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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명가(펌) [2]

야촌(1) 2008. 3. 7. 01:10

■ 한국의 근대명가 - 09편 박정희家

 

오늘도 어김없이 칡넝쿨처럼, 고구마 줄기처럼,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는 대한민국 명문가문(?)의 인맥에 대해 사정없이 후벼 파 보자. 오늘은 "박정희가"다.

 

대한민국을 19년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고,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흘리게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그 악명높은 박정희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한마디로 박정희는 멋대로 마음대로 한 세상 풍미하면서 즐길것 다 즐기고 해볼것 다 해보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다.

 

물론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요즘도 내이션 빌딩 운운하며그의 경제개발 업적을 지나치게 과대하면서 불가피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럴 때 늘 인용하는 글이 있다. 좋지도 않은 머리로 귀찮게 한두명도 아닌 그런 사람들이 억지논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그냥 이런 논문들을 사안별로 딱 정리해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 긁어붙이면 게임 끝이다.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모두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

 

박정희가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다.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 흔히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릴 수 있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60, 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정희의 공은 제한적이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정희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박 전 대통령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신화의 실체는 "지도자의 역량과 대중의 역량을 혼동한 결과"라는 말이다. 또 시운까지 딱 들어맞았던 것이 주효한 것이다. 서프앙들이라면 전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이므로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카키 마사오 시절 얘기 제쳐두고, 또한 여순사건 당시의 왔다리갔다리 행각 빼놓더라도,  19년만을 두고 평가해도 박정희의 죄악은 천지를 뒤덮고도 남을 양이다.

 

박정희 정권 전반기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후반기엔 긴급조치로 사람들을 조졌다. 물론 긴급조치 시절에도 급하면 국가보안법, 반공법의 미친 칼춤을 쳤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혁당 사건이다. 취약한 군사독재정권의 한계를 감추기 위해서, 저항하는 민주화세력을 빨간색으로 채색시켜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폭력집단으로 조작하여 일관되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나이 서른도 안 되어 잔혹하게 파멸당한 여정남씨 얘기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고문을 많이 당했던지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하자 마자 가족에서 알리지도 않은채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고, 처형 후에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도 않고 서둘러 화장해 버렸다.

 

석방시켜 주거나 면회시켜 주거나 시신을 인도하면 그 잔학상이 드러나 정권이 파멸될 거 같으니까. 이런 개씹탱구리같은 새끼들이 어디 있나? 이렇게 죽인 사람이 자그마치 여덟명.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9명, 징역 12년 이상 선고받은 사람이 20명. 울화통 치민다.

 

그 딸은 그 죄악이나 빌 것이지 무슨 또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쳐대질 않나, 그 사법살인의 정점에 있던 자의 사위가 대한민국 최고 귀족에, 거대족벌언론사 사장이라니....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박정희가 이데올로기 사슬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억울하게 몰아가지고 남의 인생 조지고, 그 집안 풍비박산 시킨 경우가 어디 한 둘인가?

 

박정희정권은 국가테러리즘의 전형이었다. 제일 웃긴 것은 박정희가 스스로 깡패보다 더한 짓을 했으면서 깡패소탕 운운한 것이다. 기가 차다. 박정희가 깡패들을 잡아서 바람직한 인간으로 선도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재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준게 아니라무식하게 군사적 규율을 살인적인 폭력으로 강요하면서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했다. 깡패보다도 못한 국가적 폭력을 자행했다.

 

그래서 새사람 만들었나? 이후 또 다시 깡패조직을 권력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는가?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깡패를 써먹고, 깡패짓 해도 되고,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국민재건 운운하면서 끌고가서 마구 부려먹고 마구 때린 거 아닌가?

 

전두환이도 나중에 그거 흉내내면서 사회정화를 떠벌린 거 아닌가? 대가리에 들어있는 군국주의의 잔재가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금도 "그게 사나이답다"면서 침 질질 흘리는 사람들은 뭐야? 침 닦아!!! 전사모, 뭐야?? 박사모, 누구야? 그 군홧발 아래 억울하게 희생당했을 힘없고 가엾은 약자들의 고통은 왜 안 보나? 

 

유신체제 7년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으로 엮어서 감옥으로 끌고간청년 학생만 무려 1197명, 노동자 농민 275명, 성직자, 종교인 132명, 언론인 문인 84명, 선생님 52명, 정치인 70명, 기타 등등 1000명..........

 

유신체제 하 양심수 총 2704명. 김지하 시인이 당시 이렇게 말했다.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 견강부회적, 무차별적, 모략적 적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사상적,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빼앗아 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 온 최대의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가지 치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의 허용,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몸으로 요구한다. 그야말로 박정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인권유린의 구조화를 자행하여한국사회 전체를 군사문화가 지배하는, 반민주적 독소로 가득찬 사회로 만든 원흉이다.

 

박정희 덕분에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기관들이 전부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직도 그 때문에 국민적 신뢰를 되찾지 못해서 고충을 겪는 것이다.

 

극악한 고문도 성행하였다.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꾸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박사모?? 박정희의 전면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흡수된 거냐? 살인적인 인권탄압의 실상을 모르는 거냐? 망각의 해악인가? 민주주의가 그렇게 불만인가? 뭐야,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조용수사장은 왜 죽었고, 황태성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고, 동백림 사건, 남민전 사건은 뭐야? 멧돼지는 어디로 갔나?

젊은 사람들이 왜 멀쩡히 있다가 감옥에서 옥사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라. 영화 "실미도" 못 봤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무슨 부정선거 고발했다고 열차에서 떠밀어서 죽이지 않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운동하는 선교사에게 독약을 먹이질 않나, 대학교수를 잡아다가 창밖으로 집어던지질 않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억울하게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결정된 사안만 보더라도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박근혜가 저렇게 정치판에서 설쳐댈 수가 없는 거다. 이건 악마 중에도 대마왕이다, 대마왕. 베엘제불.... 악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박정희 향수라는 것은 결국 자기 가치파괴로 귀결될 게 뻔하다.

 

박근혜라는 여인도 불쌍한 여인이다. 박근혜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사건들의 진실에 대해 전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부친이 저지른 죄업을 모른 척 하면서, 또는 두둔하면서 그 죄를 씻기 위해 용서를 빌기는커녕 가해자 편에 서서 또 다시 민주세력에게 상처를 가하고 있는데이 또한 불행한 자기 가치파괴로 결론이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박근혜도 박정희에 의해 빚어진 또 하나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박정희는 불법적인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후, 탈취한 권력을 악용해 끊임없이 추악하게 정권 연장을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최고권좌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가문도 엄청나게 번성시켰다.

 

무슨 박정희가 검소하고,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고, 친인척을 멀리했다는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데 다 좆까는 소리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천황으로 살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건가? 정수장학회 얘기는 듣지도 못했나? 

 

그 문란했던 사생활을 보고도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나? 친인척을 멀리하기는 뭘 멀리해?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끌어다 한 자리씩 줬다. 당시 박정희 친인척비리가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몰라? 우선 박정희의 딸 박재옥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이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자마자 권력에서 멀어졌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인척을 멀리한 건가? 그 다음에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박재홍을 보자. 그러니까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법대를 졸업하였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박준홍을 보자.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그러니까 박근혜의 외삼촌인육인수 같은 경우에도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 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가 끔찍이 생각했던 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놔 둔 건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나? 

육영재단도 수천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나?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던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 뿐이랴!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서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카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한번 가보자. 참 웃기는 거 발견했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가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이다. 이 허남각의 딸 허정윤이 얼마전에 정대호라는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이 정대호가 그 유명한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의 아들인 강원산업 창업자 정인욱의 손자이자, 현재 강원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이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최금숙이다. 최금숙이 누구냐? 바로 얼마전에 형제의 난으로 물러난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게다가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에게 두 딸이 있다.

