.63%), 세조(30.42%), 예종-성종(22.17%), 연산군(17.13%), 중동(20.88%), 명종(19.78%), 선조(16.72%) 등으로 조사됐다.
그는 "(기존 학계에선) 조선 초기부터 양반 문벌이 형성된 것으로 봤는데 조선 초기만 해도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40-50%나 됐다"면서 "조선 중기에 양반 문벌이 형성됐다가 18세기 후반이 되면 신분제가 무너지는데 특히 고종 때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58%에 이를 정도"라고 말했다.
왕대별로 신분이 낮은 급제자가 어느 관직에까지 올랐는지를 조사해 책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한 교수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 중에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고 판서가 된 사람은 부지기수"라면서 "조선 사회는 신분 이동이 다이나믹했으며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였다"고 진단했다.
"어느 사회든 사회 틀이 잡히고 기성세력이 형성되면 '가진 자'들이 세습을 많이 하게 됩니다. 조선 중기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 중기의 특징을 뿐입니다. 조선 중기에도 법적인 측면에선 (양반의) 특권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조선 중기 한 시대의 특징을 조선 왕조 500년에 다 적용하다 보니 조선시대가 양반이(특권을) 독점한 폐쇄적인 사회로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되게 된 것입니다. 범죄인과 노비만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서얼(첩의 자식) 출신 과거 급제자도 많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도 양인이 돼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조상 중에 벼슬을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국민이 다 양반입니다. "
그러면서 한 교수는 '공부를 잘하면 출세하는' 과거 제도의 전통이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 사회를 만든 토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를 역동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옛날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룬 역동성을 갖고 살아왔다"면서 "성취욕, 근면성, 공부에 대한 열의는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1권 '태조-선조' 편을 펴낸 한 교수는 2권 '광해군-영조' 편, 3권 '정조-철종' 편, 4권 '고종' 편을 차례로 발간할 계획이다.
글쓴이>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yunzhen@yna.co.krㅣ 2013/01/21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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