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평공 이공린 묘역(昌平公 李公麟 墓域)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산17번지
↑창평 현령(昌平縣令) 이공린(李公麟) 선생과 부인 숙인 평성박 씨(淑人平城朴氏=사육신 박팽년
의 둘째 딸) 묘이다.
↑위(뒤)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전경 앞의 산소가 창평 공 이공린 내외분 묘이고 중앙에 있는 묘가 창평
공의 장남 좌랑공(佐郞公) 오(鰲)의 내외분 산소이다.
촬영 이재훈
● 이공린(李公麟)
1437년(세종 19) ~ 1509년(중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字)는 정수(禎叟), 본관은 경주(慶州). 제현(齊賢)의 6대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윤인(尹仁)의 아들로, 세칭 경주 이 씨 팔 별집의 아버지이시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으나, 1456(세조 2) 그의 나이 20세(歲) 되던 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장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죄(罪)에 연좌(緣坐)되어 약 삼십 년(三十年) 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어머니 남양 홍 씨(南陽洪氏)를 절부(節婦 : 절개 있는 부인)로 봉(奉)하고, 그 자제를 등용하라는 왕명에 따라 1482(성종 13)에 비로소 이름을 무반(武班)에 얹었다. 뒤에 추천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義 : 예의를 맡아보던 관아의 從六品 벼슬)겸, 한성부 참군(漢城府 參軍 : 한성부의 군사를 맡은 正七品 벼슬)이 되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엔 그의 셋째 아들 재사당 원(黿)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그도 다시 연좌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어 흥덕 현감. 함열 현감(咸悅縣監)· 창평 현령(昌平縣令)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또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는 아들 원(黿)이 연산군으로부터 참형을 당하는 등,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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