 

큰 딸 지선이는 기아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누구냐? 현대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회장의 손자다, 이 말이다. 작은 딸 지윤이는 박성빈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이 박성빈은 또 누구냐? 포항제철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따라서 현대그룹이 철강산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선정하러 다니다가 포기한 배경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 박성빈을 좀 파헤쳐보면 아주 재밌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서프앙들에게 미안해진다. 양해 바란다.박성빈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요즘 무슨통신 솔루션 업체인 사운드파이프 코리아 대표이사로 있다.

 

이 회사를 가만히 보니까 무슨 다국적 기업인 것 같은데 국내 대리점을 영업하는 듯 하다. 전자신문같은 걸 보면 꽤 잘 나가는 듯 하다. 잘 나갈 수 밖에 없다. 예를들면 사운드파이프에서 무선랜 환경을 구축했다는 아산병원은 현대 계열 아닌가?

 

박성빈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태준이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드러난 박성빈의 부동산만도강남구 역삼동의 170평짜리 카센터와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등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남동에 빌라도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고구마 줄기라고 할 수 없다.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를 주목해야 한다. 김형수는 박태준의 한국화가 딸 박유아와 결혼을 했는데, 박유아는 본래 변호사 고승덕과 살다가 헤어졌다. 이 김형수는 또 이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맥도널드 사장과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판매하는 렉서스 케이모터스 대표이사다.

 

그런데 이 김형수의 부친이 그 유명한 동일고무벨트 창업자인 김도근이다. 이 김도근의 이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지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등등 골 때리는 이력이 꽤 많다.

 

문제는 김도근의 큰 아들이자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박정희 시절부터 여기저기 부산지역을 마구 쑤시고 돌아다녔다. 청년회의소니 부산 싸이클 연맹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자리라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도 맡았다.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다. 열심히 하면 위에서 알아보는 법,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그 유명한 춘천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괴상한 상황을 우리 서프앙들이 알아야 한다. 이 한승수가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사촌 형부다한승수의 장인은 일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이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사위들이 세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예전에 서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혀바닥 시뻘겋게 되는 아이스 바를 다들 먹어 봤을거다. 그 서주산업의 회장이 바로 국회의원을 지낸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한승수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가 혜원여고 교장을 지냈는데 알아보니까 혜원여고 이사장 윤석민의 처형이네? 헐... 신문에는 그런 관계가 안 나와서 참 재미가 없다. 홍소자랑 열린우리당 이미경의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또 만주지역에서 엄청나게 크게 농장사업을 벌였던 천재라는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다. 이 사람은 박정희정권 하에서 장관도 지냈다. 분명히 장덕진과 한승수가 춘천고 동문으로 친분이 있어서 동서가 된 거 같다.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얼마전 이희현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내가 깊이 파보니까. 이희현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상준의 장인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이화영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웬걸?  이 이화영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개성상인이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띄워주는 성북동에 사는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ITV 폐업할 때 그 모습이 마지막 개성상인의 모습인가?

 

내가 그동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후원회장 이회림이 왜 그랜드 서클 안에 안 들어오나, 의아했다. 그러니까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거다. 어쨌든 한승수같이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넘어가겠다. 여러분,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에요, 조카사위!

 

하나 짚고 넘어갈게 있다. 아까 언급했던 박태준의 사위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1962년생인데 얼마전까지 미국 칼라일 그룹 아시아지역 회장 겸 이사였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졸업하였다.

 

김병주는 국민의 정부시절 자민련이 연정을 할 즈음 박태준이 총리가 되기 직전에 칼라일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김병주는 쌍용정보통신을 꿀꺽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부어 한미은행을 먹었다. 하나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한미은행을 4억달러에 사서 씨티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먹었다. 물론 그 이익은 미국 칼라일의 몫이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때 외국계 인사로 초대된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기 보다는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요즘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들이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기관에서 5억 달러를 끌어들였고, 캐나다 교직연금에서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였다.삼성생명, 대우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개혁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 청렴하다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게다가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이상과 같이 해 줄만큼 다 해주고 해먹을 만큼 다 해먹었다. 최태민 문제는 서영석 대기자가 깊은 관심이 있는 영역인 듯 하므로 논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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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한국의 근대명가 - 10편 김성수 家

 

전라북도에 가봤더니 그 쪽 사람들, 특히 고창, 부안 쪽 사람들은 "인촌 김성수" 하면 껌뻑 죽는다. 동네 공원에 무슨 동상도 있다. 전북을 빛낸 인물이래나...

 

대한민국에서 박정희가 학교마다 이데올로기 선동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워놓은이순신, 세종대왕, 이승복 어린이 동상 빼놓고 가장 많은 동상이 존재하는 사람이 김성수다. 그러나 지나가는 애들의 길을 막고 물어보라.

 

도대체 이 김성수가 무슨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길래 전국 도처에 동상을 세워놓고김성수, 김성수 타령을 하는 것인지....심지어 무슨 인촌기념관이니 인촌상이니 하면서 인촌 생일을 마치 예수님 탄신일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동아일보를 보면 무슨 "인촌선생은 민족의 암흑시절에 겨레의 등불과 같은 대선각자였다"면서인촌정신을 선양하자고 허구헌 날 떠벌리고 있다. 민족의 새로운 대도약이 있어야 할 절박한 시점에서우리 모두 인촌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껄껄!!!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인촌 김성수에게 세가지 업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 동아일보사를 창간하시고, 경성방직을 창업하시고, 보성전문학교를 중흥시켰으니언론, 교육, 산업의 세 부문의 민족역량을 키우셨다고 한다.

 

둘째 공산주의에 맞서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드시어대한민국 건국기에 주춧돌을 놓으시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시는 등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고 한다.

 

세째 독재정권에 단호히 맞서시며 대한민국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몸으로 가르치셨다고 한다.

 

따라서 국정난맥과 사회혼란이 심각하고 범죄가 횡행하는 이 어려운 시기에공선사후 명지담백의 겸허한 인품을 지니신 인촌의 선비정신을 숭앙해야 한다고 떠벌리고 있다.

 

모르겠다. 인촌 김성수를 직접 대면해보지 않았으니....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인촌 김성수에게는 근거없는 찬양만 있을뿐, 그 찬양에 걸맞는 실제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아일보사 창간해서 일제에 아부하였다. 자기 돈벌려고 경성방직 창업한 것이다.

 

고려대학교도 김성수가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천출 출신인 등짐장수 이용익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것을 천도교 손병희가 인수했다가, 호남 최고의 갑부 아들 김성수 손에 넘어간 것일 뿐이다. 김성수는 호남지역의 최고갑부인 1만 5천석 지기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수의 아버지 김경중이 소유한 토지가 무려 600만평이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동경의 세이소쿠 영어학교, 긴조 중학교를 거쳐서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24살의 나이에 중앙학원을 인수하고 학교장이 되었다. 너도 나도 어수룩한 시절에 호남 최고갑부 아들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다들 껌뻑 죽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우 30살의 나이에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넘치는 돈으로, 회사설립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단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고 민족의 영웅 칭호까지 받아야 하나?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로 사람들이 오인하고 있는데, 김성수의 민족주의는 전체 민족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내할 것을 민중에게 요구한 것이며 이는 민족주의를 매개로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색채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용감하게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켰더니김성수가 혀를 차며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개탄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지금도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자랑하지만그 창업자 김성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기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왜 김성수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로 규정했겠는가? 

무슨 정권의 음모가 있느니, 어쩌구 떠들지만 기본양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다 죽은 김성수를 친일파로 몰아서 얻을 수 있는 사적 이익이 어디있나? 단지 역사를 바로세우자는 차원일 뿐이라는 것은 세살 먹은 아이들도 안다.

 

김성수 家

△학무국 시국강연 강원반원

△학병출진 좌담회 참석

△유지시국간담회 발기인

△보성전문 직원 총동원(학병)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평의원

△흥아보국단 경기도 위원

△임전보국단 감사 등 ‘전쟁협력’ 행위를 벌인 것은 사실 아닌가?

