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개소문(淵蓋蘇文)
● 연(淵)씨의 유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나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외경하여,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고 있음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민족의 설화와 신화에 널리 보이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그의 이름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하고 있다.
●집권과정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고 한다. 동부(또는 서부라고도 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자,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영류왕 25)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초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으므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에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외관계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대외정책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경직된 정책술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서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된 면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이 수반되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하며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하였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하였던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장수를 기용하여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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