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역대 대통령 자료

黃江의 아침 - 全斗煥

야촌(1) 2013. 8. 30. 20:00

[1] 黃江의 아침

      全斗煥 前大統領의 출생과 가정환경

 

全斗煥 前大統領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慶南 陜川郡 栗谷面 內川里) 264번지에서 아버지 전상우「全相禹, 일명 相祐, 1898(고종 35). 01. 08~1966, 03. 02」와 어머니 김점문金点文, 1898년(고종 35). 01.09~1978. 04. 10사이에 5남 4녀의 9남매중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全斗煥 前大統領의 本寬은 완산(完山=全州)으로서 백제 온조(溫祚) 때의 개국공신인 도시조(都始祖)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의 52世손이며, 이태조(李太祖)를 도와 홍건적(紅巾賊-중국 원나라 말기에 일어난 도둑의 무리)을 물리친 完山君(諡號 忠貞) 집(集)의 23世손이다.

 

또 임진왜란때 영산현감(靈山縣監-從六品)으로 있다가 의병을 일어켜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1617(광해군 9) 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제「全霽, 1558년(명종 13)生, 합천 초계출신」 장군의 13代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합천 출생이지만 9살 때, 고향을 떠났다.

호적은 그후 대구시 남구 봉덕동 1035번지로 옮겼다. 전대통령이 전적(轉籍) 한것은 불편함을 덜기 휘해서였고, 대구(大邱)는 全大統領이 초등학교 부터, 中. 高等學校 학업을 마친 성장의 근거지였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합천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는 향토사학자 이인갑(李仁甲, 1980년 당시 52歲,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동 665)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가 대야성「大耶城,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합천)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싸움)」 싸움이다. 지금의 합천 대야성(大耶城)은 백제(百濟)와 접경하고 있던 신라의 서남지역을 지키는 요새로서 서기 642년(眞德女王 11)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다.

 

이 싸움에서 성(城)을 지키던 도독(都督-신라 때, 지방 각 주의 최고 벼슬) 품석(品釋)과 김춘추(金春秋)의 딸인 품석(品釋)의 아내, 수비군사 2천여명이 전몰함으로써 김춘추가절치부심(切齒腐心-매우 분하여 한을 품다) 권토중래(捲土重來-어떤 일에 실패한 뒤 힘을 길러 다시 그 일을 시작함)를 꾀해 우리나라 첫 만족의 통일인 삼국동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임진란때 의병(義兵)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 합천이다.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1535(중종 30)∼1623(인조 1). 초계(草溪)의 전제(全霽, 전두환대통령 13대조)과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1527~1596), 이대기 「李大期) 1551(명종 6)~1628(인조 6)」, 삼가(三嘉)의 윤탁(尹鐸, 1554년(명종 9)~1593년(선조 26), 박사제(朴思齊, 1555(명종 10)∼미상) 등의 의병장(義兵將)을 중심으로 일어선 의병의 수효는 일개 군(郡)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세번째는 3.1운동때, 연 8만명이 경남에서 제일 먼저, 또 가장 큰 민중 봉기를 일으켜 25명이 죽고, 1백여명이 부상했으며, 2백여명이 투옥된 사실이 꼽힌다. 나라가 어려울때 신명(身命)을 바친다는 이 고장 사람들의 기질은 바로 全大統領의 구국일념(救國一念) 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다.

 

합천은 본래 경남의 오지이며, 농토는 좁으나 산천경개가 뛰어나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특히 전북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거창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 황강(黃江)은 길이 70Km. 넓이 1천여미터의 대하(大河)로서 잠룡(潛龍-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옛 부터 이곳에서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이 낳았거나 거쳐간 인물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미상」 선생이 해인사(海印寺)에서 말년을 보낸 것을 비롯 고려 때는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이며, 문종때 홍문공도(弘文公徒-고려 시대, 개경에 설치된 사학인 십이 공도의 하나)라는 사학을 일어켜 후진을 가르친 정배걸(鄭倍傑) 선생.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의 공을 세웠으며 한양천도(漢陽遷都) 를 이룩한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퇴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거유(巨儒)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연산군 7)~1572(선조 5)」선생 등 역사에 뛰어난 분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