 

매우 노골적으로, 매우 적극적으로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등 친일논설까지 개제하고라디오 강연에까지 출연하여 일제전시동원 체제에 협력하라고 선동하였다.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도 썼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친일행위로 규정하지 않으면 도대체 친일행위는 무엇인가?  게다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는 일본 천황에게 비행기까지 헌납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더 악질적인 친일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언론사의 대표이고, 학교를 운영하는 이 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지도층이 양심을 저버리고 한 짓이다. 게다가 호남 최고의 갑부 아들이 한 짓이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입이 살아서 나불나불 인촌선생 어쩌구 하는 거 보면 기가 차다. 일제 때 그렇게 친일을 하고, 해방이 되자 마치 독립운동이나 했던 것처럼 돌변하고서는 반공세력의 일원으로서 투쟁했다. 독자들과 학생들에게 일언반구의 반성도 설명도 없었다.

 

죽기 싫으니까 공산주의와 맞선 것도 무슨 자랑인가? 

가만히 있었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김성수를 그냥 놔뒀을 것 같은가?  

 

그러니 본의 아니게(?) 살기 위해서, 자기 재산 지키기 위해서반공주의자로 앞장서서 공산주의 격퇴를 위해 헌신할 수 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그리고 독재에 저항하면 뭘 얼마나 저항했다고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승만하고 권력다툼하다가 열받아서 앓아누웠던 거 밖에 없다. 1952년에 부통령으로 있을 때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상의없이 임명하니까. 아가지고 지병인 중풍이 도져서 앓아누워 있다가 1955년에 죽은 거 아닌가?

 

그게 독재에 저항한 건가? 그거 가지고 침소봉대하면서 김성수가 민주주의 투사인양 호도하나?

진짜 민주화투쟁의 전위적인 역할을 했으면 아주 난리 나겠다.

 

이렇게 볼 때 김성수는 동아일보와 그 무리들이 칭송하는 만큼의 무슨 업적이 없다. 찬양만 넘친다.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에 경제가 발전했나, 민족문화가 활짝 꽃피웠나? 뭔데, 김성수, 김성수 하는거냐?

 

김성수가 한 일이라곤언론, 정치, 경제, 교육을 망라하는 제왕적인 권력을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 밖에 없다. 족벌사학, 족벌언론의 기틀을 만든거다. 이게 김성수식 공선사후다.  

 

그 제왕적 권력을 바탕으로 그 후손들이 친일행각을 벌였던 선조 김성수를 애국자로 둔갑시키고, 거대언론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왜곡작업을 벌이고, 학원 인사들이 총동원되고, 인촌상이니 뭐니 하는 것을 이용하여 대중을 상대로 치밀한 상징조작을 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김성수와 어울리지도 않는 크레덴다를 사용해서 김성수의 친일행각을 합리화하는 거 아닌가? 거기다가 민족주의자 옷까지 억지로 입히고, 문화주의자 이미지까지 곁들여 완전히 성인군자 대쪽선비 이미지를 연출하여그것을 동아일보 부수 늘이고 김성수의 후손인 울산김씨 후손들이 영원히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지배하는데 악용하는 거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김성수의 묘를 고려대학교 내에 꾸미고, 인촌기념관을 만들고, 동상까지 세워서 우상화를 한 거다. 이런 민족반역자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건국훈장까지 주었으니 역사가 뒤틀리게 되는 거다.

 

그러나 똑똑한 고대생들은 친일파 김성수의 우상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성수의 묘에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침을 뱉었다.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경기도 모처로 이장하였다.

 

그 뿐인가? 용기있는 고대생들은 김성수의 동상에 수의를 입히고 한달동안 새끼줄을 꼬아서 모가지에 걸어 잡아당겼다. 1989년 4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얼마나 철심을 깊이 박았는지 동상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동상을 고대생들이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위대한 애국충정의 고대정신이 발현된 사건으로 민주개혁세력은 기억한다.

 

물론 김성수에게도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드골이 내세웠던 "최우선 가중처벌"의 개념을 생각해봐야 할 거다. 나치에게 아부하고 부역했던 소위 매춘언론인을 프랑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처벌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 는 드골의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전원의 매춘언론인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을 받았다. "쓸개"를 내놓은 언론인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프랑스의 매춘언론인이라고 그 품성이 김성수만 못하고, 업적이 김성수만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거대언론 사설에 아직도인촌정신을 선양하자는 식의 글이 올라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김성수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제국은고스란히 그의 아들 김상만에게 이어지고, 상만은 또 다시 아들 김병관에게 물려주고, 또 김병관은 이제 김재호에게 제왕의 바톤을 넘기려고 하고 있다.

 

일본 천황에게 비행기까지 헌납했던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또한삼양사의 창업자로서 수당장학회니 뭐니 하며 또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중추원 칙임참의 겸 만주국 명예총영사 겸 임전보국단 간부였던 김연수가일본천황에게 바친 국방헌금 총액이 80만원이다.

 

물론 80만원은 김연수로서는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다. 1년에 보통 80만원을 벌었으니까. 그러나 군수, 학교 교장의 월급이 당시 100원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돈이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800억원이다.

 

게다가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을 투입하여 조선항공공업회사를 설립하면서 일제 공헌의 대미를 마감한다. 5000만원이면 지금 돈으로 치면 5조원이다. 그러나 김연수는 지금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삼양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경제정의는 기업미래다."라는 구호아래 투명경영에 앞장선다고 한다. 그런데 "미디어 오늘"을 보니까 삼양사가 지난 추석 명절을 맞이해 신문사에 기업 광고를 집행하는 과정에서자사 설립자의 친일 행각을 보도한 한겨레신문 만을 제외했다.

 

참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겠다. 가만히 그냥 예전에 저지른 실책을 부끄러워하면서 앞으로는 잘하겠다 생각한다면 거기다가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그런 그 형 인촌 김성수는 민족의 대선각자이고, 그 아우 수당 김연수는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일색이니.....앞으로 일본 놈들이 쳐들어오면 또 그 지랄을 하겠다는 거 밖에 더 되냐?

 

문제는 김성수, 김연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집안이 엄청나게 막강한 세력을 여전히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성수의 막내여동생 김점효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김용완과 결혼하였다

 

김용완과 김점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얼마전 까지 전경련 회장을 지낸 김각중이다. 김각중은 경기도 수원의 갑부인 차준담의 막내딸 차현영과 결혼을 했는데 이게 좀 골 때린다.

 

김각중의 외사촌형인 김연수의 세째 아들 삼양사 명예회장 김상홍도김각중의 부인 차현영의 언니 차부영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장인이 똑같다. 그러니까 사촌형이랑 동서지간이 되는 거다. 김각중의 아버지 김용완이 김상홍에게는 고모부인데 겹사돈으로 이거 아주 골 때리게 되는 거다.   

 

김용완의 둘째 딸 김인중은 의사로 있다가 성주호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이 김용완의 사위 성주호가 충청남도 대전일대를 주름잡는 학원재벌인 창성학원 이사장이다. 소유한 학교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김용완의 세째 딸 김봉애는 동아일보 창간멤버 한기악의 아들인 출판사 일조각 사장인 한만청의 부인이 되었는데 이 한만청의 형의 장인이 고려대학교 총장과 신민당 당수를 지낸 그 유명한 유진오다. 이 유진오의 머리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나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유진오 또한 대일본제국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 별이다.

 

이 유진오가 "병역은 힘이다."라는 글을 신문에 썼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며 대화일치를 강조했던 것이다.

언론보국회의 회원이던 이 유진오가 느닷없이 해방이후 기회주의적으로 돌변하여 헌법학의 권위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독한 친일파 유진오는 김성수와 똑같이 철저한 반공주의를 앞세워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면서 건국의 기수가 되고 말았다.

 

그가 훗날 윤보선, 박순천, 유진산 등과 더불어 한국 야당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지만윤보선의 막내삼촌 윤치영이 박정희 공화당 하에서 의장을 해 먹는 식으로 사실 다 똑같은 친일파들이다. 박사니 뭐니 하면서 민중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군림했던 것이다. 적어도 유진오 류는 역사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아님은 물론 부끄러움을 아는 자도 못되는 것이다. 

 

그 유명한박동진이 유진오의 사위다. 박동진은 박정희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역임하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 두번이나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고, 주미대사까지 해먹은 자다. 박정희 아들 박지만 결혼식 할때도 민관식 등과 더불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봐라. 민주화투쟁을 했다는 자의 사위의 이력이 이렇게 균형이 안 맞는다. 

 

어이구, 어쩌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왔나? 다시 김용완으로 돌아가자. 

김성수, 김연수의 매제인 김용완에게 김용관이라는 동생이 있다.

 

김용관의 아들 김화중이 LG그룹 명예회장인 구자경의 장녀 구훤미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동아일보 가문과 LG가문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훤미와 현 LG그룹 회장 구본무가 친남매지간이다.

 

그런데 이 김화중과 구훤미 사이에서 낳은 딸 김선혜가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장남 이해욱과 결혼하였다.

대림과 LG의 결혼이자 동아일보의 결합이다.

 

웃긴게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막내 작은아버지 이재연이 LG 창업자 구인회의 둘째 딸 구자혜랑 결혼하였다. 참 복잡하게 엉키기도 한다. 그러면 구훤미의 딸 김선혜 입장에서 구자혜는 고모할머니냐? 시댁 쪽 작은할머니냐? 외가, 친가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다시 원위치해서 또 김용완은 국제그룹 창업자 양태진의 처남이 된다. 그러니까 국제그룹 회장이었던 양정모의 외삼촌이다. 당연히 현재 대한전선그룹을 맡고 있는 양정모의 동생 양귀애의 외삼촌도 되는 것이다. 양귀애의 시동생 설원봉이 대한제당 회장이다.

 

짧게 살펴 봤지만 얼마나 막강한가? 

김용완의 장남 김각중이 경방을 이어받아서 다시 그 장남 김준에게 넘겨주려하고 있다.

 

이 김준은 주의관찰대상이다. 민주개혁세력이 경계하는 브이 소사이어티라는 단체의 회원이다. 민주개혁세력이 색안경을 끼고보는 YEO라는 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다.

 

최태원과 각별한 사이인데다가 타이거풀스 전 대표이사 송재빈과 막역한 사이다. 송재빈이 누군가? 허주 김윤환의 사위 아닌가? 얼마나 친한지 타이거풀스에 투자까지 했었다. 이러니 민주개혁세력이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동생 김담도 마찬가지로 민주개혁세력이 눈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김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교수 임창생의 장녀 임진희와 결혼을 하였다.

 

내가 생각할때 이 김준이 또는 김각중이 어떻게든 이경서라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 동서라는 사람이 과학자 출신인 걸 감안한다면 임창생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임창생이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이경서는 장거리유도탄을 만든 사람이니까. 내 추측이 거의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런데 재밌는게 이경서는 국제화재보험 이필석의 아들이다. 그 형이 이회창의 사돈인 이봉서다. 만일 이경서가 김각중의 사돈 임창생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핵물리학자에, 장거리 유도탄 전문가에, 이봉서는 동자부장관을 지냈으니 이거 참 엄청난 에너지의 집안이다. 껄껄껄

 

이경서의 아들, 그러니까 이필석의 손자이자 이회창과 사돈인이봉서의 조카 이성혁이라는 청년이 요즘 민주개혁세력의 레이더망에 자주 걸린다. 관세청에서 조금 근무하다가 단암전자통신의 대표이사를 맡았고, 에퀴터블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중앙일보가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듯 해서 요즘 관찰 중이다.

 

다시 김성수 쪽으로 가보자.  

김성수의 아들로서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계승한 김상만은 동생 김상기와 한판승부를 벌였다. 동아일보 회장을 맡기도 했던 김상기와 동아일보 고려대학교 대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격렬한 후계전쟁을 펼쳤다. 결국 김상기 계열의 곁가지들은 모두 동아일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상만 계열만 남았다. 

 

영국 런던대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김상만은 민주개혁세력에게 엄청난 불쾌감을 안겨준 인물이다.동아일보 곡필은 차치해두고서라도 1989년 5월에 고려대학교 부정입학의 전모가 드러난 사건은 김상만의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당시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애국적인 민주개혁세력의 전위부대 고대생 1000여명이고대 본관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총무과 캐비넷을 열고, 총장실 금고를 부쉈다.  기절초풍할 문건이 나왔다.

 

어마어마한 부정입학 자료였다. 점수조작의 명명백백한 데이타가 나온 것이다. 양심적인 고대생들은 분개했다. 고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김상만은 허겁지겁 자료를 폐기하고 요로에 손을써서 사태를 간신히 무마하고 반발하는 교수를 해직시켰다.

 

당시 도올 김용옥선생도 격렬하게 고대의 부정입학 실태를 비판했다.  나는 그래서 고려대학교의 모 교수가 신문을 통해서 도올선생을 지나칠 정도로 비판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럴까... 이상하다....

 

어쨌든간에 김상만은 그런 식으로 해서 아들 김병관에게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고스란히 물려줬다. 김성수의 손자인 이김병관의 행태가 또 우습다.

 

이 사람은 횡설수설과 술주정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고려대 정문 앞에서 술을 마시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거 회장한테 술 좀 그만 묵고 다니라 그래라. 그래갖고 회사나 학교나 제대로 운영이 되겠나?”

 

동아일보 명예회장이자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인 김병관이라는 사람이 한 짓을 보면아주 웃겨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이런 우스꽝스런 얘기들이 동아일보 횡설수설 코너나 휴지통 코너에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김병관은 고려대 정문에서 술이 취해 가지고 북한 노래 <심장에 남은 사람>이라는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고, 자신이 주사파라고 욕했던 학생들이 농성하는 곳에 퍼질러 앉아서 같이 반 아셈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또 느닷없이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칼럼을 복사하여 흔들면서 횡설수설을 하기도 했다.

 

또 낮술에 취해가지고 동아일보 편집국을 방문한 '왕과비'의 여주인공 채시라에게“대왕대비 마마!”를 엎드려서 외쳤다고 한다. 껄껄껄!! 결국 이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술주정이나 상습적으로 하는 인물이우연히도 동아일보 사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세습사주가 되어대한민국 대표신문과 여론을 좌지우지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웃고 말 일은 아니다. 이런 인물이 한국 언론과 교육의 주요부분에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절하고 끔찍한 일이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술주정이 보도가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니까.세금도 제대로 안 내서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병관은 요즘 다시 그의 큰 아들 김재호에게 동아일보를 물려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김재호는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의 사위다. 이한동의 또 다른 사위는 LG전선 명예회장 허준구의 다섯째 아들인 허태수 GS홈쇼핑(LG홈쇼핑이 개명) 대표이사다.  이러니 동아일보는 LG그룹, GS그룹과 연결이 된다.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의 동서의 바로 위 형이 허명수GS건설 부사장인데이 사람의 부인이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때 북한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인하고 식구들만 데리고 도망쳤던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딸 노경선이다. 헉!

 

김병관의 작은아들은 그 유명한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의 둘째 사위 김재열이다. 이건희의 딸 이서현이 횡설수설 김병관의 며느리다. 껄껄손위처남인이재용상무와 청운중학교 동창인 김재열은 아버지와 장인어른 덕에 나이 서른 중반에 벌써 제일모직 상무이사가 되었다. 화이팅!!

 

김성수의 동생인 삼양사 김연수 쪽을 살펴보자.김연수는 7남 6녀를 낳았으니 꽤 복잡하다. 우선 작년에 사망한 큰아들 김상준은 삼양염업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김상준의 둘째 딸 김정희가 동부그룹 회장 김준기와 결혼하였다.

 

이 김연수의 손주사위 김준기의 아버지는 유당에서 3, 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6, 7, 8대 국회의원을 지내고유정회 국회의원까지 지내고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7선의원 김진만이다.  김진만은 본래 강원도 동해의 대지주인 김향경의 아들이다. 김진만은 현재 민족중흥동지회 회장이다.

 

민족중흥동지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는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알 것이다. 전직 공화당, 유정회 의원 및 유신시절 장·차관, 박정희 측근 등이 모여서박정희를 추모하고 기념하다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물론 대다수가 한나라당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이 김진만의 아들 가운데 열린우리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도 있으니 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김택기의원이 바로 김진만의 아들이고, 동부그룹 회장 김준기의 동생이다. 김택기의원의 장인이 한국자유총연맹 이철승이다. 헐!

 

김진만의 딸 김희선은 농심그룹 회장 신춘호의 아들 율촌화학 부사장 신동윤과 결혼하였다. 이 김진만의 딸 김희선의 시누이 신윤경이 태평양 대표이사인 서경배와 결혼했고, 이 서경배의 형 서영배가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의 딸 방혜성과 결혼했으니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과히 멀지도 않다.

 

물론 방상훈 - 허광수 - 김동조 - 정주영 - 노신영 - 홍진기 - 이병철 - 김병관으로 이어지는 방법도 있다.  김진만의 딸 김명희는 소설가 김동리의 아들 김평우와 결혼했다.또 다른 아들 김무기는 서울대 문리대학장 이종진의 딸 이지은과 결혼했다.

 

어쨌든 김연수의 사돈인 거물정치인 김진만 집안이 이렇듯 막강하다. 한국 겹사돈 클럽을 연결하는 고리다. 김연수의 손주사위 김준기의 딸 김주원은 파산한 리젠트화재해상보험(해동화재)회장 김효일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물론 파산을 했다고 해서 완전 망한 건 아니다. 

 

김준기의 아들은 강남, 분당에서 잘 나가는그 유명한 차병원 원장, 포천중문학원 이사장 차경섭의 손녀, 차광렬의 딸 차원영과 결혼하였다.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은 문교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군사독재자가 정권의 기반이 약할 때 갖다가 방탄용으로 쓰는 사람이다. 박정희정권 초기에 42살의 나이에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는 사촌형 김상만이 이사장으로 있는 고려대학교 총장을 도합 10년간 맡았다.

 

그러다가 전두환이 집권 초창기 국무총리로 불러서 또 1년여간 군사독재정권을 방어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사실이 이러하니 동아일보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김상협은 동아일보 이사, 감사 역할도 수행한 바 있다.

 

광주에서 피바다를 일으키고 정권을 찬탈한 정통성도 없는 살인마 군사독재정권의 총리 노릇을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교수 출신의 고려대학교 총장이 덥썩 수락하는 것이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인촌 김성수의 조카가 할 짓인가? 

 

최초의 대학총장 출신의 국무총리라며 칭찬일색이다.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한 최초의 대학 총장이 자랑스러워?? 껄껄...

 

김상협의 외아들 김한은 메리츠증권 대표이사다. 언론에서 은근히 띄워주고 있다. 제목이 보통 이런 식이다. "CEO 책임 다하려 사재 털어..." 장난치냐? 장난쳐?

 

사촌동생 김각중과 동서가 된 세째 아들 김상홍이 삼양사 그룹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들 김윤이 그 대업을 계승해가고 있다. 김윤은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김종규의 딸 김유희와 결혼하였다.

 

김상홍의 큰딸 김유주는 윤주탁의 아들 윤영섭과 결혼하였다. 윤영섭은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다. 그런데 이 윤영섭의 동생이 윤영각이다. 이 윤영각의 부인이 박진아다. 박진아의 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포철 명예회장박태준이다. 껄껄...

 

게다가 김상홍의 둘째아들 삼양제넥스 대표이사 김량은박정희정권하에서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의 딸 장염은과 결혼했는데이 장염은의 오빠가 국민의 정부 말기에 부동산 투기의혹에 휩싸여 비운의 국무총리 서리로 낙마한 매일경제신문 회장장대환이다. 요새 신문협회장을 맡고 있다. 

 

매일경제신문2005년 9월 21일자를 봐라. 김상하 삼양 회장이 대한상의를 장기간 이끈 것은 당시 존경받는 기업인의 대표격이었기 때문이다." 껄껄..

 

김연수의 다섯째 아들 김상하는 김상홍의 동생이다. 삼양사 회장이다.김상하의 딸 김영란이 모나미 회장 송삼석의 아들 송하철과 결혼하였다. 김연수의 큰 사위가 나비넥타이 매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사람들을 웃기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이다. 김연수의 다섯째 사위는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김영국이다. 김연수의 여섯째 사위는 인공심장의 권위자라는 김성완이다.

 

하여튼 간에 친일파로 거론되는 김성수, 김연수 가문, 정말 무지하게 막강하다.다 언급하다가는 녹초될 지경이다. 막판에 김연수 아들, 딸들은 너무 힘들어서 소홀히 다뤘다. 또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의 처가쪽은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앞으로 더욱 세밀히 짚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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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명가-11편 방응모 家.

 

자, 날씨도 좋으니 한국의 명문가문(?)에 대해 또 논해보자 

요 며칠 머리가 아팠다. 사실 이 작업은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수구 떼들이혈연과 혼맥으로 얽키고 설켜있는 징그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정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특히 하루 종일 듣기도 싫은 이름들이 머리 속에 뱅뱅 돌아다니는 것은 매우 불쾌하고 짜증난다.

 

어쨌든 고구마줄기같은 수구 떼 지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다. 오늘은 그 11편, 조선일보방응모집안이다. 민주개혁세력 사이에서 이 집안의 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과 그들이 운영하는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100대 죄악이라는 것을 정리해 놓은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걸작을 한번 살펴보면 조선일보의 죄악은 크게 10가지로 분류가 된다.  

우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친일행각이 조선일보의 10대 죄목 가운데 하나다. 윤봉길의사를 범인이라고 지칭하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를 민족 정론지라고 칭하고 있다.

 

두번째 죄악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독재정권 찬양이다. 전두환 신군부와 결탁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일보는 지금도 전사적으로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찬양에 열을 올린다.

 

세번째 죄악은 최대부수의 신문권력을 악용하여 민주화인사를 탄압하고 얼토당토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정남, 한완상, 최장집 등을 황당한 빨갱이 여론몰이로 낙마시켰다.

 

네번째 죄악은 국가안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반민족적 행태를 서슴치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위협, 공포감 조장, 적대감, 긴장감을 유발시켜 여기에 편승해 신문장사를 한다.

 

다섯번째 죄악은 악랄한 지역감정 조장이다. 특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이다.

그래서 민주개혁세력은 조선일보를 반호남의 소굴이자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이라고 본다.

 

여섯번째 죄악은 반통일적인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상식이하의 딴지걸기다.

일곱번째 죄악은 잦은 오보와 상습적인 곡필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86년 김일성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물론 김일성 사망설 그 자체보다는 타이밍이 문제다. 정권이 존립의 위기에 있을 때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교묘한 공작을조선일보는 밥먹듯이 해 왔다. 금강산댐도 마찬가지... 서울 불바다 뻥튀기 보도도 마찬가지... 

 

여덟번째 죄악은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와 IMF 국가부도를 불러들인 책임이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가 대표적이다. 또 IMF사태 "이틀"전까지 "외환위기 없다"며 되풀이 호언장담하면서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것이 한가하게 사상논쟁이나 했다.

 

아홉번째 죄악은 제왕적인 족벌세습경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공공재인 신문을 사유물로 전락시키면서 편집권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열번째 죄악은 "나는 너를 비판해도 너는 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한국 사회의 최후의 성역으로 언론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런 특권적 발상이 오만방자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자행하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다.

 

이상 조선일보의 큼직큼직한 죄악을 열가지로 살펴보았다. 이 이외에도 그들의 무책임한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노무현대통령은 조선일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 조선일보는 이미 신문도 아니고, 언론도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수구특권세력의 선봉이며,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의 기관지에 불과합니다. (2001,6,28 민주당보와의 인터뷰)

 

## 나는 일찍이 "조선일보는 이회창의 기관지"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이회창총재와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은 아무런 근거없는 내용도 여과없이 대서특필하고사설,칼럼으로 맞장구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설, 칼럼으로 공개훈수를 하기도 한다. (2001, 9, 11 노무현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 민주화운동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상품성과 신뢰도를 높여주는 인터뷰는 할 수 없습니다. (2001, 11,19 노무현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의 부당한 공격의 피해를 본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지금도 조선일보의 편파와 왜곡보도에 짓밟혀 고통받는 수많은 분들에 대한인간적 도리 차원에서도 조선일보의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2001,11,19 노무현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가 극심한 왜곡,편파보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서나의 지지자들과 함께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2001,11,19 노무현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더이상 불공정신문 조선일보에게 아첨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선일보와 싸워서 이겨야 민주당이 정권재창출 할 수 있습니다.잘못된 언론은 개혁되어야 하고, 4분의 3인 영향력을 절반이하로 줄여 비주류의 힘으로 전락시켜야 합니다. (2001,11,26 광주무등산관광호텔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 조선일보는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는 신문입니다.

친일경력과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던 과거가 있는 신문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 있는 신문이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적대적인 신문입니다. 그들이 왜곡보도를 하는 한 국민들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신문과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2001,12,3 오마이뉴스 인터뷰)

 

## 조선일보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권 하나 세워보고 싶습니다.

(2002,1,31 전국대학신문 기자 간담회에서)

 

## 비열한 조선일보의 반격보다는 우리 사회의 기회주의적 처신을하고 노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허위의식이 더 고민됩니다.(2002, 1, 31 전국대학신문 기자간담회에서)

 

## 조선일보는 권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 앞에서 슬금슬금 피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기 조금 철없는 것처럼 싸우는 정치인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2002, 2, 20 오마이뉴스 인터뷰)

 

## 소유지분제한 소신을 포기하라는

족벌언론의 압력에 굽히지않아 이렇게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언론에게 고개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십시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요!!!!

( 2002, 4, 6 민주당 대통령후보 인천지역 경선 연설에서)

 

## 저는 아내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딱 하나 있습니다.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해도 자꾸 조선일보를 봅니다. 그것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계속 봅니다.

(2002년 4월 7일 민주당 포항경선 연설에서)

 

## 조선일보와 인터뷰는 앞으로도 안합니다.

조선일보는 분명히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언론의 정당한 권리로서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이겁니다.

그러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거짓말하면 안되지요.. 공정성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2002,4,30 오마이뉴스 창간1 주년 기념인터뷰)

 

## 분명하게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그 분들처럼 천황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가지고 뒷돈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2002, 6, 30 경기도 시흥시 지방선거 지원연설에서)

 

## 개혁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바로 조선일보이며,

조선일보가 가장 굳게 손잡고 있는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입니다. (2002, 9, 28 오마이뉴스 인터뷰)

 

## 조선일보와 공개토론을 제안합니다. 국민들앞에서 공개토론 한번 해봅시다. 생방송으로 합시다.

언론이 자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특정인을 겨냥해서그 사람을 해치는 그런 악의적인 기사를 마구 왜곡하고 조작해서 쓰는 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1인 지배체제입니다. 생사여탈권을 회장과 사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2002, 9,28 오마이뉴스 인터뷰)

 

##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각을 세우고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을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신문이) 너무 악의적이고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문에 협력해서 상품성을 높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부당한 구조와 협력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건 누구건 부당한 구조와 협력하지 않아야 합니다.

(2002, 11, 1 미디어 비평과의 인터뷰에서)

 

## 당신, 무슨 언론에게 고통을 받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거전날요, 정몽준후보가 노무현과 공조를 파기했다는 그 신문을 무가지로어마어마하게 해 가지고 온 천지에 뿌리고.. 조선일보 그랬지 않습니까? 이거 진실입니다. 진실이구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그 다음에 제가 당선되고 난 이후에 흔히들 밀월을 얘기하는데, 대통령 당선된 그날부터 저한테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합리적인 비판만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 말이 나왔으니까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냥 원칙대로만 가겠습니다. (2003, 5, 1  MBC 백분토론에서 중앙일보 김영희의 질문을 받고)

 

어쨌든 근래에는 대통령께서 그냥 꾹 참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조선일보의 불공정성과 편파성이 시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 대통령이기 때문에 못하는 말을 이제 유시민의원이 앞장서서 한다.

 

"<조선일보>나 <문화일보> 같은 경우는 정상적인 언론기관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집단입니다. 대한민국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배하고 싶어하는 정치적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언론행위라는 것을 빙자해서 사실상의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죠. 내용적으로는 정치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것에 관해 비판하면'언론에 대해서 왜 탓을 하고 왜 탄압하려고 하느냐, 언론은 본디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인데, 왜 우리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느냐'고 나옵니다. 이것은 언론의 행위가 아니죠." - 2005, 8, 31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쯤해두고 우선 신문재벌 방씨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계초 방응모에 대해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운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또 12만원, 지금 돈 120억원을 투자하여태평로 일대에 1400평의 땅을 사서 당시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투입하여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는 거다. 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헐...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의 인사들을 주필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으며(1920년),  

이후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 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 것이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의 중심멤버요 최고의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의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의 천황어능위를 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 희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장삿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삿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기적인 변화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반도 최고 갑부에 해당되는 방응모가 먹고 살기 위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의 친일은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신들이 보여줬던 비겁함과 한계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방응모의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적인 결과를 유발하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6.25가 발발하여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방응모는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라는 책에 의하면 납북 도중 이회창의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근리의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의 구술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매우 신뢰성이 높고,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역사는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교수에 의하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의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교수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방응모의 납북 이후 방일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순리를 거역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때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가 포기하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의 회고록을 보면 3748평의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 그래서 육영수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의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당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오직 "천하의 주도 방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에서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 등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사장과 함께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어진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언급했듯이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일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 까지 들려서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에 데뷔해보니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다."라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를 통해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이 거래되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 “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의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의 명맥을 유지시키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장관을 지낸 권이성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초 형의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일생은 민족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 일생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의 몸은 갑니다만 방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하여 희대의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두환은 조선일보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난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만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권력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 비대화하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직장의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의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일체화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방일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 방상훈은 조선일보의 대표이사로서 현재 사주다. 숭문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작은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다.

 

방일영의 장남 방상훈의 부인은 윤순명이다. 윤순명의 아버지가 윤영구다. 그러니까 방상훈의 장인이다. 윤영구의 아버지가 윤영선이다. 윤영선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아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증손녀다.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의 증조부 윤치호의 친일행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99칸짜리 고택을 지어놓고 명문가문 운운하는 바로 그 집안이다. 윤치호의 사촌형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소다.그 윤치소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윤보선이다.

 

이 윤씨 명문가문은 앞으로 새로운 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보겠다. 아주 골 때리니까 기대하시라. 방상훈의 장인 윤영구는 교통부 관광국장, 육운국장을 거쳐 메트로 항공사 회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윤승구는 윤보선 비서를 지낸뒤 개인사업을 하다가요즘은 충남 아산의 윤치호 고택을 지키고 있다.

 

윤영구의 작은아버지 윤광선은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 물론 아버지 윤치호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이 윤광선의 딸 하나가 시집을 잘 갔다. 서울대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을 지낸 채동규가 윤광선의 사위다. 

 

채동규는 아들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의 의사, 교수로 키웠다. 절반은 미국물을 먹고 있고, 절반은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채동규의 가지들 가운데 채영문 연대 보건대 교수, 채기준 이대 전산과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연세대 이사장으로 있는 일민 방우영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아들 방성훈이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중이다. 방우영의 아들 방성훈의 장인은 영풍그룹의 주력사인 고려아연의 부회장 최창근이다.

 

나는 최창근을 전문경영인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신기하게도 영풍그룹의 창업자인 장병희와 고향이 똑같다. 똑같이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뭐가 있는게 분명하다. 역시 개천에서 용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껄껄....

 

각설하고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왜 방우영이 연세대학교 이사장인가? 

돈 주고 산 것인가? 무슨 학문적 업적을 남겼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연세대학교 이사장이 된 건가?  거참 희한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의 사연은 연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의 자료를 참조하시길.. 

 

어쨌든 이 방우영의 딸 방혜성이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의 큰아들 서영배와 결혼하였다. 방우영의 딸이 시집간 이 서씨집안의 혼맥이 화려하다. 서성환의 큰딸 서송숙은 서강대학교 상경대학장 박내희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소위 서강학파의 정점에 있는 건가?

 

서성환의 둘째 딸 서혜숙은 김의광과 결혼하였다. 김의광은 현재 태평양 계열사의 회장이다.

김의광의 아버지는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서국방부 차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한전 사장을 지낸 김일환이다.

 

김일환은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재향군인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군생활 5년 남짓 하고는, 재향군인회에서 영향력 행사하는 것은 50년 세월이다.

껄껄. 김일환은 경흥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세째 딸 서은숙은 고려대 의대 교수 최상룡과 결혼하였다. 최상룡의 아버지는 박정희정권 하에서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다. 부산 동성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네째 딸 서미숙은 부도난 우성그룹 부회장 최승진과 결혼하였다.

서미숙은 리베라 호텔의 고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비록 회사가 망했지만 굶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는 잘 살겠지.

 

서성환의 둘째 아들 서경배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농심그룹신춘호 회장의 딸 신윤경과 결혼하였다.

이로서 조선일보는 막강한 롯데패밀리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조선일보 혼맥의 백미는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LG 공동 창업자 허정구의 손녀 허유정이 결혼한 것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이로써 조선일보는 김동조가문과 결합되면서방준오는 정몽준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이 GS는 LG와 연결이 되어있고, LG는 한진과 연결이 되고, 한진은 롯데와 연결이 되고, 롯데는 농심과 연결이 되고, 농심은 태평양과, 태평양은 조선일보와 다시 연결이 된다. 이 부분은 훗날 한국의 명문가문 조중훈가, 또는 신격호가를 논할 때 세밀하게 따져보자.

 

■ 한국의 근대명가 - 12편조중훈 家.

 

나의 수구떼 지도에서 부실한 부분이 꽤 많은데 그 가운데 하루 속히 채워넣어야 할 부분이 이 '조중훈가'이다.  

그렇다면 왜 하고 많은 기업인들 가운데 하필이면 조중훈이냐?? 나는 이상하게 선단식 황제경영, 전제군 주식 경영하면 이병철이나 정주영보다 조중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중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업인 가운데 하나다. 이병철, 정주영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병철, 정주영은 어쨌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또 어쨌든 세계 1등을 해낸 사람들이다.

 

조중훈은 무엇을 창조했나? 어떤 부분에서 세계 1등을 차지했나? 생산한게 별로 없다.

이병철, 정주영은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 반면, 조중훈은 그림자가 너무나도 짙을 뿐만 아니고 빛을 발견하기가 무지 어렵다. 따라서 조중훈을 기업인 가운데 최고 명문가문으로 가장 먼저 넣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훈에 대한 칭송은 차고 넘친다. 우선 "한우물만 파라"는 조중훈의 경영철학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진의 계열사를 보면 대한항공을 비롯해서 한진중공업, 한진종합건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한진정보통신, 한일레저, 칼호텔네트워크, 한국글로발로지스틱스시스, 싸이버로지텍, 파스여행정보, 한진관광, 동양화재해상보험, 메리츠증권 등등이다.

 

이게 한우물만 파는 건가?창업회장을 칭송하는 것은 좋다. 부자 조중훈을 떠받드는 것도 좋다. 그러나 사실관계는 분명히 하고 찬양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위에 예시해놓은 계열사들이 어떻게 한우물인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저거 말고도 부지기수로 많다.

 

조중훈하면 수송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송은 인체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조중훈의 말도 맞다. 그러나 수송업의 한우물만 팠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메리츠증권이 수송업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한가지 조중훈에 대한 근거없는 칭송이 있는데, 나도 어릴 때 조중훈의 전기를 읽고 그렇다고 굳게 믿어왔다.

뭐냐면 조중훈이 무지하게 가난한 정비공 출신이라는 거다. 아니면 무슨 트럭운전사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인제도 얼마전에 그 따위 소리를 떠벌리는 것을 내가 들었다. 모르는 소리다. 조중훈이 상당히 나이를 먹은 후 그 부친이 사업에 좀 실패하긴 했어도, 서울 토박이로서 상당한 지주집안 출신이었다. 무슨 맨주먹으로 일어났느니 하는 소리가 다 개떡같은 소리란 말이다.

 

조중훈이 1920년생인데 1942년에 이연공업사라는 공장을 설립했으니 22살 때 사장이 되었단 말이다. 자기 아버지 도움없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2살짜리가 무슨 재주로 사장이 된 단 말인가? 이게 맨주먹으로 일어선 건가?

광복 이후 조중훈은 화물운송업을 전개했는데당시 조중훈처럼 화물운송업을 하는 사람은 경인지역에만 50여곳이 있었다.

 

조중훈이 약진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미군 화물수송을 따내면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조중훈은 미군의 신뢰를 얻기 위해당시 부자들이 타고다니던 중고 지프 대신 국내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벤츠를 타고 다녔다.

 

또 자신의 자택으로 미군들을 초대해서 풀 코스 요리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엄청 매달렸던 모양이다.

그것도 쥐뿔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심지어 귀국하는 미군간부의 송별식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니 당근 미군들이 좋아할 수 밖에. 이것은 훗날 조중훈이 비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조중훈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장성들의 도움으로 주월미군의 화물수송까지 맡은 것이다.

 

베트남전은 조중훈이 명실상부한 재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한진은 명실상부한 친미자본이다.

한진이 역사적으로 유별나게 권력과 같은 '힘'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비정상적 행태를 보여온이면에는 친미자본으로서의 태생적 한계가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힘있는 자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방식이다. 어찌 미국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미국에게 할 말 하겠다는 현정권이 밉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이런 방법으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가 5000만 달러도 안되는 시점에서중훈은 1억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다. 그야말로 떼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 떼돈으로 조중훈은 동양화재해상보험을 사들이고, 한진건설을 설립하고, 인하대학교까지 베트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불하받았다. 게다가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까지 인수하였다.

 

조중훈은 전제군주식 독단성으로 유명하다.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것이다. 임원들의 의견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조중훈의 "돌격 앞으로" 명령 앞에 모든 의견들은 묵살되기 일수였다. 조중훈의 주장만이 관철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내 언로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기업문화가 왜곡되는 것은 당연하다.

 

조중훈의 아들인 조양호 또한 임직원들에게 매우 호된 것으로 유명하다. 호된 것도 좋지만 호되게 혼내고 나서는 풀어주기도 해야 하는데대한항공 임직원들에 의하면 전혀 그런 성격은 못된다고 한다. 심지어 차갑기 그지없다는 혹평이 잇따른다.

 

게다가 조중훈은 인천 짠돌이라고 불릴만큼 사원들에게 월급을 박하게 주는 인물로 유명했다. 출퇴근 버스를 폐지하는 등 사소한 것으로 직원들의 기를 꺾었다. 다른 재벌그룹에 비해 복지혜택이 낮아 사원들의 근무의욕도 물론 낮았다.

또 조중훈의 회사는 육해공군 출신과 민간인 출신의 벽을 만들고, 학연과 지연을 가리는 연고주의가 팽배했다.

 

상관의 잘못을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려 사원들의 사기가 완전 저하됐다. 그 결과는 고객 7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회사로 전락한 것이다. 조중훈의 냉혹성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대한항공을 성장시킨 동생 조중건을 팽시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룹 차기회장으로 예견되던 동생 조중건을 내쫓고 장남 조양호를 앉힌 것이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조중훈은 동생 중건에게서 대한항공 사장 자리를 회수한 뒤 장남에게 물려주면서“하와이에 있는 호텔 하나만이라도 달라”는 동생의 마지막 부탁마저 끝내 거절하고 몰아냈다고 한다.

 

사주가 이렇듯 유별나게 냉혹한 성품이다 보니 대한항공은 의사소통이 활발하지 못하다고 한다.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다고 한다. 임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회장이나 사장에게 소신껏 얘기하는 인사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오직 상명하달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결국 이런 관료화된 사내분위기로 인해 김대중정부 들어와 큰 코를 다치게 된다.

 

김대중정부 출범 겨우 2년만에 무려 14건이나 사고를 낸 대한항공은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에서“대한항공은 전문경영인이 나서 인명중시 경영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폭탄발언’을 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무서운 직격탄을 쏘았다.

 

"대한항공 사고는 오너경영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김대중 대통령의 언명이 떨어지자 다음날 강봉균 경제수석이 나서서"경영인 바뀌는 거 정도는 대책도 아니다"라고 겁을 주었다. 드디어 중통령이라고 불리우던 최고실세 박지원 수석까지

 

"대한항공의 문제는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했다.

조중훈은 정권실세들의 기세등등함에 겁을 먹고 대한항공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 심이택을 앉혔다. 그러나 늦었다.

 

국세청 특별세무조사팀 240명이 한진그룹을 접수하였다. 국세청은 한진그룹의 1조 395억원의 탈루소득을 적발하고, 5416억원을 세금으로 추징하였다. 살면서 그렇게 국세청 직원들이 멋있어 보인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의미가 있건 없건 탈세를 막는 것이 국세청의 할 일이니까 잘 한 거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직접 외국순방차 대한항공에 탑승한 김대중대통령 앞에 "죄송합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조양호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입을 굳게 닫았다.

 

사실 이 사태는 조양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조양호는 국민의 정부 건설교통부 장관 면전에서 항공국장을 꾸짖을 정도로 권위의식에 젖어있었다고 한다. 옛 교통부를 대한항공 서소문지점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대한항공이 여러번 항공국장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이같은 위세는 조중훈이 역대 군사정권에 정치자금을 대 주고, 국적항공사의 대표로서 대우를 받으며, 한편 특별한 역할을 하면서 생긴 것이다.

 

이런 권력과의 밀착관계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안전문제에 관한 노력은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의 위세를 더 이상 눈뜨고 봐 주기 어렵다는 공식보고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진을 찍어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 가문은 미봉책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권력핵심부에 접근하려고 무지 노력했다고 한다. 한편 뒤로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알았던조중훈과 조양호가 대한항공 경영에 관여한다는 보고가 올라가 김대중대통령을 진노하게 만들었다.

 

"조회장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이라는 대통령의 지적이 있자마자국세청 요원 240명이 한진그룹 사옥과 김포 대한항공 본사, 여의도 한진해운 등 한진그룹 계열사 5곳을 전광석화같이 접수하였다. 한진 직원들은 부동자세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탈세, 외화도피, 기업자금유용, 변칙증여의 혐의를 잡아냈다. 검찰도 이에 맞춰서 반부패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여 한진을 압박하였다. 한진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물론 이 사태로 조중훈은 너무 고령이었기 때문에 구속이 안됐지만 조양호는 철창행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이유를 김대중 납치사건과 조중훈이 관련이 있다는 점과조중훈이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는 점 등을 들기도 하지만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발상이다.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전제군주와 같이 황제경영을 하면서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면서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범법을 일삼은 것에 대한 사필귀정의 응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73년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조중훈의 행적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출입국 기록에 의하면 조중훈은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8월16일부터 9월21일 사이수 차례에 걸쳐 도쿄를 오간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조중훈이 납치무마비 조로 3억엔을 들여 다나카를 매수한 것도 문명자 기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렇게 3억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승승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99년 화를 입은 것이다.

 

또 조중훈은 92년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고공공연히 김대중 후보를 적대시했다는 것도 세간에 알려진 바 대로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유분수지 한진중공업 LNG선 건조에 착수하면서"나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배를 지을 터이니, 여러분은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켜 달라."고 연설했다.

 

하여튼 여러가지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밉보여서 장남 조양호가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됐지만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얼마 안 있어 특사로 풀려났다. 경제발전에 다시 동참할 기회를 준대나, 뭐래나.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패가망신, 가문이 뿌리째 날아갈 뻔했지만여전히 조중훈 일가가 막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공룡처럼 버티고 서 있는 대저택에 폭풍우 한번 지나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중훈의 동생 조중건의 딸 조윤정은 이동원의 아들 이정훈과 결혼하였다. 이동원은 김동조와 한패로서 민주개혁세력의 집중감시를 받는 사람이다.

 

이동원에게는 이정은이라는 딸이 있다. 1959년생이다. 1959년생이 2002년에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바로 이동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원학원의 동원대학 학장이다. 이정은의 남편은 한일투자신탁 사장으로 있는 이정진이라는 사람이다.

 

조중훈의 형 조중렬의 아들 조지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내무부 차관을 지내고 박정희 정권하에서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병호의 딸 이숙희와 결혼하였다.

 

조중훈의 큰 아들 조양호는박정희 정권 하에서 교통부차관을 지낸 이재철의 딸 이명희와 결혼하였다.

담당 주무부서의 고위관료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이다.

 

조중훈의 둘째 아들 조수호는 최은영과 결혼하였다.

최은영의 아버지는 NK그룹 회장 최현열이다. 최현열의 부인은 신정숙이다.

 

신정숙의 오빠가 그 유명한 롯데그룹 신격호회장이다. 또 다른 오빠는 농심그룹 신춘호회장이다.

또 다른 오빠는 일본 산사스 식품의 신선호회장이다. 그러니까 조중훈의 둘째 아들 조수호의 부인 최은영의 외삼촌이

바로 어마어마한 신격호, 신춘호, 신선호다. 무섭지?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유력한 신동빈 부회장은 당근빤스 최은영의 사촌오빠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중훈의 며느리인 최은영의 외삼촌 신선호의 딸 신유나가태광그룹 창업자인 이임룡의 세째아들 이호진과 결혼하였다.

이 이호진의 매형이 양원용이다. 양원용의 사촌누이인 양경희가 중앙일보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하였다.

 

조중훈의 막내 아들 조정호는LG 창업자 구인회의 아들인 구자학 전 LG 반도체회장의 딸 구명진과 결혼하였다.

이 조정호의 장모인 이숙희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딸이다. 그러니까 조중훈의 막내아들 조정호의 부인 구명진의 외삼촌이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이다. 게다가 LG그룹 구본무회장은 조중훈 며느리의 사촌오빠가 된다. 헐!!!!!!!!!! 그런데 졸라 희한하다. 잘 봐라.

 

조수호와 조정호가 형제다. 그런데 조수호는 처의 사촌형부의 사촌누이의 남편의 형으로 홍석현에게 도달하고,

조정호는 처의 외삼촌의 처남으로 홍석현에게 도달한다. 똑같은 형제인데 조수호와 홍석현은 같은 급이고, 조정호와 홍석현은 조정호가 한수 아래다. 껄껄..

 

어쨌든 조정호가 요즘 회장으로 있는 메리츠증권에 부회장으로 김한이라는 사람을 임명했다. 김성수편에서 언급했듯이 김한은 삼양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의 아들이다. 한진의 3세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결혼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일 것이다. 어떻게 엮이는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뱀발 1 :

조선일보 방응모 편에서 결정적으로 빼먹은 것이 하나 있어서 보충한다. 방우영의 세째 딸 방혜신이 대양산업 회장인 정연욱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정연욱의 아버지가 신한국당, 한나라당 간판으로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을 한 그 유명한 정재문이다.

 

정재문의 부인 박영애의 동생 박애자가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의 아들 이두용과 결혼하였고, 이 이재형의 동생, 그러니까 이두용의 작은 아버지가 대림그룹을 창업한 이재준이다. 이재준을 계승한 현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75년생 세째 며느리 최영윤의 아버지가 삼환기업 회장 최용권이다.

 

## 뱀발 2 :

칼 858기 문제는 내가 언젠가 마흔 몇 가지를 모아서 의혹을 제기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속쓰리게 해서 서프앙들에게 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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